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삶과 죽음의 의의에 관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영혼은 배우지 않는다. 다만 원래 알고 있던 것을 떠올림 따름이다. (다우드 엘) 현자는 언제나 만물 가운데서 도움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어진 재능의 본질은 모든 사물 가운데서 선을 이끌어 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존 러스킨) 정치적 승리, 수입의 증가, 너희 가운데의 병자의 회복, 멀리 갔던 벗의 귀가 같은 행운은 너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너희에게 드디어 좋은 날이 온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너희 자신 외에 너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에머슨) 인생의 사명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바깥 세계에서 찾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너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너희 자신의 마음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싹의 상태로 있으니, 너희는 선한 생활로 그 해답의 싹을 틔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만이 예지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류시 말로리) 벗을 찾아 헤매는 자는 가련하다. 왜냐하면 참으로 충실한 벗은 자신뿐이며, 밖에서 벗을 찾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참으로 충실한 벗일 수 없기 때문이다. (소로) 누가 가르쳐준
완전성에 대한 관념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만족하고 현실과 다투지 않으며, 그 현실이 그대로 정의이고 행복이며 아름다움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런 진보도 없고 생명도 없다. (아미엘) 개인의 경우나 집단의 경우나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완전성을 향한 추진력은 그 개인과 집단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한 관념이다. (마르티노) “하늘에 계시는 ᄒᆞᆫ님처럼 너희도 완전하라.” 신의 완전성, 즉 모든 사람의 최고선에 대한 이념이야말로 전 인류가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이다.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헤엄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저 언덕, 저 곶, 저 해안을 따라 헤엄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항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지침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득한 별과 나침반뿐이다. 아무리 타락한 사람이라도 항상 자신이 지향해야 하는 완전성만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은 힘이다. 말이 아니다. 생각이 아니다. 사상이 아니다. 지식이 아니다. 이론도 아니고 학설도 아니다. 술(術)도 아니요 방편도 아니다. 신앙은 힘이다. 살리는 힘이다. 말로써 영혼을 구원하였다는 일을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육체가 서서히 스러지고 정신생활이 서서히 풍요로워지는 과정 그 자체이다. 자기 자신과 투쟁하고 자기 자신에게 강제를 가하는 것은, 원래 번뇌를 갖고 태어난 우리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강제로 어머니가 떼어내듯이 선은 우리를 악에서 강제로 떼어놓는다. 이 투쟁은 고통스러운 일이긴 하나 꼭 필요한 일이다. (파스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늘이 곧 우리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겠지 하는 어리석은 기대를 버리는 것이다. 음식을 아무렇게나 장만하면서 하늘이 그것을 맛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기를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그와 마찬가지로 만약 너희가 오랫동안 어리석은 나날을 보내며, 자신의 생활을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었다면, 신의 손길이 곧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기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존 러스킨) 만일 그편이 좋다면, 신은 우리 모두를 한 백성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우리를 시험하고 있다. 너희가 어디에 있든 온 힘을 기울여 선을 향해 노력하라. 그러면 언젠가 신이 너희를 모두 하나로 맺어줄 날이 올 것이다. (코란) 자기 완성의 길에서 걸음을 멈춰서는 안 된다. 네가 자신의 영혼보다 외부
자신의 영혼과 세속적인 행복을 동시에 돌볼 수는 없다. 세속적인 행복을 바라거든 영혼을 거부하라. 만약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 싶거든 세속적인 행복을 부정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분열만 되풀이하다 결국 하나도 얻지 못할 것이다. (에픽테토스) 사람은 선택에 따라 두 종류의 삶을 살 수 있다. 진실한 내면적인 삶과 허위의 외면적인 삶이다. 내면적인 삶은 사람이 단순히 외적인 자극과 겉모습만으로 살지 않고 모든 것 안에서 피안을, 즉 신을 보며, 자신의 생명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신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실천적으로 발휘하여 그것을 흙 속에 묻힌 채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고골리) 의무의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물질적 세계의 현실성을 느끼게 하고, 그 생활에 참여케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그 세계에서 떼어놓고 우리에게 그 비현실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아미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 정신적인 것, 우리가 자신의 내부에서 자기 자신으로 의식하는 것, 오직 그것만이 현실이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은 모두 우리의 감각기관이 만든 것이며 따라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내 사상을 여러 사람에게 전
교육의 기초는 삶의 의의와 그 사명을 명백히 하는 일이 아니면 안 된다. 사람들은 법정에서의 거짓말을 범죄로 생각하고, 같은 성인들끼리 잘못된 말을 하는 것을 한심한 일로 생각하지만,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허황된 말을 지껄이고 아무리 거짓말을 하여도 잘못이 아니며 오히려 필요한 일처럼 생각하고 있다. 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인생의 의의와 사명에 대해 설명하는 종교상의 가르침은, 천년 전의 사람들에게는 만족을 주었지만 현대인들은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어린이들에게 천년 전의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이것은 무서운 잘못이다. “어린이를 교육할 때,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 것은, 어린이들에게도 모르는 것으로 가르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리히텐베르크) 이 말은 흔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듯, 어린이들에게 의심스러운 미신을 제법 근거가 있는 것처럼 믿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면 어린이들은 애매하고 어중간한 논거에 만족하는 버릇이 생겨서,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어린이를 교육할 때 그들을 지나치게 힘들게 하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아직 인간
-통혁당 사건 이후의 기세춘 지난 5월 6일 88세로 세상을 떠난 묵점(墨店) 기세춘(奇世春)에게 1968년 ‘통혁당 사건’은 그 인생에 한 획을 긋는다.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박성준은 15년형 그리고 기세춘은 기소유예가 되었다. 하지만 수사명단에 올라 빨간 딱지가 붙은지라 구직(求職)은 막혔고 대전에서 기계 설계로 생활을 해결하면서 동양철학 연구에 생애를 바친다. 훗날 묵자(墨子) 연구는 기세춘의 명성을 만들어 냈다. 그는 퇴계 이황과 조선 성리학의 최고 논쟁인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였던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의 15대손으로 잘 알려졌고 아마도 그 내력은 기세춘의 평생 자부심이 되었으리라 짐작해보게 된다. 그가 한학과 동양사상에 몰두하게 된 까닭도 이런 연유가 강하게 작용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큰할아버지 기삼연은 구한말 의병대장이었으니 이런 가족사의 흐름 속에서 기세춘이 무얼 생각하며 살았는지 알 만하다. 기세춘이 통혁당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것은 1963년 그가 『동학혁명연구회』를 만들어 이끌고 있을 때였다. 당시 이 연구회의 학술위원장을 맡은 이가 신영복이었으니 수사당국이 그대로 지나칠 리 만무했다. 둘의 인연은 신영복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