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도인에게 편지 보낸 동진의 승려 우리나라 각급 학교에서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소수림왕 2년〉조에 “진(秦)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부도(浮屠: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내주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 사례하고 고구려의 토산물을 전했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삼은 내용이다. 이때의 진(秦)은 시황제의 진나라가 아니라 서기 350년 저족(氐族)인 부홍(符洪)이 세운 나라인데, 보통 전진(前秦)이라고 부른다. 저족은 그 기원이 분명하지는 않은데, 강족(羌族)과 같은 계통의 민족으로서 현재 티베트에 사는 장족(藏族)도 같다. 《한서》 〈지리지〉에 농서군(隴西郡)이 나오는데,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남부 일대다. 농서군은 산하에 11개현을 갖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저도(氐道)현이다. 이 저도현에 대한 주석에서 당나라의 학자 안사고(顏師古)는 “저(氐)는 이족(夷族)의 종족 이름이다. 저족이 사는 곳이어서 저도(氐道)라고 불렀다”라고 설명했다. 저족이 세운 전진은 350년 건국했다가 394년에 무너지지만 건국하지마자 급성장해 2년 후에는 황제를 자칭하면서 장안을 수도
◇허왕후와 함께 온 장유화상 최근 한 종중(宗中)에서 사위들도 재산을 달라고 요구했다. 종중 재산을 아들·딸·며느리만 나눠 받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대법원에서 딸들도 종중의 구성원이 된다고 판시한 것은 2005년이다. 그 전에는 딸들도 재산 분배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 사위의 분배 요구는 격세지감이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회에서는 딸은 물론 사위도 아들과 같은 동등한 법적 권리가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종친회’에 대한 ‘정의’를 “집단적인 정체성을 가지는 ‘부계(父系)’의 친족모임”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은 허왕후를 시조모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 정의와 다르다. 《김해김씨세보(金海金氏世譜)》는 허왕후에 대해 “아유타국 공주인데 한 광무 건무(建武) 9년 계사(癸巳:서기 31) 7월 7일 탄강하셨는데, 열여섯 살 때인 가락 개국 7년 무신(戊申:서기 48)년 7월 7일 큰 배를 타고 석탑(石塔)을 싣고 가락국에 이르렀다…연희(延熹) 임인(壬寅:서기 162)년에 보주(普州)황태후라는 존호를 올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석탑을 싣고”라는 구절과 ‘보주왕태후’라는 존호이다. 같은 기록은 “태
◇동이족의 여성중시 풍습 《삼국유사》에 기록된 수로왕과 허왕후의 국혼기사는 같은 시기를 기록한 다른 사료들과 확연하게 비교되는 특징이 있다. 허왕후 도래기사가 기사가 구체적이며 양성평등적이라는 점이다. 먼저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조에는 ‘공주가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 했는데 파도신이 막아서 가지 못하자 부왕이 파사석탑을 싣고 가라고 명해서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와서 정박했다’고 말하고 있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공주는 5월에 아유타국을 떠나서 7월 27일에 가야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요디아 왕국이 있던 갠지즈강 상류의 5월은 배가 거슬러 올라가기 힘든 시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주가 태국 메남강가의 옛 도시 아유티야를 거쳐서 왔다는 학설이 등장한 것이다. 길지 않은 구절이지만 현지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공주는 수로왕이 보낸 신하들을 따라서 가야 궁전에 들어가지 않고 수로왕을 나오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수로왕은 구간(九干) 등이 혼인을 권하자 하늘에서 짝을 맞이하게 해 줄 것이라면서 유천간에게는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왕비를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에게 승점(乘岾)에 가서 왕비를 기다리게 했고, 얼마 후 허왕후 일행이…
◇아유타국은 일연의 창작인가? 허왕후의 고국이 어디인지는 지금껏 숱한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허왕후의 출자국(出自國)이라는 아유타국(阿踰陁國)이 과연 인도인가 하는 점이다. 북한 학자 김석형은 《초기조일관계사연구》에서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것은 승려들이 윤색한 것이고 실제는 큐슈에 있던 가야의 분국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인물이 승려인 일연인 것은 사실이다. 또한 《삼국유사》에 불교 관련 내용이 많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승려들이 윤색했다고 주장하려면 보다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모든 기록을 출전 근거를 가지고 서술했다.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불법을 전한 내용을 기록한 《삼국유사》 〈흥법(興法)〉 ‘순도조려(順道肇麗)’에서 “순도 다음에 법심(法深)·의연(義淵)·담엄(曇嚴) 등이 서로 뒤를 이어 고구려에 불교를 일으켰다”고 쓰고서는 “그러나 고전(古傳)에는 기록이 없으므로 감히 여기에 순서에 넣어 편찬하지는 않는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전진(前秦) 국왕 부견(符堅)이 순도를 보내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후에도 법심·의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한국고대사는 이동설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대부분의 고대 왕조의 개국사는 이동으로 점철되어 있다. 고구려는 북부여에서 내려온 주몽이 건국했으며, 백제는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와 건국했다. 신라도 이주세력과 토착세력의 연합으로 건국했고, 수로왕도 마찬가지다. 수로왕비인 허왕후는 어디에서 이동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수로왕과 구간 등의 접대를 받으며 수로왕의 침전에 들어간 왕후가 수로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주고 있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이고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본국에 있던 금년 5월 중 부왕과 황후께서 저를 돌아보면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상제(皇天上帝:하느님)를 뵈었는데,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락국 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서 대보(大寳)를 다스리게 했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서 배필이 되게 하라』라는 말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오히려 귓가에 남아 있으니, 너는
◇인도에서 일고 있는 한국 열풍 2018년 7월 문재인 대통령은 인도를 방문하기 전 현지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양국 교류의 역사는 2000년에 이른다”며 “한반도 고대 왕국인 가야국의 김수로왕과 결혼해 허황후가 된 아유타국 공주에서 시작된 인연은 60여년 전 한국전에 참전한 인도 의료부대까지 이어졌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문대통령을 크게 환대했고, 문대통령이 인도 거주 교포 초청 간담회를 할 때 인도 전통의 ‘카탁’ 무용단을 보내 수로왕과 허황후를 주제로 한 공연을 하도록 했다.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허황후가 2천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15억 인도인과 5천만 한국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인도에서는 한국인 여행자들을 사돈나라에서 왔다고 크게 환대한다는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과거 역사가 후세 세대에 어떤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말해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국내 강단 사학계에 오면 아주 달라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인도 방문 1년 전인 2017년 6월 1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국정과제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지시했고, 그 일환으로 2019년 12월 3일부터 국
◇산동성 위해시에 사는 김일제의 후손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성씨와 가문의 계보에 대해 연구하는 보학(譜學)을 전근대적인 학문으로 격하시켰다. 그 결과 보학은 역사연구 대상에서 완전히 쫓겨나 소수 문중학자들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임금부터 시골유생에 이르기까지 보학을 모르면 이른바 양반행세를 할 수 없었던 조선에 비교하면 보학이야말로 일제 때 가장 강력하게 탄압받은 학문분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중화사상이 모든 학문의 바탕이 되는 중국은 보학연구가 대단히 활발하다. 중국의 성씨 중에 총씨(叢氏)가 있는데, 이들을 연구하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은 씨(氏)보다 성(姓)이란 표현을 더 많이 쓰는데, 총성(叢姓)의 시조를 흉노왕족 김일제(金日磾)로 모시기 때문이다. 총성은 중국 북방에 주로 거주하는데 그 숫자는 약 41만여 명으로 중국에서 233번째로 많은 성씨다. 중국의 성씨 연구자들에 따르면 총성의 연원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를 꼽는데 가장 빠른 것은 이기씨(伊耆氏)의 후예라는 것이다. 《국명기(國名紀)》나 《성씨고략(姓氏考略)》, 《장자(莊子)》 같은 문헌사료에 의하면 요임금 시대에 숭(崇), 지(枝), 서(胥), 오(敖)라는…
◇장남을 죽여버린 김일제 흉노 휴도(저)왕의 태자였던 김일제(金日磾)의 자는 옹숙(翁叔)이었다. 그의 장남은 김농아(金弄兒)였는데, 무제는 농아를 총애해서 항상 곁에 두었다. 농아는 때로 무제의 목을 껴안을 정도로 허물없이 지냈는데, 하루는 이를 본 김일제가 눈으로 꾸짖자 농아가 무제에게 달려가 “옹숙이 화났다”고 울면서 일렀고, 무제는 “왜 내 아이에게 화를 내느냐?”고 김일제를 꾸짖을 정도로 허물이 없었다. 무제의 총애에 고무된 농아는 급기야 무제의 궁녀들을 희롱하기에 이르렀고 김일제는 그 음란함을 미워해 농아를 죽여 버렸다. 이를 안 무제가 크게 화를 내자 김일제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농아를 죽인 상황을 갖추어 말하자 무제는 크게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김일제의 어머니 알씨(閼氏)가 병으로 죽자 무제는 궁중 화가에게 초상화를 그려 감천궁(甘泉宮)에 걸어놓았는데, 그림의 제목이 〈휴도왕알씨(休屠王閼氏)〉였다. 알씨가 김일제와 동생 김윤(金倫)에게 법도를 잘 지키라고 가르쳤고 무제가 이를 훌륭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서》는 무제가 “김일제를 마음으로 존경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김일제 또한 무제를 잘 알았다. 무제의 총애는 재앙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바닷 속에 묻힌 신라 문무왕 신라 제30대 문무대왕(文武王:재위 661~681)은 부왕 태종무열왕의 유업을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달성했다. 또한 옛 백제 및 고구려 강역을 차지하려던 당나라 군사와 나당전쟁(신당전쟁)을 치러서 옛 백제 및 고구려 강역을 신라 강역으로 포함시켰다. 이런 문무왕에 대해서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많다. 그중 하나가 아들 아들인 신문대왕이 부친을 위해 세웠다는 동해 바닷가의 감은사(感恩寺)다. 《삼국유사》 〈만파식적(萬波息笛)〉에 나오는 이야기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이 절을 짓기 시작했는데, 끝마치지 못하고 붕어(崩御)해서 해룡(海龍)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개요(開耀) 2년(682)에 끝마쳤다. 금당 섬돌 아래 동쪽으로 굴을 뚫어 열어두었는데, 용이 절에 들어와서 둘러싸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유조(遺詔:황제의 유언)로써 유골을 간직한 곳의 이름을 대왕암이라고 하고, 절을 감은사라고 했으며, 후에 용이 나타나는 형상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삼국유사》)” 《삼국사기》는 문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서 동해 입구의 큰 바위 위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세속에서 왕이 변해…
…남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여 찬성을 표했다. “자자. 첫 잔은 스트레이트. 첫 잔부터 아이스 샤워를 시키는 것은 우리 로얄 살루트 34세 황제 폐하께 대한 불경죄에 해당합니다. … 청담동에서 김미리가 안내해서 간 호화 빌딩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7층에서 내리자 고급스러운 흑경(黑鏡) 타일로 장식된 외양을 갖춘 업소가 나타났다. 크지 않게 붙어 있는 ‘아프로디테’라는 상호의 디자인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김미리를 따라 들어간 내부의 색다른 인테리어가 윤희를 압도했다. 출입문 안쪽 벽면을 가득 채운 보티첼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이 주황색 조명을 받아 휘황하게 빛났다. 질감 양감이 다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서 제대로 모사한 유화 같았다. “미리 씨 왔어?” 귀부인 태가 나는 양장차림의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미인인 데다가 목걸이 귀걸이에서 호화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여성이었다. “예. 사장님. 안녕하셨어요?” 여사장이라는 부인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색안경 너머로 윤희를 뜨거운 눈길로 찬찬히 훑었다. 김미리가 얼른 양쪽을 번갈아 보며 소개했다. “소개할게요. 여기는 저의 동료 연극배우 김윤희 씨. 그리고 이쪽 분은 이 아프로디테 대표이신 비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