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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돌고성] 묵암 이종일 선생을 기억하는가

 

역사의 길은 언제나 쉽지 않다. 생계의 위협은 물론 죽음까지도 불사해야 하는 순간에 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올곧게 그 길을 걸어가는 인물들이 있다. 역사는 이들을 기억해야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삶은 제대로 기억되지 않고 있다. 묵암 이종일 선생도 그런 분들 중 한 분이시다.

 

3.1 혁명(운동이라는 표현이 익숙하지만 진행 과정과 목표는 확실히 혁명이다)의 가장 큰 공은 역시 민족대표 33인에게 있다. 몇 사람이 친일의 길을 걸었지만 손병희를 비롯해 몇 분은 옥사하였고, 대부분은 끝까지 변절치 않고 조국의 독립에 몸을 바쳤다. 이종일은 당시 출판사였던 보성사의 사장으로 독립선언서 3만 5000매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아 이를 충실히 완수하였다. 그는 33인 중 최고형을 받은 5명 중의 한 명이었고 석방 뒤에도 다시 제2의 독립만세를 준비하다가 실패하고 아사 순국하고 말았다.

 

충남 태안의 천재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한 그는 구한말의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정3품의 직위까지 올랐지만 벼슬을 내려놓고 독립협회에 참가, 독립신문의 논설 필자로 그리고 순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발행하고 급기야는 동학에서 천도교로 개명한 종단에 입도(入道)함으로써 본격적인 종교를 통한 계몽의 길로 들어섰다. 특히 손병희가 일본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 가져온 최신식 인쇄기로 언론 출판을 통한 국민 계몽에 진력하는데 그 운동에 가장 적임자가 이종일이었다.

 

역사에서는 기록을 중시하기에 기록에 없는 내용을 언급하기가 꺼려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때로는 기록의 이면을 읽을 필요가 있다. 1882년 9월 박영효의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갈 때 타고 간 메이지마루(明治丸)에서 국가의 상징이 필요하다는 선장의 조언에 따라 선상에서 태극기가 최초로 제작되는데(같은 해 3월에 이응준이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과연 태극기가 박영효의 작품인지 아니면 함께 갔던 이종일 등과의 합작인지에 알 수 없다. 다만 탁월한 유학자인 이종일이 어떤 형태로든지 태극기 제작에 관여했을 것이다. 9월 25일 일본 고베시에 도착한 수신사 일행은 항구 근처의 니시무라(西村屋) 여관 옥상에 최초로 국기를 게양했는데, 현재는 니시무라 사진관이 운영되고 있지만 이를 알리는 아무런 표식도 없다. 최초로 우리의 태극기가 걸린 현장이었음에도 말이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수차에 걸쳐서 교주 손병희에게 독립운동을 제의했지만 보류되다가 드디어 1919년 3.1 혁명으로 빛을 보게 된다. 3.1 혁명에서 그가 이룬 업적은 필설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옥중에서의 투쟁과 출소 뒤 바로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하고 제2의 독립선언문을 완성했지만 일경에 압수되자, 콩죽으로 연명하던 오두막에서 굶어서 돌아가셨다. 후사도 없기에 변변한 추모의식 한번 치러줄 조직도 후학도 없다.

 

지난 3월 1일 이종일 평전이 출간되었다. 전 독립기관관 관장이신 김삼웅 선생께서 탈고한 지 2년 만에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출간이 늦어진 이유는 어려운 출판 문화와 역사 찾기에 게으른 모두의 탓이지만 만시지탄의 심정으로 고마움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봄이 가지 전에 이종일 선생의 흔적을 찾아 태안의 생가와 서울 보성사 터 그리고 강북 삼성병원 뒤의 순국지까지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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