어느 작가가 여행길에서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그는 11월인데도 벚꽃이 피고 토마토는 착과가 되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농부를 만났다고 했다. 기후재난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맞설 기술은 과거의 관성을 누가 먼저 깨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기후재난은 과학자들의 예측을 넘어서고 있는데, 권력자도 기업가도 과학자도 교육에서도 기후재난 앞에서는 누구 하나 용기 있게 얘기하는 사람이 없다. 연기처럼 희미하게 그 문제 자체가 잊어지는 게 우선 당장은 다행이라는 것인가. 11월도 중순이어서 일까. 그동안 추위 걱정 않고 지냈으니 이제 기후재난 속 겨울의 길목에서 추위에 따른 체험적 경험을 쌓으라는 듯 바람은 차갑고 드세다. 온기가 없는 곳에서는 생명이 자랄 수 없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혼자 살 수 없도록 창조된 것일까. 사랑하는 이를 잃고 가정이 삶의 근원이요 문명과 문화의 기초되는 곳이라는 인식을 체감한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 문득 걱정의 늪 속에 빠져버린 느낌이다. ‘있을 때 잘해’라는 대중가요 가사가 실감 난다. 글쓴이로 살아오면서 저렇듯 딱 부러지게 공감할 수 있는 유행가 가사 하나 없구나! 하는 자책도 따랐다. 나에게 희망이 있다면 아파트 옆 동에 살고 있는
역시 ‘이름 좋은 책은 옷도 잘 입는다.’ 책 제목이 얼굴의 눈이라면, 표지의 꾸밈은 그 사람 의상과도 같다. 는 생각에 평소 내가 즐겨 써온 문장이다. 좋은 책은 옷도 잘 입는다는 뜻은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과도 맥이 통한다. 책 쇼핑을 나갔을 때, 생각지 않았던 책이 손에 잡혀 책장을 넘기게 되는 경우가 있다. 책 사냥의 쾌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독서인으로서 미소를 머금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생각은 ‘그래 이 책이 내 영혼을 만져주겠지’ 하는 기대감이다. 집으로 돌아와 책장을 넘겨 읽을 때 첫 문장에서 전체를 밀고 나가게 하는 힘이 느껴지는 책이 좋은 책이다. 방송 광고는 20초 전쟁이라고 했다. 20초 안에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순간의 스릴을 강조하는 말이다. 아침햇살이 엷은 안개 같이 숲 속 나무사이로 비단길을 내듯 내리는 아침, 숲의 의자에 앉아 생각에 젖을 때, 내 마음은 고요하고 아늑해진다. ‘너만의 명작을 생각하라’는 은혜의 시간인가 싶어 감사 량이 가슴속으로 차오르기도 한다. 그때 나는 메모를 하며 작은 기쁨 속에 새로운 문장을 구상하면서 한 작품 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안게 된다. 그리고 나 자
10월의 한낮에 길을 걷는다. 해를 마주하고 풀밭 길을 걸으니 앞산 가을구름 한가롭고 햇살은 다사하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콧노래로 불러본다. 사랑하는 딸이 입시를 앞두고 학원에서 공부 할 때다. 나는 퇴근해 딸을 응원할 겸 미술공부를 하겠다고 스케치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해 가을 10월이었다. 학원 밖 팔달로 네거리 악기점에서는 축음기에 연결된 대형 스피커를 가게 문 밖으로 내놓고서 욕심껏 틀어대고 있었다. 감정이 무뎌질 나이지만 껴안고 사는 슬픔이 만만치 않아서인지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에서, ‘나를 울려요’라는 가사가 가슴에 각인되면서 눈물 대신 꿈을 위한 슬픈 에너지가 가슴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는 역 감정 같은 것을 느꼈다. 베토벤은 찬물을 머리에 부어가면서 머리를 일깨워 ‘걸작의 숲’을 완성하고 ‘고난을 통해서 환희로’의 교향곡(운명)을 작곡했다고 한다. 쓸데없이 슬프다고 입버릇처럼 뇌까릴 일이 아니다.
살맛 돋는 가을이다. 가을바람은 추석을 앞세우고 왔다. 그 바람이 목을 껴안아주고 피부를 만져주면 마음은 얻는 것 없이 상쾌해지고 몸 컨디션은 상승된다. 그 기분으로 숲길은 걸으면 가슴속에서는 나도 모르게 익숙하게 불렀던 노래가 재생되어 입 밖으로 나온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추억은 가슴속 열차를 타고 빛바랜 색으로 달려온다. 위의 동요를 부르거나 들으면 나이 따라 헐거워진 눈물주머니 탓인지 눈가에는 눈물이 맺힌다. 특별히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에서 마루 끝에 나와 앉아 ‘엄마를 불러 봅니다.’라고 나는 바꿔 불렀다. 그러면서 흐르는 눈물을 그냥 흐르게 했다. 이것이 내 영혼 1번지 고향 정서요 그리움의 본향이다. 내게는 형제도 이웃도 없었고 아버지는 늘 밖에 계셨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마루가 번들번들 윤기가 돌고 빛이 날 정도로 닦으셨다. 가슴속 슬픔을 말 대신 부지런한 살림살이로 다스렸다. 그리하여 마루의 바닥일지라도 윤기가 흐르도록 길을 내면서 자신을 닦달하신 것 같았다. 어머니는 비가 오
가을은 시골 선비와 같이 왔다 사랑방 손님처럼 떠난다. 숯불고기 집의 불판같이 뜨거웠던 여름이었다. A4용지 1매 공간에서 헐떡이는 닭이나 땀구멍이 없는 돼지는 흙탕물에 몸을 굴리면서 더위를 식혀가며 견뎌낸다. 그런데 흙도 물도 없는 콘크리트 벽 안에서 열 받으며 목숨 걸고 살아냈던 이 땅의 여름이었다. 그래서인지 ‘반도 강산’이요. ‘한반도’라고 부르는 조국의 땅에서 살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인내 할 줄 아는 의지와 고운 마음결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반도 강산!’하면 도산 안창호 선생이 생각난다. 대한민국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의 호를 ‘반도강산(半島江山)에서 도자와 산자를 빌려 도산(島山)이라고 하였겠는가. 반도 강산은 삼면이 바다로써 장단점이 있다. 하지만 장점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반도 강산에는 사계절이 분명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일 년을 사는 동안 봄여름을 겪으며 씨 뿌려 가꾼다. 가을겨울을 지내면서는 자연과 인생에 의한 결실의 계절을 경험하게 된다. 흰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겨울의 맑은 풍경 속에서는 마음 빨래를 하며 영혼을 새롭게 한다. 매운 계절 뒤에 오는 봄의 새 희망을 임신하면서-. 만약 1년 내내 빙벽 안에서 살아야 하거
더위로 인해 열 받는 지구 안에서 웃고 살자고 한다면 정신이 외출해 버린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도 웃어보자고 '강의 유머 기법'을 읽다 보니 '사람을 졸게하는 죄' 라는 테마가 있다. 그 내용이다. 늘 교통법규를 위반하던 총알택시 기사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목사님이 동시에 천국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목사님을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총알택시 기사를 칭찬했다. 기가 막힌 목사님이 그 이유를 물어보자, 하나님이 말하기를 “너는 늘 사람들을 졸게 했다. 하지만 총알택시 기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하나님!”하고 늘 기도하게 했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깨우고 나의 길을 가기 위한 심신의 워밍업으로 이른 아침이면 헬스장으로 달려간다. 가는 길에는 한 대학 생환관이 있고 그 산자락 아래로는 도로가 있다. 그 길 가운데는 양쪽 도로를 지켜주는 분계선에 수십 년 된 플라타너스가 우람하고 듬직하게 줄지어 서 있다. 나무는 얼마나 오래 살았으며 삶이 버거웠는지 얼굴에도 몸에도 검은 구멍이 뻥뻥 뚫렸다. 가지는 떨어져 나가고 위로 뻗은 줄기도 꺾어져 버린 그대로이다. 하체만 세월 앞에 당당한 모습이다. 얼마나 처절한 삶이었으면… 하고서 나는 내 삶의 안을
이 더위에 난 꽃이 피었다. 이른 봄에 분갈이를 해서 그럴 것이다. 먼저 올라온 꽃대는 시들해졌다. 난을 선풍기 옆으로 앉히고 차분히 들여다본다. 꽃은 꽃인데 난 꽃이라서인지 코와 눈과 가슴이 나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신석정 선생의 수상집 ‘蘭草 잎에 어둠이 내리면’을 펼쳐본다. 선생님은 한복을 곱게 입고 뿔테안경을 쓴 채,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시는데 책상머리에는 큼직한 난 화분이 놓여 있다. 그 사진 우측 아래는 작은 글자로 ‘그윽한 서실에서의 저자’라고 새겨져 있다. 책장을 넘기니 ‘서시’로써 ‘난초 잎에 어둠이 내릴 때’라는 시가 있다. ‘난초 잎에/ 어둠이 내릴 때// 그때 나는/ 노을이 흔들리는/ 언덕에 앉아 있었다.// …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만든다는 것이다’ 에머슨의 글이다. 토머스 제퍼슨은 ‘나는 책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괴테는 ‘나는 책 읽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80년이라는 세월을 바쳤지만 아직까지도 잘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인류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영역일지라도 인류를 번영시킨 것은 책이 아니겠냐고 주장한 학자도 있다. 멈추지 않는 독서를 통해 자기 자신을 쌓아온 많은 사람
여름날 ‘부채!’ 하면 담양 소쇄원 댓바람 소리가 생각난다. 대나무 숲 사이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대나무의 바람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부채로써 합죽선의 멋과 신바람은 뭐니 뭐니 해도 남원의 판소리 춘향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옥에 갇힌 춘향이를 만나러 가서 “암행어사 출도야!” 하고 외치면서 소리꾼이 쥐고 있던 합죽선을 쫙 펼칠 때의 후련함과 통쾌한 감격! 그리고 당시의 민주화 즉 신분 차별 없이 남녀평등사상이 깃들어 있는 외침이었기 매문이다. 그런가 하면 한여름 마을 앞 정자나무 그늘 아래서 모시옷을 곱게 차려입은 노인들이 모여 앉아 부채 바람을 일으키면서 흰 수염을 날리던 할아버지들의 풍류적인 삶의 모습이 떠오른다. 선비들 영혼의 바람결을 존중하며 속되지 않고 운치 있는 품격의 멋을 살아내는 그 정신이 그립기에. 지구의 온난화에 북극곰은 어디로 가야 하나? 또는 여름이 5개월일 것이라는 등 더운 시절이라서 말도 많다. 나는 소화기가 부실해 찬 음식과 냉방은 궁합이 안 맞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렇게 더운 여름날이면 어머니의 말씀 따라 웃옷을 벗고 샘가에서 팔을 펼쳐 짚고 궁둥이를 높이 쳐들고 있으면
국어 시간이 다른 학과 시간보다 수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그렇게 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독서와 글쓰기는 내게 스며들었다. 그 무렵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만났다.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로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 건 웃지요. 지금 같이 공부도 기술도 돈벌이도 연애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웃 없이 살아가는 게 아니었다. 남쪽으로 창문 하나 내고 자연 속에서의 삶을 사랑했다. 한가한 마음으로 강냉이 심어 깨물어 먹으며, 아는 사람이 오면 함께 먹겠다는 정신이었다. 이러한 삶이 바로 부모의 삶이요 가족들의 생활이었다. 그 속에서 성장하고 학교 가서 공부했다. 마을에서는 어른 아이 알아보며 인사 잘하면서 성장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어온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상적으로나 자본논리로 꿰맞춰 설명할 수 있겠는가. - 그러니 웃는 수밖에. 중국의 대표적인 목가 시인과 전원시인을 꼽으라면 도연명을 빼놓을 수 없다. 귀거래사의 주인공인 그는 벼슬을 버리고 귀농 생활을 하면서
공부하는 목적은 인식의 변화를 꾀하며, 철학적 사상의 확충과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는 데 있다. 한마디로 영혼을 풍요롭고 밝게 가꾸는 일이다. ‘나는 지금 무엇하며 사는가?’를 생각하면서 아침에도 실비 내리는 산길을 걸었다. 읽히는 수필, 내 아이들이 읽어줄 만한 글을 써야 할 텐데- 하는 작가로서의 의무적인 생각을 했다, 예술가에게도 공주병 같은 심리가 있는 것일까. 내가 쓴 글이 감동적이고 울림이 있어 독자의 사랑을 원하고 있는 것 같다. ‘공주병 스타일’이라는 유머다. 이순신 스타일 : 나의 미모를 적에게 알리지 마라./ 안중근 스타일 : 하루라도 예쁜 척하지 않으면 온몸에 닭살이 돋는다,/ 맥아더 스타일 : 공주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리질 뿐이다./ 나폴레옹 스타일 : 내 사전에 추녀는 없다. 몸 기능은 낡고 세월 수치는 쌓여 가는데, 어느 날의 오후 가족까지 잃었다. 황량한 우주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다는 느꺼움이 가슴을 날카롭게 찔러댈 때가 있다. 새는 제 이름으로 운다고 한다. 이름대로 운다는 것은 운명대로 운다는 것이다. 조상이 내린 운명과 이름대로 살면서 울어댄다면 나는 여자 이름이어서 남자로서 그 울음도 비 매력적일 것이다. 남달리 타고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