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강을 낳고, 강은 숲을 가꾼다.’ 산과 강, 강과 숲. 거기에 공기가 있어 내가 산소를 호흡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강 가운데의 섬 같은 산을 하염 없이 바라보았다.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인간의 체온이 종교라는 어느 시인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예고 없이 찾아온 친구 차를 타고 진안고원 ‘용담호’에서 나는 한동안 언어를 잊고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사는지를 모르면 그날그날 아무렇게나 살게 된다는 생각과 함께. 1971년 일이다. 대전고등학교 김영덕 교감선생님으로부터 그의 저서 '나무도 보고 숲도 보고'라는 수필집을 받았다. 책을 호롱불 심지 돋워가며 읽었다. 곧바로 감상문을 써 보내드리며 나도 수필을 공부하며 쓰고 있다고 했다. 그분은 써 논 글을 한 편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농사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좌골신경통으로 허리 다리의 통증을 방바닥을 치며 호소하는데, 소낙비로 인한 빗물은 온 마당을 넘실대고 있는 안타까움을 작품화한 수필을 우편으로 보냈다. 선생님은 나를 초대하였고 나는 처음으로 대전고등학교를 찾아가 인사드리고 하룻밤을 보낸 뒤 돌아왔다. 수필 공부로 맺은 첫 인연이요 은인이었다. 그분의 책을 읽고 보이지 않는 나무
두 시간 동안 서서 ‘독서와 인생’이라는 이희승 선생의 수필을 깜냥에 열강 했다. 지친 몸 이끌고 가서 ‘덕진호수’ 곁 임자 없는 의자에 궁둥이를 얹었다. 수중(水中) 도서관 서쪽 분수대에서 내뿜는 분수 쇼가 볼품이었다. 호수 주변 나무들은 때 늦은 단풍잎과 노을빛이 조화롭게 선명도를 연출하고 있었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를 건너오고 가는 젊은이들 모습은 한가한 낭만 그 자체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걸을 때가 좋았는데… 하고서 노을이 잠기는 호수의 면면을 보고 있자니 한영애 가수의 ‘옛 시인의 노래’가 생각났다. ‘마른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는 작은 잎새 하나/ 그대가 나무라 해도 내가 내가 잎새라 해도 우리들 사이엔 아무것도- 얼마 후 한국 『고전해학』에 나오는 ‘희청군성(喜聽裙聲)’의 한 대목이 뒤를 잇는다. 송강 정철과 서애 유성룡이 같이 있다가 막 헤어지려는데 백사 이항복과 월사 이정귀, 일송 심희수가 동석했다. 술이 은근히 취하자 서로 문장에 대한 품격을 나름대로 논하게 되었는데, 먼저 송강이 말했다. “밝은 밤, 밝은 달빛, 다락 위에서 구름을 가리는 거문고 소리가 제일이지. 그러자 심일송이 “만산홍엽인데 바람 앞에 원숭이 우는 소리가 제격일 걸세
시를 공부한다는 여성에게서 문자가 왔다. 명절이 끝나는 마지막 날 카페에서 만나고 싶다고. 이어서 그는 수필을 공부하고 싶어 꼭 두 가지만 물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순간의 느낌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적인 풋풋한 야성(野性) 같은 감성이었다. 가을이 되면 강의실도 뭔가 달라져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강의를 시작하면서 가요를 한 곡 불러주기도 하고 악보를 나눠주면서 같이 부르며 가을날의 정서를 강의실에 담아내곤 한다.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집 창가에/ 길 떠난 소녀 같이 하얗게 밤을 새우네./ 김이 나는 차 한 잔을 마주 하고 앉으면/ 그 사람 목소린가 숨어 우는 바람 소리… ” 나는 이 노래 가사에 마음이 끌려 부르게 되었다. 작사가(김지평)의 마음과 내 마음이 포개지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지리산을 의무적인 과업으로 알고 오르내리면서도 통나무집 창가에서 밤을 새우며 울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김이 나는 차 한 잔을 마주하고 앉으면 숨어 우는 목소리 같은 바람소리며 젊은 날의 그녀 얼굴이 주름진 내 가슴에 안기는 듯해서 좋았다. 그러한 가슴과 눈빛으로 갈대의 몸동작을 바라보면서 산을 오르고 내리면 또 생각나는 일들이 있었다. 마당가에 첫서리가
‘그래! 저 모습이야. 아니 저렇듯 편안한 얼굴이어야 하는데-’ 한마디로 화안(和顔)이었다. 강의가 있어 가는 아침 길이다. 서서히 차를 몰고 가는데 국화꽃 위로 국화 빛 낙엽이 하나 둘 내려앉고 있다. 차창 밖 오른쪽의 인도였다.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한 젊은 여인이 작업할 때 열고 쓰는 큼직한 가방을 멘 채, 오른손에는 작은 가방을 들고 걸어가고 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이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 둥근달을 생각나게 한다. 복스럽게 생긴 모습이랄까! 균형 잡힌 몸에 결 고운 얼굴은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오늘 하루의 피곤이나 삶에 대한 무게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였는지 모를 일이다. 편안한 모습과 근심 없는 마음을 신경 써온 탓이리라. 진정 저렇듯 편안한 얼굴이 그리워서였을 것이다. 문득 내 어머니의 편안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아들 하나뿐인 게 죄인 양,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조마조마하시면서 나를 기르셨다. 그런데 아들이 편안하게 산다기보다 척박한 땅에 개척정신으로 뿌리내리는데 힘들어하는 모양새가 안타까우셨을 것이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문학의 이해와 수필의 길』
도서관 참고정간 실에서 책을 읽다 문 닫는 시간에 쫓겨 나왔다. 도서관 옆의 산길을 걷다 도로변 넓은 공터에 이르렀다. 그때다. 내 앞을 턱 가로막고 있는 화물차를 만난 것은. 처음 보는 트럭이었다. 차 뒤에는 적재량이 8900kg 이라고 적혀 있는데 화물차의 길이는 보통 차와는 다른 특장차(特長車) 같았다. 차는 화물을 싣는 공간이 매우 길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몇 십 미터가 되는 소나무는 뿌리를 껴안고 있던 흙을 새끼줄로 동여맨 채 운전수 좌석 위 지붕에 묶여 있었다. 반대 방향의 적재함으로는 긴 소나무가 실려 있었다. 소나무는 몇 백 년을 살아내고서, 지금은 뿌리는 북쪽을 향해 매어 있고 온몸과 함께 머리끝 우듬지는 나무 가지들과 같이 남쪽 적재함 밖으로 넘쳐나 묶여 있었다. 나뭇가지들은 그 순간에도 푸르고 싱싱하게 제 모습을 지켜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가지 사이로 ‘까치둥지’가 매달려 있다, 아! ‘까치둥지’가 있는 나무를? 마음속으로는 ‘벌 받겠구나’ 싶었다. 까치집이 있는 소나무 가지 앞에 서서 생각해 보았다. 이 나무의 까치들은 어디에서 밤을 새워야 할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서서 걸으며 자연 훼손이 별것인가 이런 것이 자연의 재
바람이 공기의 이동이듯 인연은 삶 속의 동행 같은 것 아닐까. 잘 살아가는 방법은, 선한 삶을 꿈꾸며 때로는 살아온 과거를 즐기는 데 있다. 영국의 새무얼 존슨은 ‘글쓰기의 유일한 목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삶을 더 잘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고 또 삶을 더 잘 견디어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책 속에서의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것 또한 인연이겠지 싶어 하는 말이다. 나이 숫자가 높아 가면 병원에 가는 날도 기다려진다. 생사가 걸린 중병이 아니고 나이 따라 가볍게 겪는 질환으로서 진찰받고 약 지어오는 날의 병원 길은 자기 관리에 충실한 양 병원으로 향한다. 내가 다니고 있는 서신 내과 J 의사와 만나게 됨은, 내 어머니와 의사 아버지와의 인연에 따름이다. 일찍이 의사 아버지 J 선생님은 교육대학을 졸업하시고 회문산 근처 초등학교로 초임 발령을 받았다. 어렵게 부임지에 도착해 보니 식당도 하숙집도 전무했다.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머물 곳을 물어보니 나의 아버지 존함을 알려주며 옆 동네 그 집으로 가서 사정해 보면 식구처럼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 말씀이 인연의 씨앗이 되었다. J 선생님은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어머니의 선한 결심으로 따지지 않고 식사
‘배워야 산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을 듣게 되고, 공부와 독서라는 단어가 귀에 익고 눈에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이다. 그래 공부해야지, 부지런히 책 읽고 ‘문학 공부를 해보자.’ 라고 생각했다. 그 뒤 나의 시대적 사고(思考)와 진실의 에너지는 시에 있어서는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의 푸시킨의 시와 선조로서의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 다니면서 방을 얻어 자취할 때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 품을 떠나 학교 다녀와 저녁밥을 지으려고 부엌에서 나무에 불을 지필 때,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순간 푸시킨의 시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시행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리며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이때의 감성이 일생을 살아오면서 고비고비 굽이굽이마다 어머니의 가슴 체온 같이 슬픔을 다독여주었다. 내 곁에는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고향 친구가 있다. 그는 온화한 성격으로서 따지지 않고 신앙적인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친구는 J 대학에 재직하면서 일찍부터 산행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나는 그를 따라 합천 해인사와 지리산을 등반하는데 동행한다는 것이
8월이 다가오면 가슴속 어디에선가 희망의 감각기능이 작동되는 것 같다. 8월이면 눈부신 태양과 함께 우리들 가슴 속 또한 밝아지는 것 같았다. 복된 순간의 기쁨이 다가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것은 분명 초등학교 때부터 가슴 속에 각인된 정서적 기능의 역할일 것이다. 8·15해방에 이어 6·25전쟁 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광복절이 되면 담임선생이 태극기를 그려오라고 했다. 종이도 귀했다. 하지만 컴퍼스가 없어서 사발을 엎어놓고 원을 만들고 물결 표시로 반으로 나눠 위로는 붉은 색을 아래로는 청색을 칠하여 태극기를 완성해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은 교장선생의 선창에 의해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크게 외쳤다. 그때 불렀던 광복절 노래는 지금도 외울 수 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든 어른님 벗님 어찌 하리/ 이 날이 사십년 …’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교육의 양(量)이 국가의 양이고, 교육의 질(質)이 국가의 질이다.’ 라고 하였다. 8월이면 내 가슴속 행복의 감지기가 작동하는 것 또한 초등학교 당시 교육의 힘이요. 애국적 정서의 정의로운 감각이라고 나는 확
미국에 사는 한 노파가 변호사에게 두 가지 유언을 했다. 첫째는 죽게 되면 화장할 것. 두 번째로는 유골은 반드시 뉴욕 맨해튼 최대 번화가에 뿌려줄 것이었다. 의아했던 변호사가 노파에게 물었다. “왜 하필이면 뉴욕 맨해튼입니까?” 노파는 말했다. “쇼핑을 좋아하는 내 딸들이 반드시 일주일에 두 번은 방문해 줄 것 같아서요.”라고. 사람도 나이 들어 동진강 폐선 같이 뻘 속에 처박혀 있는 듯하면, 한국이나 미국이나 관심 밖의 삶으로써 비루먹은 망아지 꼴이 되는가 싶다. 나는 해방둥이 세대로서 스스로의 심장을 펌프질하며 열광하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했다. 그 힘으로 가정의 안정과 가족들을 건사했다. 열광하는 삶에서 한결같은 삶을 고집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바쁠 것 없는 노인세대가 되었다. 미국 노파의 심정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남은 인생의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유머 같은 노파의 이야기가 울음보다 더 서글픈 정서의 현을 건드린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청년의 꼭지점에서는 우정에 대한 철학도 자못 심각했다. ‘대신 죽어줄 친구나 천하를 반분할 수 있는 우정의 도를 저울질하기도 했다. 공무
오늘도 느낀다. 아침 운동하러 가는 길, 이 숲 터널을 지날 때 행복하다는 것을. 그동안 겨울나무 검은빛에서 죽음보다 강한 기운을 느껴보기도 했다. 그리고 나무들 땅 속 뿌리의 작은 신음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겨울나무는 세상 모든 생명보다 고요히 자신을 지켜내고 있었다. 그 침묵은 곧 묵수(默言修行)요. 겨울 숲의 신앙이요 기도였다. 그 겨울 숲에 흰 눈이 소복소복 내릴 때, 하늘의 사랑이 우리 곁으로 어떻게 다가오는지 느낄 수 있었다. 눈은 겨울의 선물이다. 대지 위의 흰 눈은 백지 같았다. 그 순간 나는 꿇어앉아 그곳에서 시를 쓰고 편지를 써 수신자 없는 그곳의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었다. J 대학 생활관이 위치하고 있는 숲 속의 길은 가운데에 아름드리의 플라타너스들이 줄지어 서 있고 양 쪽으로는 곧은길이어서 자동차가 서행하도록 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넓은 잎과 주변 나뭇잎들은 7월의 아침 빛 스며드는 녹색기운으로 바다 밑 같은 정밀한 고요 속에 가슴 벅찬 감동의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대학로의 젊은 기운과 함께 상상하기 힘든 거목들의 넓고 푸른 잎잎 하나하나가 제철을 맞아 온 세상을 푸르고 두텁게 감싸면서 생명을 껴안아 주는 듯했다. 녹색이 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