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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60주년 특별기획 전쟁과 인간, 그리고

18세에 가족과 함께 월남
전쟁 두해 전 조선경비대 입대
지리산·태백산 공비토벌 참가
갑작스런 남침… 인민군에 밀려
미아리서 안강지구까지 후퇴
최후 방어선서 포탄에 의식 잃어

 

6·25가 발발하기 두해 전 ‘조선경비대(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해 공비들과 전투를 벌여온 이상찬 옹(85)에게도 6·25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 날의 서울 분위기는 전쟁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쟁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전혀 무관한 사람에게 벼락처럼 찾아오는 것이다. 미처 피할틈도 주지않고. 흡사 이 옹에게 찾아온 그 날처럼.

▲ 조선경비대 입대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이상찬 옹은 1947년, 상공학교를 졸업한 18세에 가족과 함께 전라북도 이리(현 익산)로 월남했다.

이리에는 앞서 월남한 맏형이 터를 잡아두고 있었지만 늘어난 식구가 먹고 살기에 타향에서 꾸린 살림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듬해인 1948년, 일거리를 찾아 나선 읍내에서 이 옹은 입대를 홍보하는 군인들과 마주했다.

“요새 대학교에서 써클에 가입하라고 홍보를 하는 것과 비슷해요. 그때는 조선경비대라고 당시의 국군들이 읍내를 돌면서 반공을 외치며 모병을 했습니다.”

가족들 밥상에서 입을 하나 줄일 수 있겠다는 계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공산주의에 반대해 일가가 월남을 한 그였기에 ‘반공’이라는 단어는 의미가 컸다.

그해 8월, 이리를 거점으로 하는 조선경비대 3연대에 이등병으로 입대한 이 옹은 정식 훈련을 받고 1949년부터 지리산과 태백산 일대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한다.

이후 조선경비대는 육군으로 개편됐고 1950년 6월, 이 옹이 속한 부대는 휴식과 부대정비를 위해 서울 서빙고에 주둔했다.

▲ 6·25 발발과 서울 함락

“한때 6·25가 ‘남한이 북침을 한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는 말도 안되는 소립니다. 6월 들어 군 내부가 인사이동과 진지교대로 소란했어요. 또 육군회관이 리모델링되면서 고위 장교들이 술먹고 댄스파티를 하는 상황이니 국군은 전쟁이라는건 생각도 못했다고 봐야지요.” 이 옹은 이야기에 앞서 이 점을 강조했다.

6월 25일. 한창 잠에 취해 있는 내무반에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연병장에 가득 찬 트럭과 떠밀 듯 병사들을 트럭에 실어넣는 간부들의 표정에서 이 옹은 훈련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대는 인민군보다 한발 앞서 동두천 야산 도착했지만 북한이 소련에서 지원받은 T-34탱크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당시 방어군에는 57㎜ 박격포가 전부였다.

“박격포가 효과가 없으니 육탄전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분대 순으로 포탄을 지급받았지요. 탱크 몸체에는 피해를 줄 수 없으니 캐터필러(caterpillar : 전차 등에 사용되는 벨트 형태의 바퀴)를 부숴야 했지만 탱크 정면이나 밑으로 달려드는 게 한계였어요.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두 세 명도 안됐습니다.”

피해가 커지자 부대는 동두천을 포기했다. 의정부와 미아리에서 재차 방어전을 벌였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부대 지휘부가 철수하는 동안 헌병대는 전선이탈을 저지하며 아군에게 총구를 겨눴다.

“자유주의 국가에 독전대(督戰隊 : 전투를 할 때 자기 쪽의 군사를 감시·감독·격려하던 부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믿기 힘들지만, 독전이 필요할 만큼 아군의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적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전이 실패하고 패잔병이 된 이 옹과 생존자들은 서울을 가로질러 가까스로 마포 야산에 도착했으나 한강인도교는 이미 끊어진 뒤였다.

“한강에 하나뿐이던 다리가 끊어졌으니 배를 찾았어요. 마침 마지막 나룻배가 막 떠나는 참이길래 같이가자고 불렀더니 뱃머리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거 못타면 죽겠구나’하는 생각에 그만 위협사격을 해버렸지요.”

살기 위해서였지만 아직도 죄스러운 일이라면서 이 옹은 “그런 과오도 나의 전쟁의 한 부분으로 인정한다”고 무겁게 말을 이었다.

▲ 한강방어전. 후퇴의 길목

시흥에 도착한 이 옹은 곧 한강방어전에 투입됐다.

당시 인민군은 전력이 월등한 탓도 있었지만, 서울을 점령한 후 사기가 오른데다 병사의 숙련도도 높았다고 이 옹은 기억했다.

“보통 처음 몇 발은 조준점을 정하기 위한 예비사격이란 말이지. 그런데 두어발이면 부대 옆구리까지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어요. 작정하고 전쟁을 준비했으니 그만큼 훈련도 많이 했을 테지요.”

북한군 공세에 부대는 괴산, 보은, 영동지구를 거쳐 안강지구까지 후퇴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호주 등 참전국 군대가 국군에 오인 사격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서울이 이미 인민군에 넘어간 상태니까, 한강 이북은 무조건 공격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텐데, 동맹군 조종사들이 금강과 한강을 구분 못하고 공격을 해오니 눈 앞에서 우군 사격에 죽어가는 동료들을 지켜봐야 하는 비극을 겪게 됐다”고 이 옹은 설명했다.

전쟁 초 연이은 패배로 군 기강도 많이 해이해져가고 있었다.

“총살에 처한 아군 병사가 있기에 담당자에게 원인을 물으니 부녀자를 강간해서 즉결처분을 받는 것이라더군요. 전쟁 초에는 중대장까지도 즉결처분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명령 불이행이나 부대 이탈자들이 즉결처분으로 총살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사이 미군과 UN군들도 많은 희생을 치렀다. 아직 어려보이던 미군 운전병의 주검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국만리에서 죽은 젊은 목숨도 그렇지만, 그렇게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 마음은 또 어땠을까 생각하니 ‘이대로 져서는 안 되겠다’ 싶어 지더라구요. 참전국 군인들한테 용기도 참 많이 얻었어요.”

본대를 찾아 안강지구에 다다르는 동안 겪은 일들은 이 옹의 기억에 전투 이상으로 강하게 남아 있었다.

 

 


▲ 최후의 방어선

1950년 8월. 안강지구는 부산까지 후퇴한 대한민국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여전히 인민군의 곡사포는 위협적이었다. 국군의 결사항전으로 전선은 더 이상 남으로 내려오지 않았지만 북으로 올라가지도 못했다.

전투에 대해 이 옹은 “실제 전투가 시작되면 말단 병사들은 상황이란 것을 가늠할 수가 없다”고 답했다.

“무전으로 내려오는 지휘관의 명령과 죽기 싫다는 악에 바친 감정 외에는 혼전 속에 생각나는 것이 있겠냐”고 이 옹은 반문했다.

이 곳에서 이 옹은 굉음과 함께 날아든 포탄에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린 곳은 부산의 제5육군병원이었다. 폭발에 휘감긴 다리는 다행히 제 자리에 있었다. 10월 5일까지 한 달여 기간동안 치료를 받은 이 옹은 상이용사로서 ‘화랑무공훈장’을 수여 받고 2등상사(현 중사)로 특진했다.

그 사이 병원 사람들에게 아군이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진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 그 후의 삶

이 옹은 괴멸 후 재창설된 대구 5사단으로 배속되면서 북진했다. 5사단은 ‘피의 능선 전투’와 ‘가칠봉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사단본부 수색부대에 배치된 이 옹은 최전선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이 후엔 더 고생한 사람이 많으니 내 이야기는 이쯤이면 될 것입니다”라며 이 옹은 더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잇지 않았다.

비록 격전지에서 한발 물러난 상태로 휴전을 맞이했지만, 이 옹은 후에도 40여년을 군계통에서 근무했다.

1991년 퇴임 후에는 과천시에서 6·25참전유공자들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지난해 여인국 과천시장의 도움으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6·25 참전유공자들을 비롯한 과천시 국가보훈대상자들이 바우처카드 형태로 의료비 지원을 받게 된데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활동한 이 옹의 노력이 컸다.

“앞으로 5년이 지나면 6·25 참전 유공자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의문”이라는 이 옹은, 이 때문인지 나이가 들수록 더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군시절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직접 교재를 만들어 과천시내 초·중학교를 찾아 ‘6·25 바로 알리기 교육’도 진행한다.

인터뷰를 마친 이 옹은 옷을 갖춰 입고 보훈회관 앞에 마련된 ‘과천 6·25참전 기념비’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함께 묵념을 해 줄 것을 정중히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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