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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번도 없이 전장 누볐지만 분명한 대한민국 참전용사

 

정전 60주년 특별기획

나의전쟁 ⑥ 신 성 순 옹


전쟁과 인간, 그리고
16세 목탄 배달원 생활 중 전쟁
피난 중 눈앞서 한강 다리 끊겨
인천 상륙작전 때까지 숨어 지내

고향 가평에 돌아가니 식량 부족
굶주림 면하려 군속 편입
화악산 전투 참가 부상자 이송

1·4후퇴 때 영주까지 밀려나
1주일 교육 받고 공비토벌 나서
전투 치렀지만 민간인 신분 귀향
정식 기록 없어 정전 3년 후 입대

전역 후 오산 비행장 노무원 생활
이후 화성 동탄면 일대에 터 잡아
현재 유공자회 동탄분회장으로


 


‘참전’을 이야기 하면 의례 군복을 입고 한쪽 어깨에 총을 메고 있는 군인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전장은 군인들만의 장소가 아니다. 탄약을 나르고 끼니를 전하며, 때때로 병사들의 주검을 수습거나, 유사시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도 생존을 위해 총자루를 쥐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6·25전쟁 참전 기념공원에는 참전군인들의 모습과 함께 그들을 지원한 노무자들이 모습이 새겨져 있다.

군번도 부여받지 못한채 참전해 치열한 전장을 오간 이들 역시 분명한 참전용사다.

▲ 군속

1935년 가평에서 출생한 신성순 옹(79)은 송정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가난한 살림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어린나이였으나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에 서울 서대문 천연동의 9촌 형님 댁에 신세를 지며 목탄배달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 6·25가 발발했고 신 옹은 가게 주인과 함께 부랴부랴 피난길에 올랐다.

“배달 트럭을 얻어타고 한강다리로 향했어요. 알다시피 피난 행렬이 가관이 아니었어요. 다들 다리하나 바라보고 줄지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차가 막 다리 위에 올라설때였어요. 큰 소리가 나더니 바로 앞에서 다리가 끊겼지요. 운전하던 사장님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앞 유리 너머로 다리가 무너져 내리면서 피난가던 사람들도 한강으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봤습니다.”

서울에 고립된 신 옹은 9촌 형님네로 돌아가 죽은 듯 숨어 지냈다고 한다.

사정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전쟁초기 남진에 주력한 탓인지 신 옹은 9월까지 무사히 몸을 사릴 수 있었다.

9월 말,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선이 북으로 올라가고 서울이 수복되자, 신 옹은 고향으로 향했다.

가족들 모두 큰집에 모여 있었고, 마을은 다행히 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추위를 견디기에는 집에 남은 식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집안에 그늘이 짙어져갈 무렵, 마을 청년대장일을 하던 조카가 말을 걸어 왔다.

“이대로 있어봐야 먹을게 없으니 굶어죽기 십상이니 밥이나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주겠다면서 당시 가평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2사단 31연대 의무대에 군속으로 넣어줬어요. 나로서도 거절할 이유도 정신도 없었지요.”

16세. 아직은 참전과 먼 나이에 신 옹은 군번 없는 참전용사로 10월 화악산에 투입됐다.

▲ 화악산 전투

가평군 북면에 위치한 화악산에서 신 옹은 부상자와 시체 이송을 담당하며 근무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손대기도 어려웠지요. 그런데 매일 같이 그런 상황에서 지내다 보니까 금방 익숙해 졌어요. 전투가 끝나고 시신을 확인하러 가면 군번으로 신원만 확인하고 트럭에 실었습니다. 썩어서 병이 옮으면 않되니까 곧바로 빈 논에 땅을 파서 모아놓고 불태웠어요.”

어린 나이에 피와 시신 속을 오가는 생활을 시작했지만, 혼전 속에서 정신 없이 부상자들의 피와 시신을 나르다 보니 감각은 금새 무뎌졌다. 오히려 부상자를 수습하러 전장을 누비는 동안의 공포가 더 컸다.

“전투가 벌어지면 호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사상자가 나기 시작하면 부상자를 후송했지요. 말로 들으면 쉬울 것 같지만, 부상병 후송이란게 몸을 은폐하지 못한 상태로 전장에 노출되는데다가 적군을 등지기 때문에 총탄에 대비를 못하는 위험이 있어요.”

▲1·4후퇴

다음해 1월 4일 중공군의 공세가 본격화 되면서 신 옹이 속한 부대도 포위 공격을 당하며 후퇴가 시작됐다.

“그나마 설 명절 분위기를 느끼는가 싶던 때였어요. 후방연대본부에서도 명절음식에 위문품들을 보내 부대를 격려해 왔으니까요. 국군이 이기고 있으니 곧 전쟁이 끝날 수 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들의 기습 공격에 부대는 포위망을 뚫고 후퇴를 강행했다.

신 옹은 당시 상황을 “중공군의 조명아래 기습공격을 받고 전우의 희생이 화랑담배 연기 속에 수도 없이 사라졌다”고 표현했다.

한편, 다급한 와중에도 신 옹은 칼빈 소총 한 자루와 의약품 중 고가로 생각되는 페니실린 등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행히 고향 동네였기에 신 옹은 남쪽을 가늠하고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미역골 싸리재(가평군 북면)를 넘어 이튿날 동이 트기 전에 다다른 민가에는 누군가 아침식사를 마치고 막 떠난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직 꺼지지 않은 화톳불과 남아있던 서숙밥(기장과 조 따위의 거친 곡식으로 지은 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다시 양평 방면으로 이동했다.

하루를 가던 중에 또 다른 민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몸을 쉬기 위해 다가가니 빈 집에 황소 한마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단다.

“불쑥, 한 마리 짐승이지만 중공군에게 죽게 내버려 둬선 안되겠단 마음에 고삐를 풀어 남쪽으로 몰았습니다. 짐도 싣고 서로 의지하며 골짜기를 넘으니 나한테도 많이 위로가 됐던것 같아요.”

쉬지 않고 도착한 양평이었으나 이미 동·서에서 중공군과 아군이 교전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겨우 하룻밤을 지내고 곧 여주까지 다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여주에 도착해 임시집결지를 지정받고, 군복과 군수품 일부를 지급받았다. 여주강에 이르러 이를 경계로 약 3일간 전투를 치뤘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본래부터 지급받았던 탄약도 없던 터에 여주서 받은 군수품도 얼마 안됐어요. 버티려해도 탄약이 금방 동이 났지요.”

결국 다시 걷기 시작해 장호원과 문경새재를 지나 영주까지 내려왔다.

도중에 눈이 많이 내려 불면과 동상으로 고생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특히 도로변 배수로에 발이 빠지는 일이 많으면서 많은 전우가 동상이 심해져 발가락이 썪어 잘라내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 노무사단 편입과 군번없는 전역

영주에서 병력 예정자를 소집해 기초교육이 시작됐다.

1주일간의 짧은 교육을 마친 신 옹은 당시 괴멸적 타격을 입고 있던 육군 2사단 31연대에 정원으로 보충됐다. 그러나 정식으로 군번을 부여받지는 못했다.

영주 동쪽에 위치한 일월산에 공비토벌전투 참전을 시작으로 춘양 내성지구 공비토벌작전에서 참가, 승리를 거뒀지만, 여전히 ‘군속’의 신분이었다.

그사이 51년 6월, 유엔군은 전투병력을 절감하고 전장에 적기에 보급품을 운반하기 위해 민간인을 비롯해 여러 형태의 노무자들을 흡수해 ‘한국노무단(KSC)’을 창설했다.

한국 노무단은 총 3개 사단과 2개 여단으로 편성·운용됐으며, 제2국민병을 주로 징집·동원하면서 준군사적 조직으로 기능했다.

신 옹은 8월 육군 101사단 119연대로 편입됐다.

미군이 보급하는 옷과 식량을 받아든 신 옹은 재차 시작된 북진에 맞춰 신의주로 향했고, 김화지구 오성산 남쪽에 위치했다.

“올라가면서 다 같이 ‘전우’를 불렀습니다. 이번에는 꼭 승리하자는 마음도 그만큼 강했어요.”

장기화된 전투에서 신 옹은 탄약, 연료, 군자재, 식량 등 보급품을 운반했고, 전사자와 부상병 후송도 계속했다.

52년 9월에는 105사단으로 전출해 종종 전투에 투입되기도 했다. 그리고 겨울이 깊어질 즈음, 군속이 해제 되면서 귀향조치됐다.

사실상 전역이었지만, 군번 없는 민간인의 신분이었다.

▲그 후의 삶

고향인 가평으로 내려오니 미40사단이 가이사중학교를 세워 운영중에 있었다.

늦게 공부를 시작하려 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벌이에 나서야 했기에 학교생활을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정전이 3년이 지난 56년 그에게 영장이 날아왔다. 이미 전장에서 2년여를 보낸 후였지만 정식 기록이 남아있지 못한 탓이었다.

전후 복구가 완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행정이 온전할 리 없다는 생각에 신 옹은 다들 그러했든 말없이 입대했다.

전역 후에는 오산비행장에서 노무원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나마 벌이가 좋은 직업이었다.

몇 년 후, 화성시 동탄면 일대에 농지가 확대되면서 신 옹은 영농지원단으로 활동하다가 그대로 터를 잡았다.

농민들의 일을 도우면서 성실함을 인정 받으면서 조금씩 자신의 토지도 갖게 됐다.

최근에는 6·25참전 유공자회 동탄분회장을 맡으면서 종종 회원들과 게이트볼을 치며 노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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