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추석, 버스가 시골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 문이 덜컹하고 열리자 알싸한 황토 냄새와 함께 흙먼지가 훅 차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한껏 멋을 낸 옷에 번들거리는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밝은 표정으로 버스에서 쏟아져 내렸다. 손에는 선물보따리가 가득했다. 터미널에 마중 나온 어린 동생은 제일 먼저 누나가 사온 운동화를 받아 들고 벌써 포장을 뜯고 있었다. 나는 맨 마지막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내 손에는 공장에서 준 식용유 선물세트가 하나 들려있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당산나무를 지나 방앗간 터를 지나갈 때 승용차가 빵빵 거리며 나를 비켜 지나갔다. 성공한 아랫집 자식들이 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승용차를 타고 오지 못했다. 바리바리 선물꾸러미를 가져오지도 못했다. 겨우 결혼은 했으나 결혼식은 하지 못했고 아내가 아파서 아들은 집에 두고 혼자 찾아오는 길이었다. 어머니에게 용돈이라고 드릴 얇은 봉투가 겨우 하나였다. 이미 집에 와 있을 동생들을 볼 면목도 없었다. ‘큰 형이 집안을 위해서 한일이 뭐가 있는가?’ 전번에 집에 왔을 때 어린 동생이 나에게 한 원망이 여전히 귀에서 맴돌았다. 그냥 여기서 발길을 돌려 돌아가고
아버지는 한마디로 법 없이도 사실 분이었다. 중학교 졸업 학력이었지만 필체가 좋으셨다. 아버지의 펜글씨를 보고 있자면 ‘아, 나는 왜 아버지 필체를 닮지 못했나!’ 안타까워했다. 필체를 빼고 나는 아버지를 빼다 박았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마실 나갈 때 따라나선 나를 본 동네 어르신들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저 놈 보소. 뒷짐 지고 걷는 것도 지 애비를 닮았네.” 나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아버지는 장흥에서 양복 가봉하는 일을 하다가 목포로 나가서 택시회사 경리를 하셨다. 몇 년 후 우리 식구들도 전부 목포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걸핏하면 새로 산 옷을 가난한 동료 택시기사들에게 벗어주고 들어오셨다. 월급봉투를 제대로 채워 들어오시는 경우가 없었다.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타박했지만 아버지는 ‘허허’ 거리고 그뿐이었다. 아버지는 노래를 잘 하셨다. 요즘 유행하는 트로트 말이다. 한밤에 나는 이불속에서 동네 어귀에서부터 들려오는 아버지의 노래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의 손에는 빵 봉투가 들려있었다. 문제는 술이었다. 아버지는 술이 아무리 취하셔도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 어쩔 때는 퇴근하는 택시기사님들이 집에 내려주고 가시기도 했다. 어머니의 ‘아이고 내 팔자야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다. 오고 싶지 않은 길이었다. ‘왜 싸워야 하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전쟁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도망쳐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부총병 양원 대장도 도망가 버렸다. ‘계속 싸워야 하는가?’, ‘차라리 항복해 버릴까?’, ‘대관절 조선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이신방 장군을 따르는 명나라 병사들의 고민이 깊어갔다. 그래도 추석이다. 조선의 아낙이 성벽을 돌며 마지막 고기국물을 돌렸다. 쑥을 넣어 만든 떡도 한 개씩 돌렸다. ‘왜군이 얼레빗이면 명군은 참빗이다’고 경계하던 조선의 아낙과 노인들 그리고 성에 갇힌 아이들이 이제는 스스럼없이 명군에게 다가와 ‘고맙다’ 인사하고 손을 잡아주고 갔다. 1597년 정유년 추석, 조선 땅 남원성. 왜군 주력 오만육천여 명이 호남을 점령하기 위하여 관문인 남원성을 공격했다. 거기에 맞서 싸운 병사는 명군 삼천 명과 조선군 천 명 그리고 성으로 피신 온 백성 육천여 명이 있었다. 명군 대장 양원은 중간에 성을 포기하고 도망갔지만 이신방 장군 휘하 명군, 이복남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처영스님이 이끄는 승병과 의병, 남원성 백성까지 일만여 명
어느 해 시월의 마지막 날 나와 아내는 무작정 공단에 와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3층 연립주택 반지하 단칸방이었다. 바로 앞집에서는 걸핏하면 부부 싸움이 벌어졌다. ‘살림살이가 깨지는 소리’ ‘악다구니 소리’ ‘울음소리’가 들썩거려 밤잠을 깨기 일쑤였다. 여름 날 선풍기 하나 겨우 숨을 헐떡거리며 돌아가는 지하방은 열대 정글처럼 습기가 많아 꿉꿉했고 하수구 냄새는 역류했고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철판을 굽히고 접는 공장에 다녔다. 그 회사 다니기 전에는 철판을 자르는 회사에 다니기도 했고 프레스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회사는 달라졌지만 작업복과 안전화는 바뀌지 않았다. 매달 받아든 누런 월급봉투의 무게는 병아리 눈물만큼 더해졌다. 아내 또한 옆 공단에서 전자부품공장에 다녔다. 둘은 부지런히 일했지만 예금통장의 잔고는 쉽게 올라가지 않았다. 일은 힘들었고 공장에서 돌아오면 쓰러져 자기에 바빴다. 하루 종일 전자부품 검사를 하고 돌아온 아내의 얼굴은 늘 창백했다. 그래도 한 달에 딱 한번 ‘수고하셨습니다’라고 겉봉투에 적힌 월급봉투를 아내에게 내밀 때는 내 얼굴이 밝았고 봉투를 받아드는 아내의 미소가 환했다. 그날은 외식을 하고 서점에 가서 책도 사고 영화를
식탁이었다. 큰 꽃잎 문양이 수놓아진 식탁보 한가운데 해바라기와 이름 모를 꽃들로 장식된 화병이 놓였다. 냅킨이 곱게 접혀있었고 은색 숟가락과 포크가 놓여있었다. 큰 접시들에는 구운 오리고기와 오믈렛과 샐러드, 미군들이 먹는다는 햄과 베이컨과 ‘에그 프라이’가 그득했다. 선교사님이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이모와 사촌 형, 누나들이 자리에 앉자 선교사님이 기도를 했다. 나도 고개를 숙이고 주기도문을 외웠다. 이모님이 나를 위한 기도를 특별히 하셨다. 이모는 나를 부를 때 ‘미스터 고’ 라고 했다. “미스터 고가 주님의 은총으로 명문 ㅇㅇ대의 법대에 입학하였습니다. 주님의 종으로 크게 쓰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모의 기도는 밝고 높은 톤이었다. 특히 법대라는 대목에 강한 악센트를 주셨다. 이모는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 조카의 앞날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선교사님과 이모는 영어로 대화를 나눴고 누나들도 가끔씩 영어로 농담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손짓을 했는데 나는 몇 마디 단어를 알아들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아이 언더스탠드’ 라고 겨우 대답했다. 그러나 덕담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이모의 충고가 시작되었다. 이모는 한국의 모든 것이
1980년 5월 그 숨 막히던 봄날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어느 날 자취방 주인아주머니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우리에게 울부짖듯이 소리쳤다. “아그들아, 빨리 도망쳐야. 공수부대가 삼학도에 떨어졌당께. 학생들은 다 죽인다드라. 언능 가야.”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지를 벗어나기로 했다. 자취방 친구를 따라 진도로 도망을 갔다. 처음 가본 진도였다. 나라에 난리가 났지만 섬은 평온했다. 시골집 툇마루에 앉아 떨어지는 석양을 즐겼다. 친구 어머니가 밭에 나가셨다가 해 떨어지고 나서야 집에 돌아오셨다. 대처로 유학 보낸 아들 친구가 왔으니 어머니 얼굴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가득하셨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밥을 하셨다. 나도 사실 많이 허기져 있었다. 친구와 겸상으로 밥상을 차려주셨다. 먹음직스러운 김장김치가 보시기에 한가득했고 밥이 머슴밥처럼 그득했다. 나는 허겁지겁 밥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어떤 조화인지 밥이 식도로 넘어가질 않았다. 밥알이 입안에서 겉돌기만 하고 목에 걸려 넘기지를 못했다.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의 예의는 알만한 나이였다. 친구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지어준 밥이 아닌가? 몇 번이나 먹어보려 했지만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