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7 (금)

  • 구름많음동두천 22.4℃
  • 구름많음강릉 23.7℃
  • 맑음서울 24.0℃
  • 구름많음대전 24.7℃
  • 구름많음대구 23.5℃
  • 구름조금울산 24.7℃
  • 구름많음광주 25.8℃
  • 구름조금부산 27.9℃
  • 구름조금고창 26.8℃
  • 구름조금제주 27.7℃
  • 구름조금강화 23.1℃
  • 구름많음보은 23.4℃
  • 구름많음금산 24.8℃
  • 구름많음강진군 25.9℃
  • 구름많음경주시 24.7℃
  • 맑음거제 25.1℃
기상청 제공

[줌人] 강장봉 수원시의회 의장

글ㅣ김장선기자 kjs76@kgnews.co.kr
사진ㅣ노경신기자 mono316@kgnews.co.kr

“나는 공장직공, 교정공무원, 중개사 출신 생활정치인”

 

 

“전 스스로 정치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저 지역에서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제9대 수원시의회 개원과 함께 열린 의장단 선거에서 30표라는 압도적 차이로 당선된 강장봉(60) 수원시의회 의장은 중년의 잔잔함이 배어 나오는 ‘생활 정치인’ 자체였다.

청소년 시절 혹독한 가난과 청년 시절 병마로 인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연고도 없는 수원지역에 출마해 2번의 쓴 잔을 마시면서도 치열한 도전정신으로 역경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이뤄나간 그이기에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겠다’는 강 의장의 각오는 진정성으로 다가온다.

“수원 시민들에게 받은 사랑을 평생 갚아나가겠다”고 다짐하는 강 의장을 수원시청 3층 의회 의장실에서 만나 어려웠던 젊은 시절과 정치에 입문하기까지의 과정, 의장으로서의 각오 등에 대해 들어봤다.

고통과 질곡의 세월을 이겨 낸 도전정신

전남 신안군 압해면의 작은 섬 매화도에서 태어난 강 의장은 박 씨의 집성촌인 매화도에서 가문의 혈통을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할머니의 영향으로 목포에 나가 두 집 생활을 했던 아버지로 인해 학창 시절, 정신적·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 의장은 목포 제일중학교를 거쳐 당시 명문이었던 목포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등 공부에 대한 집념이 남달리 강했다. 그의 첫번째 꿈은 훌륭한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목포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유도 육군사관학교에 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첫번째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육사 응시 신체검사 결과에서 색맹(色盲)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좌절을 맛본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친구와 함께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마포에 사는 둘째 누나의 집에 머물면서 기술을 익혀 성공하기 위해 철 캐비넷 공장, 프레스 공장 등에서 몸 생각도 않은 채 열심히 일했다. 이로 인해 결국 그는 ‘폐결핵’이라는 병을 얻는 고비를 맞게 된다.

그는 “‘폐결핵 말기’로 한산촌 결핵 요양원에 입원하고, 매화도에 내려가 투병생활을 할 정도로 폐결핵은 나를 무려 7여년(1969~1975년)간 괴롭했다”고 회고했다. 병세가 회복될 시기, 그는 목포에 사는 이종사촌에 권유로 교도소 재소자들을 관리하는 법무부 소속 교정직 공무원 시험을 보게 되고, 합격와 함께 춘천교도소로 발령이 난다.

하지만 춘천교도소와 영등포구치소를 거치는 등 6년간 교도관 생활을 한 그에게 또 다시 고난이 찾아온다. 당시 언론에서 병의 경각심을 폭발적으로 보도했던 ‘만성 B형 간염’과 ‘간경화’가 겹친 것. 이로 인해 그는 공직생활을 접게 된다. 공무원 생활을 그만 둔 강 의장은 지인과 함께 부천 중동의 아파트 앞에서 부동산업을 개업하게 된다. 이후 1986년, 수원 천천동 주공아파트에 새 둥지를 튼 그는 ‘주공부동산’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부동산업에 뛰어든다.

그는 “당시 개발붐으로 아파트 가격은 자고 나면 오를 정도로 시세가 달라져 중간 소개하는 부동산이 곤란해지는 일이 많았다”며 “이에 돈이 부족할 경우 조건 없이 계약금, 중도금을 대체해 주는 방식으로 고객 확보에 주력한 결과, 입소문이 퍼져 사업이 계속 발전해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타지에 나와 생활하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율천동 향우회장과 천천 발전협의회 부회장을 지내면서 수원에 대한 애정을 키워갔다. 그러던 중 1995년 통일민주당 장안구 지구당 인사로부터 시의원에 출마해 보라는 권유를 받게 되면서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수원에 연고가 없었던 그는 믿고 의지할 곳은 향우회 뿐이였지만, 수원의 정서는 호남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95년과 98년 율천동 지역 시의원에 출마했지만, 모두 실패를 경험해야만 했다. 당시 아내는 ‘사람들 만나기가 두렵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2002년 세 번의 출마를 결정하고 선관위에 등록했다. 그리고 7년 만, 세번의 도전 끝에 시의원에 당선됐다. 강 의장은 “아내를 끌어안으며, 그토록 바라온 수원시의원의 당선을 가슴으로 느꼈다. 그동안 살아온 숱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며 “다음날 아침 선거관리위원회 당선증을 받는 순간에도 믿어지지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2002년 당선 이후 현재 시의원을 3선째 하고 있다.

시민을 섬기는 수원시의회가 될 터

수원시의회는 전국기초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34명의 의원으로 구성돼 있으며, 제9대 시의회는 민주당 17석, 한나라당 16석, 민주노동당 1석으로 어느 특정정당도 의회를 독점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 의장은 압도한 표차로 의장직에 선출됐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대화와 타협, 소통을 중시하라는 110만 시민의 뜻”이라며 “원활한 의정활동을 위해 당리당략과 지역간 이해관계 등을 떠나 시민의 복리증진과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최근 가장 큰 이슈인 학교급식 문제에서도 시의회는 지난 10월 임시회에서 민주당과 한나라당 의원의 협의를 통해 무상급식 관련 조례와 사업비 17억원을 통과시켰으며, 10월부터 초등학교 5~6학년 2만7천763명을 대상으로 시범적으로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 지난 11월 말 실시된 집행부에 대한 행정사무감사에서도 시정 389건, 대안제시 88건을 요구했으며,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수원시 저소득층 아동 지원조례’ 등 66건의 조례제정 및 개정, 6명의 의원이 시정질문을 하는 등 입법의회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이와 함께 ‘수원시의회 조례연구포럼’ 등 5개 의원연구단체를 구성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도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강장봉 의장을 비롯해 수원시의회 의원 간 대화와 타협,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강 의장은 시의회가 집행부 청사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의원의 활동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민원상담이나 연구활동 등 의정활동을 하는데 불편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시 재정여건 상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을 감안, 차선책으로 집행부와의 협의를 통해 집행부 사무실의 일부를 확보해 의원활동 공간을 넓히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한다. 집행부와의 소통에도 힘쓰고 있다는 것이다.

“선출직은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성원해 줄 때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의 기대와 욕구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시의회를 질타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 의장이 수원시민들에게 바라는 점이다.

‘깨끗하게 하자’, ‘열심히 하자’, ‘화합하자’라는 3가지 목표를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하고 의정활동을 펼친다는 강 의장의 각오가 앞으로 9대 수원시의회의 발전에 큰 힘이 되리라 믿는다.

강장봉 의원은…

△목포고등학교 졸업

△법무부교정직 공무원 역임

△(전)수원시의회 7,8대의원

△(전)서수원 신협 수석감사

△(전)수원시의회 비행장대책특별위원회 위원

△(전)수원시의회 광교산보존대책특별위원회 위원

△(전)수원시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현)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장안구지회장

△(현)민주당장안구지역협의회 수석부위원장

△(현)수원시의회 의장

■수상경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의장 대통령표창(2007.12)

■저서

△자전에세이 “바다는 나에게 쉬지 말고 가라하네”(2010.1)

 







배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