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불이 꺼진 성북동 월세방, 어디에도 연락이 닿지 않고 유리문을 두드리는 동지 바람 소리가 요란하다 학력도 없는 형은 친구에게 빌려 온 세계문고판 쿠오바디스를 겉장부터 찢어가며 ‘무소식이 희소식이여’ 태평하게 딱지를 접는다 녹슨 주인집 철 대문을 돌멩이로 괴어 놓고 골목 끝까지 갔다 몇 번씩 돌아오는 사이 차박차박 달빛이 차오른다. 삼일째 가출 중인 아우를 기다린다. 그늘진 곳에서 뚜껑이 닫힌 항아리 속, 삭힌 고추맛과 청강과 생강물이 배어드는 장물, 아직도 장맛이 너무 싱거워 장맛은 염도가 좌우한다며 내 生의 중심부에 한 주먹 소금을 풀어 준다 두터운 몸속으로 차갑게 배어드는 간기 자연 숙성이 될 때까지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성북동 언덕배기 그 집
-박소원 시집 ‘슬픔만큼 따뜻한 기억이 있을까’/2010년/문학의 전당
얼마나 기다려야 자연 숙성이 될까? 詩도 동치미도 삶도 사랑도 기타 등 등 모든 것들이 자연 숙성이 최고인데 눈앞의 현실은 녹녹하지가 않다. 너를 위해서, 네가 더 없이 소중하니까, 나의 삶이 유한하니까 기타 등, 등의 이유를 들어 너무 많은 말들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부질없는 수고를 하느라 힘을 빼고 그늘 쪽으로 목만 길어졌다. 그런데 왜 그걸 지금 알았을까? “내 生의 중심부에 한 주먹 소금을 풀어” 주는 상처는 상대가 나한테 주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스스로 받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입은 닫고 문은 활짝 열어놓고 저쪽에서 나를 부를 때까지 그냥 기다려 볼 때이다. 그래도 심심하면 오락가락 하는 구름이나 구경하면서 포물선을 그리며 앵그리버드하고나 놀아야겠다.
/박홍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