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퉁이 하나 돌 때마다
앞에서 확 덮치거나 뒤에서 사정없이 밀쳐버리는 것
살랑살랑 어루만지다 온몸 미친 듯 흔들어대다
벼랑 끝으로 단숨에 떨어져 버리는 것
안을 수 없는 것
저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것
언제 어디서 기다려야 할 지 기약할 수조차 없는 것
집도 절도 없이 애비 에미도 없이 광대무변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허공에 삽질을 하는,
영원히 펄럭거릴 것만 같은 무심한 도포자락
영겁을 쓰고도 한 자도 새기지 않은 길고긴 두루마리
몽땅 휩쓸고 지나가고도 흔적 없는
저 헛것, 나는 늘 그의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는다
- 김해자 시집 ‘축제’ /2007년/애지
우리 영혼의 영토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딱딱한 기계들의 속도와 문명의 야만은 지친 영혼들을 갉아먹고 있다. 우리가 발을 담그는 강물은 더 이상 깨끗하지 않다. 영혼의 강물도 오염돼 가고 있다. 그래서 강물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바람의 말을 잘 듣지 못한다. 우리의 귀는 닫혀 있고 눈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바람의 경전을 한 페이지만이라도 제대로 듣고 읽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위태로운 시간은 임시거처인 공간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람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바람의 소리를 단 한 줄이라도 받아 적을 수 있다면 우리 영혼의 영토는 한 뼘이라도 넓어질 것이다. /이설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