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이다. 벚꽃이 새벽을 여는 시간 운동을 하러 나섰다. 좌우로 줄지어 선 벚꽃으로 길은 훤하게 밝았다. 가슴 맑고 호흡은 벅차올랐다. 그 길을 나는 혼자 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다. ‘마른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는 작은 잎새 하나/ 그대가 나무라 해도 내가 내가 잎새라 해도…/ 시인은 시인은 노래 부른다. 그 옛날의 사랑 얘기를_ ’ 순간 사랑에 대한 허기와 생명의 허무 같은 게 느껴졌다. 꽃은 소리 없이 피었다 눈물 없이 진다. 코끼리는 때가 되면 조상이 죽어간 곳으로 찾아가 사라진다고 한다. 원숭이는 자기에게 도움을 많이 준 나무 밑으로 가서 그 나무에 거름이 되어주고-. 그런데 인간의 가는 길은? 잠시 생각에 젖어본다. 어느 초등학교 교문에는 ‘4월은 과학의 달’이라고 써 걸어놓았다. 학교 옆 사거리에서는 ‘4월은 선거의 달’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불혹의 고개를 넘겼을까 싶은 젊은이가 마이크를 잡고 자기 당원으로서 함께 가야 할 사람이요 국회의원으로 적격자라고 협박에 가까운 지지를 토하고 있었다. 선거의 결과는 항시 후보자들에게 ‘너 자신을 알고 겸손’하라고 했건만. 입으로 사는 사람, 얼굴로 사는 사람, 몸으로 사는 자, 목소리
생각하건대 잘 산다는 게 뭔가? 또 잘 먹고산다는 것은? 부모라는 생명의 뿌리를 잘 만나 부유한 집 후손으로 태어나 ‘일류’ 학교 진학하여 ㅇㅇ고시 합격할 때까지 응시해 그 인생 등급 부류 속에서 잘 나간다는 것일까. 또한 어느 단체나 국가의 수장이 되어 거드름 피우며 자기 생각만 앞세우고 사는 것인가. 아니면 권력 위에 경제적 전신(錢神)이 있다고 입에 담기 싫은 이야기지만 경제계의 지도자가 되어 여러 회사를 경영하면서 회사원의 인격적인 면을 소홀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 세대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운동선수가 되어 금메달 목에 걸고 V자 손가락 펴며 국제공항을 넘나드는 경쟁의 달인인가. 그럼 잘 먹고산다는 것은? 들녘의 풀 뜯어먹고 사는 소나 음식물 잔반 먹고 살찐 돼지가 아니라, 좁은 공간에 갇혀 주는 사료 삼키며 스트레스 속에 죽어간 고기를 비싼 돈 주고 고급술과 마시며 자기 나름의 인생을 즐기는 이들의 삶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일까. 오늘 아침, 산책길에 나서는데, 『잘 먹고 잘 사는 법』이란 어느 방송사 피디가 쓴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로 인해 산길에서 인간답게 사는 길을 생각해보게 된다. 어느 시인은 봄이 열차를 타고 온다
잘 우려낸 녹차 한잔을 마시고 책상 앞에 앉는다. 글을 써 무슨 의미를 찾겠다는 것인가! 나이 먹음에 싱숭생숭 해지는 고갯마루가 있다. 아마 그때가 나이 든다고 느끼는 순간일 것이다. 나이 듦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누구는 쭈굴쭈굴해진 피부, 누구에게는 평온해지는 얼굴, 또 누구는 건망증, 누구는 지혜로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 듦을 반가워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마음이 풀기 가신 풀잎처럼 버석대던 그날, 두 친구와 점심을 먹었다. 다음은 커피 집이다. 평화동의 어느 외국인 체인점이 좋다고 들렀다. 몸이 국내산이어서 그런지 커피는 위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 그래도 친구들과 같이 커피를 시켜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2층에서 마시다 1층의 주문매장으로 갔다. 혹 종이컵 있으면 하나만? 하니, 한마디로 없단다. 유리잔이라도 좀 빌려주면- 하니 ‘안 됩니다.’이다. 물을 한 컵 먹을 수 있느냐? 고 하니, 그 또한 안 된단다. 아르바이트 학생 같은 그녀는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결국 천 삼백 원을 주고 물 한 병을 사들고 서양 독재자본가 앞에 동냥하는 꼴이 된 심정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그 순간 내 입에서는 나도 몰래 ‘이 나이에 이런 인
지역방송사 전무를 역임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의 동생이 문인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다. 그는 문인들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대접하면서 자기 동생이 문인협회 회장으로 뽑힌 것이 도지사가 된 것보다 더 기쁘다고 인사말을 했다. 얼마 후 한 시인이 그에게 물었다.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고. 그는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었다’고 했다. 그때 나는 그랬다. ‘나이를 먹지 말고 들고 계시지 그랬느냐?’고. 그렇게 해서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유머는 시간과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서 순발력 있게 구사해야 효과적이다. 유머는 봄바람 같은 역할을 한다. 봄바람은 차가운 아들 손을 호호 불어주는 어머니의 입김과 같은 바람이다 자연의 훈풍으로써 언 땅을 녹이고 온기 머금은 바람은 대지 속으로 스미어 씨앗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흙을 부드럽게 한다. 어젯밤에는 동창 모임이 있었다. 20여 명이었던 회원은 절반도 안 되었다. 참석한 친구들은 주류(술마시는 자)와 비주류로 갈라서 앉게 되었다. 참석 못한 사람들의 이유는 비슷했다. 몸이 안 좋아 외식을 못하거나 요양병원에 있거나 어느 대학병원에 검진받으러 갔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그래도 할 말이 있다고 즐기는데
어둠이 내려 만물의 수고로움을 위로하는 저녁시간 산길을 걷고 싶어 아파트 뒷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횡단보도 앞에서 어린 소녀를 만났다. 그 어린이는 내게 대뜸 “몇 살이세요?” 하고 물었다. 잠시 생각하다 “70살이야” 하니까 어린이가 “나는 여섯 살이에요” 하면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열 배도 넘게 더 먹었구나” 하고 있는데, 어린이 어머니가 와 소녀에게 뭐 하고 있느냐고 물어 나는 서둘러 내 길을 걸었다. 어린이가 쉽게 내게 말을 걸어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움’ 속에서 그리움과의 이별을 못해 바보 같은 노객(老客)이라고 스스로를 구박하고 사는 내게 말을 걸어오다니. 그런데 하필이면 왜 나이를 물어온 것일까. 온통 흰머리도 아니고 아직 바르게 걸을 만한데- 순간이었다. ‘당신 삶의 세월을 잊지 마라. 나이에 걸맞는 삶을 살아라. 앞으로 남은 삶을 낭비하지 말고 나이 값 하며 신이 준 운명의 길을 불만 없이 걸어가라'는 뜻 아닌가 싶었다. 한 생명으로서 때를 안다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공부도 때가 있다. 일할 때가 있고 놀 때가 있다. 연애도 때가 있다. 외칠 때가 있고 침묵할 때가 있다. 기회는 꾸준히 주어지는 것 아니다.
내 고향은 시골 농촌이다. 덕분에 좋은 자연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정서적으로 복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0여 가구 마을 사람들은 한국전쟁 때 모든 집과 살림이 불태워진 잿더미 위에서 다시 집을 짓고 살아낸 조상들이었다. 그래도 동산에 달이 뜨면 소쩍새는 구슬프게 울어주었고, 낮에는 넓은 밭 위로 종달새가 소리 높이 울며 하늘로 치솟았다. 정지용의 ‘향수’에 나타나듯 ‘넓은 벌 동쪽 끝으로 구림천이 휘돌아 나가 섬진강’으로 이어졌다. 그런 자연환경 속에서 경쟁을 모르고 시기 질투 없이 먹고사는 일만을 운명으로 알고 살았다. 반면, 문화적 삶과 문명의 정보는 한없이 뒤졌다. 하고 싶은 공부도 못했고 가고 싶은 학교에도 진학할 수 없었다. 청소년 시절 ‘수확한 촌놈’이라고 무시당하기도 했다. 운명적으로 재탄생을 생각하고 어느 도시에 머물며 개척정신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자존심으로 인한 가슴속 출혈이 심했다. 그럴 때마다 더욱 철학적인 독서활동에 전념했다. 자기 갱신과 정신적 새로운 자아 세포 분열로써 굳건히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닦달했다. 그런 과정에서도 고향이 시골이요 농가이었다는 게 다행이라는 긍정적인 마음만은 있었다. '대지'의 작
묵은해 가고 새해가 된 지 보름이 지났다. 나는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색동옷 입고 동무들과 제기차기 놀이 하던 시절이 지나고부터는 새해를 기다리거나 기대해 본 적 없다. 사람들이 새해의 첫 날인 설에 어떤 의미를 두는 이유는,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다가올 날이 지나간 세월보다 못하거나 바랄 게 없다면 누가 내일의 희망과 꿈을 설계하며 새벽길 안개를 헤치고 교회로 해 뜨는 곳으로 향하겠는가. 호남의 기호학파 간제(艮齊1841-1922)선생은 ‘성(性)이 곧 이(理)’라는 성리학 본령을 확고하게 세워 성선(性善)에 기반 한 의리(義理)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당대의 거유(巨儒)다. 그가 말했다. ‘나그네로서의 근심을 없애라. 평생 남을 탓해봐야 아무런 득이 없고 잠시라도 자기를 돌이켜보면 여유의 맛(味)이 있으니 어찌하여 이 맛이 있는 것을 버리고 저 무익한 것을 취하는가?'라며 자기 성찰을 명징하게 당부했다. 그리고 '끝까지 하라. 어떤 분야든 5년 10년 지나면 단맛이 나는 게 없다. 자기가 좋아 하는 일을 끝까지 하는 게 노년에도 최고의 건강 유지법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그리기와 편지 쓰기를 좋아했다. 교과
막내딸이 바삐 출근길 차에 오를 때 나는 말했다. ‘오늘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딸에게 새 아침 희망적이고 활기찬 언어적 에너지를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서재로 돌아와 벽면 해돋이 사진을 본다. 2000년 새 아침은 지리산에서 맞이했다. 아침이라서 새로운 영혼으로 천 년의 새 아침 빛을 가슴으로 맞이하고 싶었다. 아침 기도를 하고 촬영하기 좋은 산봉우리 바위 곁에서 니콘 카메라를 목에 걸고 서서 해 뜨는 순간을 기다렸다. 운해 속에 떠오르는 아침 해를 카메라 앵글 속으로 찰칵찰칵! 끌어들였다. 셔터 동작소리가 아침 산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때의 사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사진 아래 검은 부분은 산이요. 중심과 위로는 붉은빛이다. 산 능선의 중간 조금 낮은 중심에는 계란 노른자 빛 태양이 똥그랗게 떠 있다. 해는 멀리서 길을 내고 온 듯 연한 빛이 강물의 곡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삶을 챙겨보고 새로운 구실과 각오를 다짐하는 순간, 맑아 눈부신 세상에 서 있으면 내 가슴도 맑아져 하얘지는 것 같았다. 순백이 주는 순수한 영혼의 피가 도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새아침 환한 흰 빛으로서의 고요, 맑음, 그 깊이, 무게
산길은 사람의 발에 밟힌 낙엽이 으깨져 흙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든 생명은 왔던 그 길이나 그곳으로 가는 것인가! 내 나이 적지 않은데 나의 갈 곳은 어디며 언제쯤일까. 12월의 가슴은 무겁고 축축하다. 청주에 사는 수필가에게서 수필집을 보내왔다. 꽤 오랜 인연 속에 한 번도 인사를 거르지 않은 작가다. 그와의 인연은 J신문사 신춘문예 심사를 내가 맡았을 때 그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뽑힌 결과로써 시작되었다. 그런 그가 내게 금년을 마무리하는 결실의 의미로 보낸 선물 같았다. 존경했던 고하 선생님은 얼마 전 고인이 되었다. 생전의 선생님은 누가 책을 보내오면 꼭 편지나 우편엽서로 ‘잘 받았다’는 인사를 대신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연말연시의 인사나 덕담을 편지로 주고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휴대폰 문자 때문에 우체국에서도 경조카드 자체를 없앴다. 을유문화사에서 낸 『동국세시기』 12월을 보면,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믐날 밤(除夕)에는 2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이 대궐에 들어가 묵은해 문안을 드렸다고 적혀 있다. 사춘기를 벗어난 성인으로서 나이 들어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이 드는 것을 체감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
백목림(白木林) ! 눈 맞아 흰 나무가 된 숲길을 걷는다. 나이 든 가슴에도 설렘이 남았는지 심장이 쫄깃거린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예쁜 인사를 건네고 싶다. 이럴 때 생각나는 그 한 사람. 바닷가에서 만났던 그 사람! 예쁜 꿈을 심어주고 싶었던 그녀. 오빠는 성직자였다. 그 무렵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그 사람 손목을 잡고 잠에서 깨어났던 추억이 누에머리처럼 고개를 든다. 산사의 깊은 밤 종소리나 이른 새벽에 듣는 교회의 종소리에는 거룩한 음이 배어있었다. 큰 사찰의 종소리는 산 넘고 강 건너 먼 마을까지 다가가 듣는 이들 영혼에 스미어 깨어나는 빛 안개 같이 감싸주었다. 종소리는 여운이라는 이름으로 가슴속에 스며들어 맑아지게 한다. 그 소리 정신을 일으켜 세운 뒤 아늑하고 그윽하고 포근하게 하면서 새로운 기운을 안겨주는 힘이 있다. 종은 울려주는 사람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는 초등학교에 땡땡이 종이 있었다. 이 종으로 사환아저씨는 공부 시간의 시작과 끝 종을 쳐주었다. 사찰에서는 수도승이 온몸의 힘을 균형 잡아 시간에 맞게 종을 울리고, 교회에서는 믿음 좋은 분이 교회의 종지기를 하면서 정확한 시간에 종소리를 들려주었다. 지금은 도시나 농촌이나 그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