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1 (일)

  • 흐림동두천 21.6℃
  • 흐림강릉 28.5℃
  • 서울 22.6℃
  • 맑음대전 25.2℃
  • 대구 27.7℃
  • 구름많음울산 27.6℃
  • 광주 24.1℃
  • 흐림부산 27.0℃
  • 흐림고창 25.8℃
  • 구름많음제주 30.0℃
  • 흐림강화 21.7℃
  • 맑음보은 24.5℃
  • 구름많음금산 25.9℃
  • 흐림강진군 24.9℃
  • 구름많음경주시 29.6℃
  • 구름많음거제 27.2℃
기상청 제공

나라 위해 젊음 바쳤던 학도병 남은 것은 몸속의 수류탄 파편

정전 60주년 특별기획
나의전쟁 ⑤ 이 광 우 옹
전쟁과 인간, 그리고

 

홀로 부모님 모시다 학도병 징집

 

첫 전투에선 한 발도 못 쏴

 

정식 배치 후 한자로 이름 적었더니
전투 투입 대신 일지 작성 업무
전우 죽음 소식에 갑종장교 지원

8사단 소대장으로 854고지 부임
부대원 사기 높이려 선두 지휘
전쟁 공포 소대원 요지부동 ‘애먹어’

열세 ‘방망이고지’ 경계 서던 중
잠시 호를 나온 사이 폭격에 매몰
중공군과 육탄전… 가까스로 탈출

지형능선 야간작전 중 수류탄 폭발
목숨 건졌지만 뇌 일부 제거
파편 일부 거뭇거뭇 남아

뇌수술 후유증으로 요양생활
수개월 후 보란듯이 건강 되찾아




사무실에는 서예작품이 여러 점 걸려 있었다. 때때로 6·25의 기억을 시조형식을 빌어 쏟아내기도 한다. 지회 회원들이 매년 6월 25일이면 부르는 ‘참전자의 애화’ 역시 직접 작사한 곡이다.

그러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불쑥 “머리가 반이 비었다”는 말이 말문을 막았다. 걷어 올린 팔 곳곳에는 수류탄 파편 조각들이 거뭇거뭇 존재를 드러내고 있어, “어려서 공부만 제대로 했으면 큰 사람이 됐을 거다”라는 이광우 옹(82·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구리시 지회장)의 말을 우스게로 받아 넘길 수 없었다.

 


‘승산없는 남북전쟁 육이오라 불렀었네/소년흥안 젊은혈기 나라위해 바쳤건만/조국이여 이노병을 용사라고 불러주오/통일못한 참전용사 위로받기 원합니다//훈장없는 노병들을 참전자라 불러주니/남북통일 못다한죄 안가슴에 묻으노니/조국이여 이노병을 유공자라 불러주오/나라위해 싸운이몸 위로받기 원합니다//일평생을 살아온길 후손에게 부끄럽고/이름없이 빛도없이 노병들은 가겠노라/조국이여 용사들을 유공자라 불러주면/나라위해 명예롭게 눈을감고 가겠노라.’

(이광우 지음 ‘참전자의 애화’ 全文)

▲ 학도병에서 갑종장교로

이 옹(82)은 1932년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송북리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학자였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을 만큼 곧은 성품이었고 그의 세 형은 항일운동 중 중국으로 피신해 있었다.

1950년 8월, 인민군의 포탄이 대구까지 날아들었을 때, 이 옹은 홀로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다. 낙동강을 넘어온 북한군 제 8사단이 경상북도 신녕의 조림산 부근에서 국군6사단과 대치했다.

“곧바로 학도병으로 징집됐어. 어머니는 곁에 하나 남은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적군이 눈 앞에 당도했으니 결국 입대했지. 1주일 훈련을 받고 화양다리 밑에서 맞지도 않는 미군복과 소총 한자루씩을 지급받았어.”

6사단의 보충병력으로 조림산 전투에 투입된 이 옹은 한발도 쏴보지 못한 채 첫 전투를 마쳤다. 전황도 모른채 총만 받아들고 투입된 전쟁터에서 이 옹은 선임병들 뒤를 따라 뛰는 것 밖에 못했다고 털어놨다.

전투가 끝난 후 이 옹은 정식으로 6사단에 배치됐다. 지휘관은 이름을 적어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그때만 해도 자기 이름을 한글로 쓰는 사람도 드물었는데 내가 아버지께 배운게 있어 한자로 이름을 적어냈더니 나를 중대 교육계로 보내더라구. 그 때부터는 전투에 투입된게 아니라 지도 독도나 전투일지를 쓰는 일을 했어.”

교육계원으로 1년4개월을 보내며 전투일지를 작성하던 이 옹은 죽어가는 전우들의 소식을 접하는 생활에 회의가 들었다. 고민 끝에 이 옹은 51년 12월 25일 갑종장교(20기)에 지원했다.

▲ 854고지

보병학교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고 8사단 10연대 5중대 1소대장으로 인제의 854고지에 부임했다.

진지교대로 1031고지로 이동해 있을 때, 854고지가 적에게 점령당해 이 옹이 속한 대대로 탈환 명령이 하달됐다.

중대장의 공격명령을 받은 이 옹은 보병학교에서 배운대로 소대원들의 사기를 높이고자 앞장서서 고지로 진격했다.

그러나 한명도 뒤따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작전이 변경됐다는 이유였지만 이 옹은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통감했다.

중대장은 공격 방향을 바꾸어 능선을 따라 우회공격을 할 것을 지시했다.

“능선을 따라 늘어서면 적에게 발각 됐을때 피해가 클 것 같아서 소대장 재량으로 분대를 나눴지. 내가 1개 분대를 데리고 능선으로 공격하고 남은 소대원들은 신호에 맞춰 일제히 진격하기로 했어.”

 


재 공격에서 이 옹은 분대원들 뒤에 섰다. 앞서 진격 명령에 아무도 뒤따른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분대원들을 독려하며 고지로 다다갔지만 지근거리에 이르자 또다시 분대원들의 움직임이 무뎌졌다. 보다 못한 이 옹은 “적이 도망간다”고 소리쳤다.

“그제서야 분대원들이 고지를 향해 진격했어. 남은 소대원들도 일제히 고지로 뛰어 오르니 진짜로 적이 도망치고 있었어. 2~3명 정도가 고지를 뛰어 내려가는 걸 봤는데 적의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던 모양이야.”

이 옹은 호 속에 떨어진 불발탄에 놀라 심장마비로 사망한 소대의 첫 사망자 이야기를 하며 전쟁통의 공포 심리가 어떠한지는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했다.

▲ 방망이고지 탈출

52년 9월 말, 갑작스럽게 지리산 공비토벌을 지원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러나 남하하던 부대는 신포리에서 방향을 바꿔 사창리에 당도했다.

“원래 수도사단을 지원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작전이 노출될까 거짓명령이 하달됐던 것”이라고 이 옹은 부연했다.

투입 전, 대대장(한병갑소령)은 소대장들을 소집해 “고지에 도착하면 소대장 참호를 먼저 파라”고 당부하며 해당 지역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 옹이 맡게 된 ‘방망이고지’는 수도고지에서 이어진 봉우리로 적의 고지보다 고도가 낮고 소화기 사거리 내 위치해 있었다. 때문에 호는 좁았고 보급은 물론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이 옹은 진지 투입에 앞서 분대장과 연락병 등 5명의 소대원과 방망이고지를 사전 방문했다.

마중나온 수도사단 소대장은 3일이면 적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곳이라며 고지가 얼마만큼 열세에 놓여있는지 설명했다.

그날 밤. 경계를 서던 이 옹이 변의를 느껴 잠시 호를 나온 사이 적의 포격이 시작됐다.

“바짓가랑이 내 놓고 있다가 꼼짝없이 죽을 상황에 처하니 몸이 굳어버렸는데 조금 전까지 들어가 있던 호가 포격으로 매몰돼 버렸어.”

그 사이 화기분대장이 달려와 탈출을 독촉했다. 이 옹은 살 길을 찾으라고 말하고 상황을 가늠했다. 잠시후 수도사단 분대장이 후방으로 우회한 적에게 고지가 포위됐다는 비보를 전해왔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타난 중공군 3명이 아군의 칼빈소총을 탈취해 총구를 들이댔다.

“입대를 만류하던 어머니 생각부터 이대로 포로가 되면 장교는 고문을 당하거나, 죽거나 다른 길은 없다는 별의 별 생각을 하고나니 탈출 말고는 살길이 없었어.”

중공군 중 한명이 교통로로 들어설 때였다. 좁은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적의 엉덩이를 발로 차고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중공군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한 이 옹은 참호 위로 뛰어올라 산밑으로 내달렸다.

“한참을 달리니 뒤에서 사람이 나무에 걸려 넘어지는 소리가 났어. 적인 줄 알고 위로 올라타 목을 조르려는데 ‘소대장님 저 2분대장입니다’하는 거야. 내가 탈출한 틈에 같이 있던 분대장들도 도망을 친거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이 옹은 생존자를 찾기 위해 고지를 다시 찾았다. 포격에 파묻힌 호에서 수도사단 소대장과 선임하사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함께 있던 향도와 의무병은 질식사 한 후였다.

연락병이던 김본식 일병과 먼저 탈출을 시도했던 화기소대장은 소식을 알 수 없었다.

▲ 지형능선의 어둠 속에서

53년 6월, 지형능선에서 이 옹의 부대는 무명고지에 대한 탈환명령을 받고 야간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야간 전투는 적의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불빛을 향해 지향사격 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양손의 감각만으로 적의 위치에 정확히 총구를 향하는 것은 뜻밖의 어려움이었다.

이 옹은 가늠자와 가늠쇠에 흰 천조각을 달아 조준토록 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효과가 있었는지 총격이 오가면서 적의 총성이 점차 사그라 들었다. 이 옹은 소대를 둘로 나눠 번갈아 가며 약진했다.

어둠 속에서 점점 산과 하늘의 경계선이 가까워 왔고, 고지 위해서 적의 총성이 더 들리지 않게 됐다. 이 옹은 고지 정상으로 뛰어 올랐다.

그러나 주위에는 자신과 연락병 밖에 없었다. 선임하사에게 위임한 2개 분대도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 때, 어둠 속에서 수류탄이 날아왔다. 위치를 확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류탄이 공중 폭발했다.

춘천야전병원으로 옮겨진 이 옹은 뇌수술을 받았다.

목숨은 건졌지만 뇌 일부를 제거해야 했다. 몸에 박힌 수류탄 파편의 일부는 제거되지 못하고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 후의 이야기

54년, 사단에서 조교생활을 하던 중 훈련병들에게 방망이고지에서 겪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훈련병 중 한명이 당시 실종된 연락병의 동생이라며 생환소식을 전해왔다. 후에 만난 연락병은 사라졌던 화기소대장도 함께 포로로 잡혔다가 휴전 후 포로송환 때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뇌수술의 후유증으로 몸에 이상이 생겼다. 병원을 찾아 상태를 물으니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대답을 듣고 오기로 산에 들어가 요양생활을 하기도 했다. 수개월이 지나고 건강을 되찾아 보란 듯이 병원으로 돌아오니 진료했던 의사는 외국으로 연수를 떠나있었다. 새 의사는 건강하다고 진단했다.

 







배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