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윤희 학생 맞으시죠?” 다세대주택 골목 입구 계단에 앉아 있던 30대 초반 가량으로 보이는 남자가 벌떡 일어나 다가오며 말을 걸어왔다. 백육십 센티미터를 겨우 넘길까 말까 한 작은 키의 남자는 흰색 와이셔츠, 노타이에 짙은 잿빛 양복 차림이었다. 남자의 어깨엔 커다란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윤희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검은 뿔테 안경……. 순간적으로 아프리카 박천수 사장이 떠올랐다. 윤희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뒤로 물러섰다. “네. 그런데… 누구시죠?” “저는 동천신문 백종원 기자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제보를 받고 취재를 하러 왔습니다. 곧바로 물어볼게요. 카페 아프리카에서 알바 일을 하셨지요?” “…예?” 이를 어째야 하나, 판단이 곧바로 서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온몸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박천수 사장에게 당하신 것 맞나요?” 하늘이 노래지는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지고 있었다. 백종원 기자라는 사람의 몸이 부풀어 오르더니 갑자기 커다란 코뿔소로 변했다. 그의 코에 걸린 커다란 검은 뿔테 안경이 무지막지한…
불꽃 /이정모 수 천 마리의 나비 떼 줄지어 날아오르다가 내려앉았다가 다시 날아오른다 봄을 알고 싶어 스스로 꽃도 되고 사랑을 느끼고 싶어 혼자 붉은 입술도 되어보다가 그러다가 끝내 꽃 지고 사랑은 떠났을 터, 그러나 슬픔이여! 그게 어디냐고 되뇌지 말고 다만, 불씨로 건드려만 봐라 지금은 어떤지 몸짓으로 보여 주겠다 ■ 이정모 1950년 강원도 춘천 출생, 2007년 ‘심상’으로 등단, 부산작가회의, 한국문협회원, 시집 ‘허공의 신발’ 외 2권. 상재, 땅끝 백련재문학의 집에서 창작을 하고 있다.
낙화 /허진아 의사가 나가자 남자가 소리친다 등산하고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는 게 낙인데 술을 끊으라니 살아도 죽은 목숨이라고 살아도 죽은 목숨의 남자가 있다 참척의 유골함을 가슴에 안고 허깨비로 사는 아버지가 있다 낙이 없어 목숨을 끊은 4월의 아버지가 있다 ■ 허진아 1958년 광주출생. 2010년 ‘유심’으로 등단. 시집 ‘피의 현상학’
대작對酌 /이동재 혼자 마시기 아까워 매화나무에 먼저 한 잔 줬다 얼마 후 매화가 좌우로 흔들리면서 폈다 혼자 마시기 미안해 살구나무에도 또 한 잔 뿌렸다 다시 얼마 후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혼자 마시기 영 거시기 해 개 밥그릇에도 한 잔 가득 따라줬다 밥그릇을 핥자마자 아무나 보고 짖었다 이 모든 걸 기우뚱한 반달이 보고 있었다 ■ 이동재 1965년 강화 교동도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 및 국문과 대학원 졸업. 시집으로 ‘주 다는 남자’ 외 다수의 시집과 소설집 및 저서가 있다. 현재 터키의 에르지예스대학 한국어문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산벚나무 이별 방식 /하두자 꽃자루를 다 털어내고 하루 사이 폭삭 늙었습니다 반쯤은 햇살 반쯤은 그늘 꽃잎과 입술을 새겨놓고 멀리 달아납니다 꽃내를 머금은 일요일이 떠나갑니다 잃어버린 말 잊어버린 이름은 서둘러 지우고 당신의 시간에 나를 포갭니다 떠나온 어제와 떠나갈 내일 사이 젖은 꽃잎을 따라 나는 하염없이 젖습니다 하염없다는 말 나는 익숙한데 당신은 낯설다고 합니다 나는 마지막이라서 머뭇거리는데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을 말합니다 슬슬 제 몸을 불리던 먹구름 점점 속도를 냅니다 떨어지는 꽃잎이 발등을 덮는 동안 당신은 말이 없고 나는 수다스러워집니다 우리는 끝없이 산벗나무 아래로 귀결되는 중입니다 ■ 하두자 1953년 부산 출생. ‘심상’으로 등단. 시집에 ‘물수제비 뜨는 호수’, ‘물의 집에 들다’, ‘불안에게 들키다’, ‘사과는 둥글고 악수는 어색하게’. 리토피아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