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유죄, 무죄. 지난해 말부터 있었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형사재판 결과다. 그에게 유죄가 선고되면 국민의힘은 환호를 질렀다. 반면 무죄가 선고되면 어김없이 잘못된 판결이라며 악다구니를 부렸다. 판사 개인에 대한 색깔론 공격도 이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윤상현 의원은 "좌파 사법 카르텔의 뿌리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걱정스럽고 참담한 마음"이라며 재판부를 공격했다. 그런데 이재명 대표의 재판은 아직도 첩첩산중이다. 대장동·위례동·백현동·성남 FC 재판, 위증교사 항소심, 대북송금 사건,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등, 이들 재판이 모두 마무리되려면 앞으로도 최소한 3~4년은 족히 더 걸릴 것이다. 물론 조기 대선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계속해서 이재명 대표 재판 선고에 따라 들썩거려야 할 듯하다. 그런데 이재명 대표의 재판 결과에 따라 각 정당이 입장을 내고 개별 의원들이 성토하고 모든 언론이 도배하듯 기사를 쏟아내는 현상은 분명 정상은 아닐 것이다. 사법부의 판단이 있으면 이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면 될 일이지 이렇듯 온 나라가 들썩이는 것을 그 누가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렇듯 온 나라가 괴이한 현상에 빠진 데는 검찰과 사법
우리는 거의 매일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다. 원하든 원치 않든 누군가를 설득하고 있다. 직장에서 업무하는 중에, 집에서 식구들에게도 내 뜻을 말하며 설득하는 상황들에 직면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대한 협상 테이블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몇 가지 최근 뉴스를 보자.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보호무역을 위한 상호관세 결정을 앞둔 상황이어서 우리 정부는 외교력을 총동원해 관세 폭탄을 막기 위한 막판 ‘설득전’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의대생 복귀를 위해 대학은 계속 ‘설득작업’을 했지만, 마감시한까지 등록하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결국 제적 예정 통보서를 발송하게 되었다. 그러자 제적을 앞둔 의대생들은 입장문을 내고 정부를 향해 의대협과 진심으로 ‘소통’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국민연금 개혁안이 드디어 국회를 통과했다. ‘협상 테이블’에서 여야는 오랜 줄다리기 끝에 보험료율(내는 돈)은 현행 9%에서 13%으로, 소득대체율(받는 돈)은 41.5%에서 43%로 올려 '더 내고 더 받는' 방식으로 마무리했는데, 「재정 안정화」와 「보장성 강화」라는 서로 충돌하는 두 가지 가치를 동시에 충족시키기란 애초부터 힘든 일이었나 보다. 이 개혁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당장 내년부터
옛날에는 대부분 걸어 다녔고, 양반이라도 하인이 끌고 가는 말을 타고 다녔기에 그 속도는 걷는 것과 같았다. 그러면 서울에서 융ˑ건릉까지 최단코스로는 며칠이나 걸렸을까? 하루? 수원에서 서울로 통학이나 통근을 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 같다. 그러면 이틀? 그것도 힘들 것 같다는 반응이지 않을까? 하루 종일 걸어본 적이 없는 현대인에게 이런 물음 자체가 무리일 것 같다. 그래도 가끔 궁금해 할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그 답을 찾아보자. 영조 임금 때 편찬한 전국지리지 '여지도서(輿地圖書)'(55책, 1765)에는 모든 고을의 앞쪽에 서울과 고을 읍치(邑治, 중심지)를 오가는 최단코스 길 위의 거리가 적혀 있다. 예를 들어 충청도의 천안에는 “210리 이틀 반나절 일정(二百十里二日半程)”, 충주에는 “282리 사흘 일정(二百八十二里三日程)”, 제천에는 “330리 나흘 일정(三百三十里四日程)”이다. 요즘과는 많이 다른 거리 개념인데, 이런 수치들은 어떻게 나온 걸까? 원리를 알면 답은 의외로 쉽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하루에 평균 90리를 간다고 여겼다. 그래서 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90리로 나누었을 때 나머지가 1~29리면 버림으로, 30~59
언중(言衆)들이 쓰는 말이 모질고 독하고 악착같은 면이 두드러졌다면, 그만큼 세태 인심이 삭막해진 것이다. 어떤 사람을 두고 “착하다”라고 평하면, 그걸 좋은 뜻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이다. 적극적이지 못하다, 결단력이 없다, 성격이 무르다, 대가 약하다, 전투력이 약하다, 양보하다 손해만 본다, 등등의 이미지로 받아들이려 한다. ‘착한 사람’도 이제는 다소 부정적인 퍼스낼리티로 착색된 느낌이다. 착한 사람을 부정적으로 부각하려 할 때, 예로부터 써 왔던 말 중에 ‘착해 빠졌다’라는 표현도 있었다. “그 친구, 착해 빠져서 아무 데도 써먹을 데가 없다.” 하기야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것에 빠져 버렸다’고 표현하면 좋은 것은 빛을 잃는다. 이쯤 되면 ‘착하다’는 ‘무능하다’와 동의어 수준이 된다. 물론 ‘착하다’의 의미론적 본질은 그렇지는 않다. 착함은 훌륭한 덕(德)의 범주에 속한다는 윤리학적 설명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요즘 언중들의 현상적 언어 감각은 ‘착하다’를 썩 좋게만 여기지는 않는 듯하다. 그런 세태가 되었다. ‘착하다’의 한자는 ‘착할 선(善)’이다. 그러나 ‘착하다’와 ‘선(善)하다’가 반드시 꼭 같은 의미역(意味域)이지는 않는다
세상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그럴싸한 ‘느낌’으로 가득한 것 같다. 공익광고는 가까이 다가서 보면 생성된 이미지인 ‘듯 보인다.’ 외신 보도를 소개하는 언론사는 인공지능 번역기를 돌린 '듯 보인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고전 강독 강의는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은 ‘듯 보인다.’ 이를 비난할 수 있는가 고민하던 차에, 강사는 그럴싸한 목소리로 고전의 원문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내용을 읊는다. 인공지능의 환각(hallucination)을 표정 변화도 없이 또박또박 소리 내어 전하는 그를 보며 두려움을 느낀 나는 ‘올드 스쿨’인가. 학문 공동체가 생성형 인공지능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인터뷰한 연구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어떤 젊은 철학자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자신의 철학적 사유의 일부라고 말했다. 자신의 ‘철학함’은 인공지능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궁금해진 연구자는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전기가 끊기면 철학을 못 하나요?” 젊은 철학자는 “그렇다”고 답했다. 읽고 산책하다가 나무등걸에 앉아 사색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나만큼이나 ‘올드 스쿨’이다. 마음은 한껏 확장되어 나의 육체를 넘어 주변 환경을 활용한다. 인간의 인지 활동은 종이, 연필,…
세계적으로 전쟁과 강대국의 횡포, 국내적으로 내란과 여야분쟁 그리고 위헌적 행동(각종 대행들, 내란 선동 목사들, 서부지법 침탈, 헌재앞 계란투척 등)으로 혼란한 세상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사실 정치적 판단과 행동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정치적 결정은 실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심지어 생명을 앗아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휴전 협상 중이지만 푸틴의 장고로 아직 안개 속 상황이고,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은 미국의 중재로 잠깐 휴전 중이었다가 이스라엘의 가자지역 폭격으로 휴전이 요원하다. 국내에서는 비상계엄으로 내란을 일으키고선 “계몽령”이라 우기는 피소추인과 그 주변인들 때문에 온 국민이 헌재의 결정을 기다리며 “내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히고 있다. 최근 다음과 같은 뉴스를 접했다. “경상북도 경산에서 맨홀이 부서져 아이를 안고 가던 여성이 부서진 맨홀 구멍으로 다리가 빠져 크게 다치는 일이 있었다. 관리 책임을 맡은 경산시는 가입한 보험의 보장범위 밖이라 배상이 어렵다고 국가 배상으로 떠넘겼다. 이에 지자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경산시는 뒤늦게 관내 맨홀에 대한 전면 점검에 나섰다.”
어지럼증 혹은 현기증이라고 하는 단어는 아주 다양한 신체적, 정신적 감각을 표현한다. 현기증 날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라고 말할 때나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서 말했던 이중의지에 의한 영혼의 현기증, 혹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에 어지러움을 느낄 때처럼 정신적으로 균형을 잃고 아찔한 상태를 표현한다. 그런가 하면 제자리에서 코끼리코 놀이처럼 코를 잡고 허리를 숙이고 제자리에서 여러번 돌 때나 초고층빌딩 옥상에서 아래를 바라볼 때도 순간 어지러움을 느낀다. 우리 마음과 몸이 급격한 외부의 변화상황에서 똑바로 서 있거나 자세를 유지하고 균형을 잡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생리적 어지러움이 발생할 수 있으나 반복되고 심하면 병리적 어지러움을 의심해볼 수 있다. 인체는 시각, 귀의 전정기관. 뇌, 소뇌와 뇌간 그리고 신체감각과 자율신경계까지 서로 유기적으로 외부의 신호를 받아들이고 조율하여 균형을 유지한다. 그런데 이 각각의 기관에 하나 이상의 기능이 저하되거나 이상이 생기면 어지럼증이 발생할 수 있다. 한 예를 보면 50대의 A는 10년전부터 앞으로 쏠리며 넘어질 것 같은 느낌이 가끔 들기도 하고 발 밑 땅이 움직여서 훅:꺼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핑도는 느낌이 들
그럴 때 있습니까. 숨을 쉬고 있는데도 숨이 막힐 때. 발가벗겨진 것 같아 숨고 싶을 때. 당신도 나처럼, 놓아버리고 싶은 적 있습니까. 말짱한 세상이 싫어서 취해버린 적 있습니까. 나처럼 당신도, 엉망진창에 누운 적 있습니까. 아마도 없겠지요. 참 쪼잔합니다. 나라는 사람 말입니다. 빨았다 뱉으면 그만인 한 모금 담배 연기 같달까요. 그렇잖습니까. 담배 연기란 게 형체만 요란하고 쓸모없는 것이라서. 훅 뱉어버리면 그뿐, 그립거나 보고파 할 대상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여운은 남는다고요? 웬걸요. 남아봐야 반지하 단칸셋방에 널린 빨래 같아서, 바람 따라 흘려보내고 싶은걸요. 흘러 흘러 먼바다에 가 닿으면 부끄러움도 그만큼 옅어질 테니까요. 그럴 때 있습니까. 통 크게 쏘고 싶을 때. 가격표 보지 않고 사주고 싶을 때. 당신도 나처럼, 주머니만 뒤적이다 돌아선 적 있습니까. 한 번쯤 서고 싶은데, 한 번은 서야 할 텐데. 사람 노릇이 왜 이리 고달픈지. 달력에 표시된 기념일을 볼 때마다 서지 못하고 넘어지는 내가 어쭙잖아서. 하, 이러고도 사내랄 수 있을까. 이리 생겨 먹어도 어른이랄 수 있을까. 친구고 형제고 가족이랄 수 있을까. 쓴물 삼키는 나처럼 당신도,…
최근 한류(韓流. Hallyu)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이 엄청나다. 한국문화·역사와 한국어를 기반으로 하는 K-드라마‧예능‧영화‧음악‧애니메이션‧출판‧웹툰‧게임‧패션‧뷰티‧음식 등을 즐기는 지구촌 한류 동아리가 112개국 1,748개이고, 한류 팬은 2억2497만 명이라고 한다(한국국제교류재단, 2023). 적극적 참여자를 기준으로 이 정도면 소극적 한류 향유자·소비자는 얼마나 될까. 적어도 3배 이상일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글로벌 한류 현상의 저변에는 우리와 밀접한 관계인 전 세계 180개국 재외동포사회가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국내 거주 다문화·외국인·유학생은 물론 해외진출 한국기업 종사자, 내·외국인 관광객, 심지어 북한동포들까지 각자의 방식으로 호감을 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한류 팬덤(fandom)이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을까”와 같은 기존의 담론(談論) 수준을 뛰어넘어 “지속가능한 글로벌 한류 생태계 조성을 위해 우리 각자는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할까”를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민간차원이다. 2024년 한 해 동안 한국인 해외출국자는 2872만 명이었다. 외국인 국내 입국자도 1696만 명에 달했다. 국내 총인구 516
검색의 시대, 클릭 몇 번으로 세상 일 다 알고 해결 가능하다 여겼나. 허나 반드시 그런 건 아니었다. ‘도대체 그는 왜 그랬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경험한다. ‘앞으로 어찌 될까?’ 또한 마찬가지. 클릭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유와 다음에 오게 될 세상을 짐작하는 것에도 클릭은 역시 무능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클릭 밖에는 방법을 가지지 못한 것인가. 스마트폰이 대신 해준다고 여겼겠다. 뭐든 치면 나오지 않던가. 이제 인공지능(AI)까지 ‘거인의 어깨’를 가볍게 밟고 날아오르는 듯, 심지어 그걸 만든 이들마저 당황하는 모양새다. 어떤 낱말이 어찌하여 저런 뜻을 가지게 됐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 저 스마트한 장치들이 어원풀이도 꽤 하더라만, 한계 있더라. 기왕의 자료를 긁어모아 해(解 풀이)와 답(答 대답)을 내는 것이니 아직은 불가피하리라. ‘짐작’을 예로 들자. ‘사정이나 형편 따위를 어림잡아 헤아리는 것’이 사전의 풀이다. 15세기 옛 문헌에서 그 활용의 초기 사례가 보이는 한국어인 짐작은 왜 저런 뜻을 갖게 됐을까? ‘짐작’에 ‘한국어’란 앞말을 붙인 건 ‘한자를 속뜻으로 하는 우리말(어휘)의 한 갈래인 한자어라는 점’을 드러내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