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와 B가 교실에서 무언가 훔친다고 했다. 특수학급 보조교사는 문구용품과 간식이 사라진다며 ‘범인’으로 아이들을 지목했다. 장난과 호기심에 한두 번 그러다 말겠지 했지만 세 번째 도적질이 보고되자 두 녀석을 불렀다. “너희들이 한 짓을 이미 알고 있다. 이실직고하면 부모님께는 말씀 드리지 않겠다. 대신 교실에서 가져간 것을 낱낱이 써내라” 녀석들을 협박했다. 가정에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약속 때문인지 열심히 훔친 내역들을 써내려갔다. 자백을 받아내는데 나름 효과가 있구나 하고 은근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발달장애 아이들이라 정직하고 순수했다. “아닌데. 더 있는데. 선생님은 너희들이 뭘 가져가는지 몰래 지켜봤다. 아직도 빠진 게 있으니 빠짐없이 써내라” 했다. 당황한 녀석들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적고 또 적었다. 열심히 작성한 도난품 목록에 순진하게도 ‘정수기 물’까지 등장하자 비로소 취조를 멈췄다. 아이들이 돌아간 후 도난품 목록을 읽다 보니 의문이 생겼다. A는 책, 교구, 문구류, 간식 등 가져간 물품이 다양했다. 단지 재미로 훔친 것 같았다. 가정형편이 넉넉했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가져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B가 적어낸 건 거의 ‘먹을 것’이었다
"하루 여행 경비는 10달러를 넘지 않는다" ‘10달러 원칙’은 청년 시절 나만의 여행 방식이었다. 아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긴 여정 긴 시간 방랑생활의 규율이기도 했다. 숙박지는 대개 싸구려 도미토리였는데 침구는 때에 찌들어 불결했다. 게다가 벼룩과 빈대의 습격은 고역이었다. 적도의 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벌레에 물려 밤새 가려움에 박박 긁어댔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김장용 비닐이었다. 침대 매트리스 위에 비닐을 깔아 해충이 침구를 뚫고 올라오는 걸 막았다. 바스락대는 촉감이 거슬렸지만 참을 수 없는 가려움에 시달리는 것보다 나았다. 대형 비닐은 내 장기 배낭여행 필수품이었다. 도시에서 도시로의 이동은 밤 버스를 이용했다.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웅크린 채 앉아서 잠을 청해야 했지만 선선한 밤하늘 아름다운 별들 사이로 길을 만들며 지나는 별똥별은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자연은 두려움을 내려놓으면 기적 같은 선물을 무심히 던져 주곤 했다. 10달러 원칙으로 호사를 누릴 기회도 만들었다. 먹고 자는 돈을 아껴 중국 병마용, 인도 타지마할, 이란의 페르세폴리스처럼 입장료가 비싼 유적지를 경험하거나 현지에서의 식도락을 즐겼다. 빈곤을 감내한 풍요는 여독을
첫아이 소풍 도시락을 호들갑 떨며 싸던 때가 있었다. 새 모이 마냥 밥 몇 숟갈 먹는 아이인데 잔칫상 차리듯 준비했다. 쪽잠을 자고 새벽같이 일어나 재료를 손질했다. 오색 꼬마 김밥, 별 모양 소고기 주먹밥, 메추리알로 만든 병아리, 햄과 채소를 꽃잎처럼 오려낸 샐러드를 담았다. 내 아이만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도시락이었다. 엄마가 처음이라 그게 최선의 모성애인 줄 알았다. 그 아이가 다섯 살 무렵 나는 병설유치원 특수학급에서 일했다. 공교롭게도 첫애와 같은 해에 태어난 아이들을 맡았다. 그래서인지 내 눈에는 덩치만 컸지 아직 아기들로 보였다. 엄마 품을 떠나 규범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생활하는 게 짠하고 뭉클하고 안타깝고 대견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교사라기보다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해 봄날 아이들과 소풍을 갔다. 점심이 되어 각자 집에서 보내온 도시락을 가지고 모둠으로 둘러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한 녀석이 뭉그적대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조막만한 손을 만지작거릴 뿐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지 않았다. 교사의 재촉에 내놓은 건 검정 비닐봉지에 든 떡 한 팩, 소풍 도시락이었다. 뭔지 모를 부끄러움이 그 순간 나를 멈춰 세웠다. 뭐든 나눠 먹어야
첫사랑은 아름다움이라기보다 차라리 슬픔이었다. "언제 처음 사랑에 빠졌어요?“ 내 질문에 그는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가 그렁해졌다. 그날 수업 주제는 첫사랑이었다. 20대 초반, 나는 장애인 야학 교사였다. 어떤 성인 장애인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그는 자기 이름 석 자만 쓸 수 있었다. 수업에 사용할 한글 교재를 찾는데 마땅한 게 없었다. 알록달록한 그림과 스티커, 큼직한 활자는 스무여섯 살 청년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유아용 교재로 한글을 배우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다. 고심 끝에 직접 교과서를 만들기로 했다. 주제를 정해 대화를 나누며 녹음했다. 녹취를 풀어 문법에 맞게 글을 다듬고 이를 모아 교재로 엮어냈다. 그의 머리와 가슴 언저리에 머물던 정직한 시간 속에서 곰삭은 어휘가 종이 위에 펄떡거렸다. 경험과 생각이 자신의 언어로 정리된 교과서는 효과적이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한글을 익혔다. 뇌성마비 장애인이라 그의 발음을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선명하고 또렷하게 들렸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져 갔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가 겨우 목구멍을 열어 내놓은 건 어린 시
꽃 속이 따뜻하다. 너무 아프면 세상이 다 꽃으로 보여 천지간 온통 꽃 아닌 것 없으니 /이승희, 푸른 연꽃 인적 드문 사막에 숙소를 잡고 매일 느린 걸음으로 산책에 나섰다. 오솔길을 따라 한참 걷다 보면 브라만 사원이 나왔다. 거기서부터 작은 사원과 신전, 상점이 즐비한 바자르가 이어졌다. 사원 주변에는 걸인들이 우글거렸다. 인도 전통의학 아유르베다에서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해독요법인 ‘판차카르마(Panchakarma)’에 참여하고 있던 때였다. 내가 머물던 푸쉬카르는 “푸른 연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었다. 생명의 여신 사비트리와 지혜의 여신 가야트리가 지키는 사막의 성지라고 한다. 나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무기력과 우울함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몸과 영혼이 길거리 걸인들처럼 누더기였다. 어느 날 기도를 드리고 나오다 한 사람에게 돈을 주니 그걸 본 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자기한테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심지어 "쟤는 주면서 나는 왜 안주냐? 공평하지 않다"며 따지는 걸인도 있었다. 그들은 ‘나는 너에게 선(善)을 쌓을 기회를 주는 거야’라는 듯 당당했다. 구걸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최소한의 돈을 준다. 그런 적선 행위를 비판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해서 떠날 거라 했다. 서른세 살에는 미치지 않으면 자살하게 될 운명이라 했다. 인도 뉴델리 파하르간즈 골목에서 만난 예언자라는 이의 말이었다. 스무 해 전, 나는 한국을 떠났다. 중국에서 터키까지 두 해에 걸쳐 길 위에서의 삶을 살았다. 사랑하던 이를 잃고 힘겨운 마음으로 견디던 여정(旅程)이었다. 그 한 복판에서 듣게 된 끔찍한 예언이었다. 탁류(濁流)에 휩쓸려 깊고 어두운 강 아래로 내가 가라앉는 일시정지 화면이었다. 화가 치밀어 좌충우돌 목적지도 없이 버스를 탔다.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못했다. 사흘 밤낮 의자에 꼿꼿이 앉아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러다 도착한 곳이 히말라야 산맥 해발 2천 미터 고도에 위치한 마날리였다. 해가 저물기도 전인데 버스는 끊겼다. 어쩔 수 없이 하루를 묵어야 했다. 더군다나 알고 보니 온천 마을.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않는 자학 프로그램”이 버스 끊긴 산속 온천 마을에서 자동 종료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고행을 이어가기로 했다. 무작정 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며칠을 굶어 쓰러지기 직전이었지만 사과나무의 탐스러운 열매에 눈길조차 주지 않을 만큼 가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