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르치는 거짓의 역사
현재 중·고교학생들이 사용하고 있는 검정 한국사 교과서는 공민왕이 재위 5년(1356) 수복한 영토가 함경남도 지역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공민왕은 고려의 자주성을 강화하기 위해 몽골식 풍습을 폐지하고 관제를 복구하였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고, 원·명의 정세 변화를 틈타 요동지방을 공격하였다(고등학교 한국사, 교학사, 60쪽)”
교학사 한국사교과서는 지도에서 원나라 쌍성총관부가 지금의 함경도 영흥에 있었다고 그려놓고 있다. 교학사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를 폐지한 후 현 정권의 검정을 통과한 모든 한국사교과서가 같다. 공민왕이 수복한 옛 강역이 원나라 쌍성총관부인데, 그곳이 지금의 함경남도라는 것이다. 공민왕의 옛 강역수복전쟁은 재위 5년(1356) 5월 벌어졌는데 이에 대해 《고려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평리 인당(印璫), 동지밀직사사 강중경(姜仲卿)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삼고, 사윤 신순(辛珣)·유홍(兪洪), 전 대호군 최영(崔瑩), 전 부정(副正) 최부개(崔夫介)를 서북면병마부사(副使)로 삼아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하게 하였다(《고려사》 〈공민왕 세가 5년 5월〉)”
공민왕이 서북면병마사 인당·강중경과 부사 최영 등에게 공격하게 한 지역은 “압록강 서쪽 8참”이라는 것이다. 즉 고려군의 출발점이 압록강이었고, 수복할 지역은 압록강 서쪽 8개참이었다는 것이다.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 북상했는데 현재 한국사교과서는 동쪽으로 갔다고 호도하고 있다. 삼척을 강원도라고 쓴 역사학자들이 이번에는 북쪽과 동쪽도 구분하지 못하고 교과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날 전쟁에 나선 고려군은 두 부대였다. 다른 한 부대에 대해 《고려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또 밀직부사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고, 전 대호군 공천보(貢天甫), 전 종부령 김원봉(金元鳳)을 동북면병마부사(副使)로 삼아 쌍성(雙城) 등지를 수복하게 하였다(《고려사》 〈공민왕 세가 5년 5월〉)”
한 군사는 압록강 서쪽 8개참을 공격했고, 또 한 군사는 원나라에서 설치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원나라 쌍성총관부는 화주(和州)에 있었는데, 그 위치에 대해 한국사교과서는 모두 함경남도 영흥이라고 말하고 있다.
◆두만강 북쪽에 있던 원나라 쌍성총관부
원나라는 고종 45년(1258) 고려의 두 민족반역자 조휘와 탁청이 두만강 북쪽 땅을 들어 바치자 이 지역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했다. 이에 대해서 《고려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定州) 사람 탁청(卓靑)이 화주(和州) 이북 지방을 들어서 몽골에 붙었다. 몽골이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쌍성총관부의 총관(摠管)으로,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았다(《고려사》 〈고종 45년 12월〉)”
조휘와 탁청이 고종 45년(1258) 화주 북쪽의 땅을 몽골에 바치자 몽골이 이 지역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 탁청을 쌍성총관부 천호로 삼았다는 것이다. 공민왕이 북강수복전쟁에 나선 것은 바로 이 땅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공민왕은 쌍성총관부 설치 만 98년 후인 재위 5년(1356) 인당·강중경은 압록강을 건너게 하고, 유인우는 두만강을 건너 옛 땅을 되찾게 한 것이다. 동북면병마사 유인우가 되찾으려던 땅을 두만강 북쪽에 있던 고려의 옛 동계(東界)지역이었다. 《고려사》 〈지리지〉는 동계에 대해서 “비록 연혁과 명칭은 같지 않지만 고려 초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 이남에서 삼척 이북을 통틀어 동계라고 일컫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공험은 윤관이 예종 3년(1108) 2월 여진족을 구축하고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은 공험진 선춘령을 말하는데,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에 있다.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부터 강원도 삼척까지가 고려의 동계였다. 이중 두만강 북쪽 땅을 고종 45년(1258)조휘·탁청이 원나라에게 바치면서 98년 동안 원나라가 차지했던 것을 공민왕이 되찾은 것이었다. 이 쌍성이 함경남도 영흥이라고 한국사교과서는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원나라 정사인 《원사(元史)》는 달리 말하고 있다.
◆요동에 있었다는 쌍성과 화주
쌍성이 직접 언급된 사료는 《원사(元史)》 〈식화지(食貨志)〉다 여기에 금은(金銀) 등의 세금을 걷는 과세(課歲) 항목이 있는데, 금을 세금으로 바치는 지역 중에 요동의 쌍성이 있다.
“처음 금을 과세하는 것은 (원나라) 세조 때 일어났다. 익도(益都:산동성 청주)는 지원(至元) 5년(1268) 종강(從剛)과 고흥종(高興宗)에게 명해서 호적에서 빠진 민호 4천으로 등주(登州) 서하현(棲霞縣)에서 도금하게 했다. 지원 15년(1278)에는 또 도금호(淘金戶:금을 도금하는 호) 2천 첨군(簽軍)을 익도와 치래(淄萊) 등의 로(路:원나라 행정단위)에 붙이고 예전에 의거해서 도금하게 해서 그 세금을 태부감(太府監)에 수송해 납부하게 했다. 요양(遼陽)에는 지원 10년(1273), 이덕인(李德仁)의 청을 들어서 용산현(龍山縣) 호벽골[胡碧峪]에서 채금하게 했는데, 매해 금 3량을 납부하게 했다. 13년(1276)에는 요동의 쌍성 및 화주 등처에서도 금을 캐게 했다(《원사》 〈식화지〉 2 세과(歲課))”
원나라의 정사인 《원사》 〈식화지〉에 “요동의 쌍성 및 화주 등처에서도 금을 캐게 했다[遼東雙城及和州等處採焉]”고 기록하고 있다. 쌍성이 함경도가 아니라 요동에 있다는 것이다. 화주는 쌍성총관부를 다스리는 관서가 있던 곳이다. 공민왕은 두만강 북쪽에 원나라가 설치한 쌍성총관부가 원래 고려땅이기 때문에 재위 5년(1356) 인당·강중경에게는 압록강 북쪽의 옛 고려 강역을 수복하게 하고, 유인우에게는 두만강 북쪽의 옛 고려 강역을 수복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같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고려는 반도도 차지하지 못했다면서 요동에 있던 쌍성을 함경남도 영흥으로 옮겨놓은 것인데, “우리는 뇌가 없으므로 무조건 일본인 스승님들의 말씀을 따른다”는 신조를 가진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이 지금까지 한국사교과서를 거짓말로 써놓고 학생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사료가 말하는 고려 북방강역
명나라에서 설치한 철령위를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함경도 안변이라고 우기지만 명나라 정사인
《명사》 〈오행지(五行志)〉만 봐도 이는 거짓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명사》 〈오행지〉는 명나라에서 발생한 큰 화재에 대해서 적고 있는데, 철령위에서 발생한 큰 불도 적고 있다. “홍치(弘治) 16년(1503) 3월 경오(庚午)에 요동 철령위에 북두성같은 불이 떨어졌다. 병자일에 불이 일어나서 방옥(房屋) 2500여 칸을 태웠고, 죽은 자가 100여인이었다.”
《명사》는 ‘요동 철령위’라고 써서 철령위가 요동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철령위가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시대 학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의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를 이끌고 왔던 이여송(李如松)에 대해서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사람이다”라고 말했고 명나라 장수 조여매(趙如梅)에 대해서도 “호는 초암(肖菴)인데 요동 철령위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철령위가 요동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국은 물론 중국의 사료가 말하는 고려 북방 강역은 심양 남쪽의 철령부터 두만강 북쪽 700리의 공험진까지였다. 한국과 중국의 모든 사료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광복 75년이 넘은 지금도 한국사교과서는 고려 강역이 함경남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호도하고 있다. 사료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광복 75년이 넘도록 득세하고 있는 곳이 한국 역사학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