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된 정치 쩨쩨한 속셈이 ‘과학’을 주물럭거리는 꼴, 요즘 국제정치학이다.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과학적으로’ 매만지니 오염수 1리터쯤은 마셔도 별 탈 없단다. 그 과학은 서양문명의 ‘정치’인가? 싹수없는 과학, 그대 드시게. 과학이 무엇에 입맛을 다시나? 말(언어)도 ‘과학적으로’ 마사지했다. ‘처리수’라니 애무(愛撫) 수준일세. ‘안전하다.’는 장본인들의 창작이다. ‘안전하면 자네들이 마시게나.’는 취지 중국 당국의 언급, 간명하고 적절하다. 섬이어도 그들 강산과 들판, 유유(悠悠)하더라. 부사산(富士山) 꼭대기나 상근(箱根) 온천지 호젓한 호수에 담아 오래 마시면 그 ‘안전함’과 책임감에 지구촌이 갈채 보낼 터. 복합오염이란 말은 그런 과학 판치는 서양문명에서 더 오래된 상식이다. ‘안전하다’ 강변하기 위한 의도의 실험이나 검사(檢査)의 실속, 세상이 안다. ‘과학적’ 간판 걸고 ‘눈 가리고 아웅’이면 만사 오케이? 벋서면 수사? 법치주의? 그 과학 말고 ‘진짜 과학’으로 보자. ‘먹는 것 갖고 장난치는 놈’으로 시작하는 말의 다음은 입을 열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하다. 패륜(悖倫)이다. 지들도 속으론 그리 생각할 것이다. 중국의 언급 또한 그런 생각에서
마음 정갈스럽게 하고 생각 가다듬어 글 쓸 구상을 하고자 가까운 산길로 나가다 어린이 놀이터에서 본 풍경이다. 어린 딸과 아들은 둘이 나란히 그네를 타고 있는데 앞 의자에서는 엄마 아빠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 나도 아이들 키우며 저런 시절이 있었지. 머릿속에서는 시골에서 부모님 모시고 살며 인간답게 살았던 고향 풍경이 실타래 실 풀리듯 한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아름다운 시절은 꽃잎처럼 흩어져…’ 이용복 가수의 ‘어린 시절’ 노래가 가슴속에서 리듬을 탔다. 자기 아이들 그네 타는 모습을 보며 젊은 부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애들이 커서 검사, 의사, AI 기술자, 재벌총수-. 일류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 성적 올린다며 약을 먹이는 부모, 정신병동에서 문제집을 푸는 아이, 마약 밀매 조직의 손길이 뻗는 교육열과 그 현장-. 나는 어려서부터 가난에 친숙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어렵게 살았던 때라 시기심 없이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으며 살아서 다행이지 싶다. 아이들도 착하게 성장해 남 속임수로 억울하게 당했을지언정 그릇된 행동 하지 않고 독립해 잘 지내고 있다. 최소한
‘달나라에 갈 수 없다면!’ 북유럽의 외딴 섬나라 아이슬란드의 관광 홍보 문구다. 아이슬란드는 거리만큼이나 상식에서 먼 일이 일어나는 나라다. 귀신 이야기부터. 아이슬란드에 건물을 세우거나 도로를 놓으려면, 예정 부지에 ‘정령이 살고 있지 않다는 증명’을 해야 한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경치 좋은 곳에 ‘땅의 신이나 땅 사람, 혹은 숨어있는 사람’이라 부르는 정령이 산다고 믿는다. (우리 식으로 바꾸면 도깨비, 터줏대감 정도가 될 듯) 2013년, 도로를 내려던 시공업체와 정령이 깃든 바위 훼손을 막는 주민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 법정까지 간 일이 있는데, 판사는 주민 편을 들어 ‘바위를 파손하지 말고 이전’하도록 했다나. 다음 이야기도 귀신 이야기급이다. 맥도널드 햄버거가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일이 있었다. 15년 전, 금융위기로 아이슬란드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맥도널드가 발 빠르게 철수했다. 폐업 하루 전, 조르투르 스마라슨이라는 남자가 햄버거 세트를 구입한다. 그는 먹다 남은 것을 집에 둔 뒤, 3년 정도 지나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조금도 썩지 않은 상태였다. 이 신기한 버거세트는 국립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가 1년 뒤인가, ‘버스 호스텔 레이캬비스
“대한민국은 심리적 G8 국가 반열에 올랐다.” 지난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일본 히로시마에서 개최된 G7 정상회담에 참여하여 활동한 성과에 대한 여당 대변인의 평가다. “심리적”이라는 형용에서 정부·여당의 ‘G8 한국’에 대한 열망과 아쉬움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2021년 영국에서 개최된 G7 정상회의에 참석한 후에도 당시 여당은 “사실상 G8 도약”이라고 자찬한 바 있다. 왜 G8인가? G8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1976년 출범한 G7 정상회의는 냉전 시대 “자유세계의 운영위원회”로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고, 냉전 붕괴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하였다. 2008년 미국·유럽발 세계 금융위기가 발발하자 G8(당시 러시아 포함)만으로는 대처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한국, 중국, 인도 등 중견 국가들을 포함한 G20이 대안으로 등장하여 세계 금융시장을 성공적으로 안정시켰다. 이후 세계 경제, 기후 문제 등은 G20 중심으로 운영되고, G7은 상대적으로 퇴락하였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G7은 재결집하는 반면, G20은 대러시아 경제제재에 G7을 포함한 일부 국가만 참여하는 등 분열하고 있다. G7과 G20은 향후
2008년 초,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직 후, 수유리 통일교육원 대강당에 통일부장관을 비롯한 전 직원이 모였었다. 청와대 안보실의 41세 김태효 비서관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다. 강의요지는 한마디로 통일부는 가만히 있으면 되고, 올 여름이 가기 전에 북한은 굴복할 것이며 핵문제도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것이다. ‘비핵, 개방, 3000’정책에 대한 확신이 도를 넘어 신앙으로 된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이 후 통일부 과장보직이 15개 정도 축소되고 전임 정부의 활발했던 대북사업들을 대부분 잠재워야 했던 암울한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북한 핵문제 대두 후 지금까지 수 십 차례 가해진 UN, 미국, EU 등의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굳건히 버텨오게 했던 그 본질적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그들이 내세우는 자력갱갱, 자립적 민족경제 노선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시장경제적인 사고틀로 북한 경제를 이해하려다 보니, 조금만 압박을 지속하면 북한경제는 붕괴될 것이고 결국 굴복할 것이라는 오해 때문이다. 6.25전쟁 이후 미국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으로 북한은 폐쇄적 자립경제와 산업의 지역분산 등으로 전쟁에의 준비를 철저히 해왔다. 내핍과 자립을 내세우면서 대외의존도를 극도
그림 하나가 하루를 점령한다. 일본 세키네 쇼지의 ‘죽음을 생각한 날’. 일본 배낭여행 중인 아들에게 남편이 SNS 가족방을 통해 보낸 글 중에 있었다. 학교를 자퇴한 열일곱 살 아들은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유럽에 이어 일본을 떠돌고 있다. 아들이 나라 밖 문화, 예술을 많이 접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남편은 거의 매일 ‘일본 예술 정보’를 보낸다. 세키네 쇼지의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어두운 하늘 아래, 어두운 나무들 속,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한 사내가 고개 떨구고 걸어간다. 그 배경 모두, 남자의 등을 누르는 십자가로 보인다. 또 다른 그림, ‘신앙의 슬픔’은 어떤가. 어두운 들판을 걷는 다섯 여인, 죄지어 끌려가는 듯도 하고 순교의 길인 듯도 하다. 손에 든 꽃은 사약처럼 느껴진다. 흰옷의 여인들 사이에서 혼자 붉은 옷을 입은 여자. 고개를 유달리 모로 꺾은 그 여인에게 시선이 오래 간다. 아, 그 여인의 배경 또한 십자가로 보인다. 사내와 붉은 옷 여인의 사연이 궁금하다. 미치도록. 화가에 대해 찾아본다. 19세기 말에 태어나 스무 해를 살고 폐병으로 죽었단다. ‘죽음을 생각한 날’을 열여섯 나이에 그렸다는 것을 알고 충격받았다.
역사가 잊은 사람 중에 신동 이갑이 있다. 1877년 평안남도 숙천에서 태어난 이갑은 겨우 열두 살에 진사시험에 급제했다. 나이를 세 살 올려서 응시한 결과였다. 집안과 이웃들에게 크나큰 경사였다. 그러나 이 경사가 멸문의 화를 불러왔다. 당시 평안감사 민영준은 이갑이 나이를 속여 진사시험에 응시했다는 이유로 이갑의 아버지를 끌고 가 갖은 고문을 했다. 극에 달한 민비 일족의 위세를 등에 업은 민영준은 이갑 집안의 농토 40정과 재산을 빼앗았다. 고문후유증과 화병에 시달리던 이갑의 아버지는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며 ‘원수를 갚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패한 세상을 바로잡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복수심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이갑은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1898년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육사 15기생으로 입학했다. 그의 동기생들은 대부분 19세 전후였는데, 그는 26세였다. 그럼에도 그는 휴식시간에도 총검술을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육사 15기 동기생 중에는 한국인도 7명이 더 있었다. 한국인 동기들은 이갑을 중심으로 뭉쳤고, 스스로 ‘8형제배’라고 부르며 결속을 다졌다. 같은 평안도 출신으로 뒷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참모총장과 군
유난히도 5월은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부부의 날(21일) 등 가족 구성원을 위한 날이 많다. 그래서인지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또한 1일은 근로자의 날이고, 15일은 스승의 날이어서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의 행복과 안녕, 그리고 건강을 위한 기념일이 많은 달이 5월이다.1993년 UN이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건전한 가정을 위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자는 취지로 5월 15일을 가정의 날로 제정했고, 이후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5월 15일을 가정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일반인들에게는 5월이 화목한 가정의 달이지만 근로소득 외의 다른 소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종합소득세의 신고 납부가 있는 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맘 때쯤이면 행복한 가정 생활을 잠시 뒤로하고 1년 중 가장 업무량이 많은 종합소득세 신고업무에 매진해야 하는 직종의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일반인들이 느끼는 가정의 달과는 사뭇 다른 의미의 한달을 보내게 되는 사람들이 세무대리 업무 종사자들인데, 이들에게 5월 한달은 야근과 주말 근무가 일상이 되고 정해진 기한내에 모든 업무를 마무리해야 하는 큰 압박감이 주어지는 시즌이기도…
북쪽 고향에 있을 때 옆집으로 함흥여자가 시집왔다. 목소리도 굵고 행동도 씩씩한 그는 결혼 전까지 직장 출근하면서 단 한 번도 지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러한 성실함으로 당시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렵다는 입당도 했다. 공로가 커서인지 함흥여자는 내가 사는 동네에 시집와서도 괜찮은 직장 간부를 하게 되었다. 함흥여자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아 참으로 피곤했다. 어려웠던 1990년 고난의 행군 시기가 되자 많이 유연해졌다. 본인 자신도 아이 넷에 시부모까지 살려야 하는 생사의 기로에 있었다. 그리고는 동네에서 제일 먼저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라고 하면 부끄러워할 때 체면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나 했다. 나는 함흥에 외사촌들이 살고 있고, 친언니도 그곳으로 시집을 갔기에 함흥으로 자주 다녔다. 그때 만났던 함흥여자들은 억척스럽다. 억양이 높은 함흥 사투리로 말시비가 붙으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몸치장은 덜 하더라도 집 안에 있는 그릇은 빛이 나도록 반짝이게 닦는다. 남쪽에서 함흥 출신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개성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함흥여자들로 어쩔 수 없는 지역 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북쪽에서는 함
사람들의 일상은 대체로 모르거나 아니면 모른 척 하는 삶이다. 산간 벽지에 의사들이 가지 않으려 그리 애쓰면서도 만약 그곳에 살고 있는 간호사가 일정한 법령에 의거하여 의료 활동을 하는 것(노인들 영양 주사를 놔준다든지, 감기몸살 약을 처방해 준다든지)에 대해서는 사활을 걸고 반대를 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제 그 시시비비에 둔감해 한다. 어차피 세상이 공정과 상식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진영의 싸움만이 노골화 됐는데, 그리하여 이제는 모두 북중러에 맞서는 한미일 전선에 투입돼야 할 판인데도 오로지 어떤 팝송을 불렀네, 만나서 뭘 먹었네, 어떤 여인이 뭘 입었네 하는 것만 가지고 입방아를 찧는다. 그마저도 그리 관심이 오래 가지 않는다. 잘못된 위정자는 국민의 무관심을 증폭시키고 그것으로 권력의 본래적 야욕을 감추려 한다. 역설적으로 개중 누군 가는 그러니까, 매우 정치적, 아니 권모술수적인 인간이라는 얘기이고 그런 인간이 있다는 얘기이다. 문화 쪽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가 그렇다. 여기가 대체로, 지금의 정부 마냥, 아수라장인데도 사람들은 넋 놓고 손 놓고 앉아 있다. 어쩌려고 그러는지 한숨이 나온다는 소리들이 많다. 그 이유는 생각해 보면 자명하다. 많은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