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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윤의 좌충우돌] 어느 첫사랑 이야기

 

 

 

 

첫사랑은 아름다움이라기보다 차라리 슬픔이었다.

 

"언제 처음 사랑에 빠졌어요?“

 

내 질문에 그는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가 그렁해졌다. 그날 수업 주제는 첫사랑이었다.

 

20대 초반, 나는 장애인 야학 교사였다. 어떤 성인 장애인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그는 자기 이름 석 자만 쓸 수 있었다.

 

수업에 사용할 한글 교재를 찾는데 마땅한 게 없었다. 알록달록한 그림과 스티커, 큼직한 활자는 스무여섯 살 청년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유아용 교재로 한글을 배우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다. 고심 끝에 직접 교과서를 만들기로 했다.

 

주제를 정해 대화를 나누며 녹음했다. 녹취를 풀어 문법에 맞게 글을 다듬고 이를 모아 교재로 엮어냈다. 그의 머리와 가슴 언저리에 머물던 정직한 시간 속에서 곰삭은 어휘가 종이 위에 펄떡거렸다. 경험과 생각이 자신의 언어로 정리된 교과서는 효과적이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한글을 익혔다. 뇌성마비 장애인이라 그의 발음을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선명하고 또렷하게 들렸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져 갔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가 겨우 목구멍을 열어 내놓은 건 어린 시절 고통이었다. 장애를 부끄러워한 부모는 그를 방에 가두어 키웠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고향을 떠날 때까지 그는 유폐된 존재였다.

 

지루하고 무료한 일상이었다. 침을 묻혀 손가락으로 창호지 문에 구멍을 뚫었다. 그 틈으로 바깥 풍경을 만났다. 창호지에 생겨난 구멍은 고립된 자신과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마당 앞 수령 깊은 나무가 햇살을 누리며 계절을 갈아입는 것보다 설레었던 건 사람이었다. 등하교 시간이 되면 한 무더기 동네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집 앞을 지나갔다. 구멍을 통해 학교와 집을 오가는 또래 아이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는 아이들에게 “없는 사람”이었다.

 

사춘기 소년이 되었다. 눈뜨면 다시 또 하루가 시작된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끔찍하고 힘겨워졌다. 그 무렵 첫사랑을 만났다.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아이였다. 하루 종일 소녀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길었고 사라지는 건 순간이었다. 헛헛함에 그저 울고 싶었다.

 

어느 날부터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도 끝났다. 만난 적이 없으므로 떠나보내는 게 어떤 건지 실감 나지 않았다. 슬픔은 짧고 그리움은 남지 않았다. 청년이 되어 생존을 위해 뛰어든 도시는 그 모든 아픔을 아픔 이전의 자리로 돌려놓았다. 고통조차 지우고 살아가야 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없는 삶이었다. 파고 팔수록 아픔이 새어 나왔다. 인간다움이 무너진 삶, 갇혀 살아야 했던 청년의 슬픔, 손상된 존엄이 첫사랑의 추억이었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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