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 안도현 시집 ‘북항’/2012년/문학동네
안도현 시인이 출간한 시집 <북항>에 실린 시 <일기>는 지난 2011년 최고의 시로 신정된 바 있다. 도서출판 작가가 120명의 시인, 문학평론가, 출판편집인에게 지난해 가장 좋은 시를 추천받은 결과, 이 시가 선정된 것이다. <일기> 속에 나와 있는 내용들, ‘국화 꽃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든지,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냈다, 어떤 의원이 감나무를 고쳐주러 왔는데 그늘의 수리를 부탁했다’에는 고단한 현실을 시로 승화해 보려는 시인의 정신이 엿보인다. 이번 시집은 한 편 한 편의 시가 저마다 시론으로 읽히기도 하거니와 더욱 깊어져서 안도현 시인의 새로운 시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안도현 시인은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출간했고,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박병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