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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詩산책]벽지가 벗겨진 벽은

벽지가 벗겨진 벽은 찰과상을 입었다고

할까 여러 번 세입자가 바뀌면서 군데군데

못자국이 나고 신문지에 얻어맞은 모기의

핏자국이 가까스로 눈에 띄는 벽, 벽은 제

상처를 보여주지만 제가 가린 것은 완강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못자국 핏자국은

제가 숨긴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치열한

알리바이다 입술과 볼때기가 뒤틀리고 눈알이

까뒤벼져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피의자처럼

벽은 노란 알전구의 강한 빛을 견디면서,

여름 장마에 등창이 난 환자처럼 꺼뭇한 화농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은 싱크대 프라이팬 근처

찌든 간장냄새와 기름때 머금고 침묵하는 벽,

아무도 철근 콘크리트의 내벽을 기억하지 않는다

-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 2003년 / 문학과 지성사



 

 

 

벽에 거는 것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늘 걸어두고 볼 수 있는 것들 속의 상처는 고스란히 얼룩으로 남는다. 입을 열지 못할만큼의 아픈 상처는 내부에 남아 있다. 치유할 수 없는 상처는 벽지의 표면에 얼룩으로 남아 있지만, 찌든 기름때처럼 벗겨지지 않는 법이다. 태울듯이 켜져 있는 알전구 아래서 침묵하는 벽, 빛을 견디는 상처가 힘이 되는 날, 그 ‘아무도’들은 내벽을 기억할 것이다. 상처의 알리바이를. /권오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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