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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생각한 마음, 지역사회 '사랑의 빛' 밝힌다

 

■ 여주노인복지관 자원봉사자 송영덕 어른

5년째 직원보다 먼저 출근 물품 보충 등 구석구석 손길 필요한곳 챙겨 ▶▶▶

65세 이상이면 회원이 될 수 있는 여주군 여주읍 상리에 위치한 여주노인복지관은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일상적인 곳이다.

노인복지관에 수영을 하러 왔다가 복지관의 투철한 자원봉사자로 변신한 사람이 있다.

송영덕(78)씨는 “매우 활동적인 성격 때문에 부단히 움직여야만 직성이 풀린다”며 “무척이나 쌀쌀해진 날씨 탓으로 외출이 꺼려지는 계절이지만 이럴 때 일수록 몸을 많이 움직이고 활동적으로 생활해야 건강하게 지낼수 있다”고 말한다.

나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생동감 있는 모습으로 일상을 보내는 자원봉사자 송씨는 운수업에 오랫동안 종사하다가 지난 2004년 퇴직한 이후 여주노인복지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비슷한 연령대의 어르신들이 마음 편하게 복지관을 이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그의 역할이다.

송영덕 씨의 인생 여정 이야기는 6·25가 발발하자 열아홉 나이로 전선에 나가 학도병으로 활동한 것에서부터 불이 붙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전쟁 참여담에서 백마고지 전투의 치열했던 상황이 눈에 그려지듯이 생생하고, 전차부대에 배속됐으나 전차가 오지 않아 수색중대로 다시 배속됐다는 웃지 못할 아픔은 그가 겪었던 엄연한 현실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서울 동대문에서 뚝섬을 운행하던 전차(電車) 운전을 시작으로 평생을 운수업에 종사하게 된 송씨의 사연이 구구절절하게 전개된다.

서울에서 전차가 사라지면서 일자리를 잃고 실업자가 된 그가 선택한 것은 ‘시발택시(1950년대 운행되던 지프를 개조한 택시)’운전.

시발택시를 운전한 경험을 살려 서울에서 버스회사에 취직한 송씨는 자재담당자로 20년이 넘도록 봉직하게 되면서, 이때 여주에서 서울까지 매일같이 출퇴근을 하는 생활이 일찍 일어나는 습관으로 정착됐다.

꼼꼼하고 빈틈없는 성격과 일처리로 회사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그에게 버스회사는 정년퇴직 이후 10년이 넘도록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고 만74세까지 현직에서 일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의 몸놀림과 활동성을 보면 날렵한 청년을 연상케 하고, 예절바른 모습과 민첩하게 움직이는 만 78세의 송영덕 옹은 그야말로 청춘이다.

노인복지관의 출근시간이 9시지만 그는 8시에 나와 물이 떨어진 정수기에 물을 채우고, 커피 자판기에 컵도 보충하며 각 교실과 강당을 일일이 다니면서 문을 열어놓는다.

복지관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지도 벌써 5년째. 워낙 활동적인 성격 탓으로 오전 일과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복지관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살피며 정신없이 봉사에 열정을 바친 사이, 송씨의 인생가치는 그만큼 아름답게 무르익어 가고 있다.

송씨는 “본인들의 차량으로 자비를 들여서 여주지역 곳곳에 독거노인 등 소외된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반찬을 나르는 자원봉사자들을 보면서 참된 자원봉사의 의미를 생각한다”며 오히려 자신의 봉사활동은 대수롭지 않다고 겸손해 한다.

오전에 봉사활동을 마치고 오후에는 성경대학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 송영덕 옹은 “시켜만 준다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순간까지 봉사를 하고 싶다”는 담담한 말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명쾌한 대답을 많은 사람들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 6.25참전전우회 여주군 지회 김정식 회장

이·반장 활동 동네 뒷바라지… 평생모은 수석 150여점 市박물관 기증 ▶▶▶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해병대 제대 후 칼과 도장나무를 들고 오로지 생활고(生活苦)를 해결하기 위해 연평도, 백령도 등지로 이곳저곳 다녔던 기억은 이제 아련한 옛 추억이 됐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당시의 일이 시련으로 남아 있다.

그때마다 홀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해 냈다.

여주군 여주읍내 군민회관 옆에 사무실을 내고 일년 365일 봉사활동을 위해 근무하고 있는 6·25참전전우회 여주군 지회 김정식 회장(78).

해병 출신인 김 회장 가족은 3대가 해병을 제대했다. 두 아들이 해병을 다녀왔고 김 회장의 손자 둘이 또 해병 출신으로 해병가족 중 이렇게 군복무를 마친 일은 전례가 없다.

여주읍 중앙통 시장에서 ‘홍콩안경’이라는 안경점을 아들과 함께 운영하며 여생을 활기찬 자원봉사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그에게 ‘남을 돕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어렵고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이제 고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아 자원봉사와 사회에 기여하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느낀다고 전한다.

“지나간 시간을 뒤돌아보면 회한도 많고 심지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도 많았지만, 어둠의 긴 터널을 굳센 의지로 헤쳐 나온 제 자신을 생각해 보면 가슴 벅찬 기쁨이 온몸으로 전해져 온다”며 감회에 젖는다.

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여주신용협동조합 이사장을 3,4,5대에 걸쳐 맡으면서 여주 서민금융을 강화시켰다.

한때 반대파에 의해 일시 밀려났다가 신협이 위기에 처하자 지지자들에 의해 다시 복귀해 서민경제의 터전을 다시 회복시켰던 일은 아직도 그의 기억에 생생하다.

김 회장은 다양한 경험을 했고 여러 사람들도 만났다.

그 중에서 여주대학 설립자인 정동성 박사를 보필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또한 인천과 수원에서 정당 활동을 펼친 경험과 여주에서 40대 초반에 마을이장을 맡은 일, 나이 60세가 넘어서도 반장을 하면서 주민들과 지냈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5·16혁명 이후 여주로 이전해 와 잠시 머물려고 했던 것이 그를 평생 여주사람으로 만들었다.

그의 삶의 흔적은 여주박물관의 남한강 수석전시실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으며, 남한강을 사랑하며 57년간 수집한 수석은 무려 1천여점이 넘는다. 이들 수석 중 일부를 여주 박물관에 기증해 ‘남한강 수석전시실’을 꾸몄고 수석전시실에는 150여점이 전시돼 있다.

그의 수집으로 모은 우표가 8천장이 넘고 각종 연하장과 수석메달, 라이터, 양주병 등 평생을 수집하면서 인생의 여유를 즐겨왔다.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아주 짧은 생각이지요. 언제 없어질지도 모르고 자식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어요. 그러나 박물관에 기증하면 제가 죽어서도 100년, 200년 아니 천년이상 ‘김정식 이라는 사람이 멋진 수석을 기증했구나!’라는 찬사 속에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으니, 이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78세의 나이에도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조차 인격과 존중을 생각해 반말을 하지 않는 김정식씨의 절제된 생활은 이제 그 소중한 물품들이 여주박물관에 기증되면서 그 가치와 품격이 더욱 고상하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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