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는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어요
나는 책상에 강물을 올려놓고 그저 펼쳐볼 뿐이에요
내 거처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일 뿐
나는 어스름한 빛에 얼룩진 짧은 저녁을 좋아하고
책모서리에 닿는 작은 바스락거림을 사랑하지요
예언적인 강풍이 창을 때리는 겨울엔
그 반향으로 페이지가 몇 장 넘어가지만
나는 벽에 부딪혀 텅 빈 방안을 울리는 메아리의 말과
창밖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식사를 하고
매일 새롭게 달라지는 거처를 순간 속에 마련할 뿐
죽음이 뻔뻔하게 자신의 얼굴을 하나하나 벗기면서
안을 드러내는 밤중엔
여유롭게 횡단하지요, 나는 어둔 책 속에 발을 담그지 않아요
그저 책상에 흐르는 강물 끝에 손을 적실 수 있을 뿐
책상에 넘치는 강물 위로,
검은 눈의 처녀가 걸어 나오는 시각엔
바람의 냄새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고 대양을 꿈꾸지요
시인은 책상에 강물을 올려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냥 강물을 펼쳐서 볼 뿐, 그러다가 간신히 손을 적셔볼 뿐, 발을 담그거나 몸을 모두 담그지는 않는다. 강물과 자신 사이에 다른 존재들이 흘러가게 둔다. 시인의 거처는 ‘예언적인 강풍’이 때리는 창이 있는 ‘텅 빈 방안’이 아니다. 그런 물질적이고 정지된 ‘방’이 아니라 움직이는 ‘순간’이 바로 시인의 거처이다. 시인은 ‘매일 새롭게 달라지는 거처를 순간 속에 마련’할 뿐이다. 그래서 시인의 방은 ‘순간’을 붙잡아 두는 장소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순간’은 붙잡을 수 없기에 불안하고 불온하다. 그 순간의 말들을 찾아서 시인은 오늘도 책상 위에 넘치는 강물을 올려놓는다. /이설야 시인
- 박형준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2011년/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