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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란 경기도무형문화재 제31호 경기소리 보유자

 

경기·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전통예술의 중심이 됐던 '대동가극단'은 지금의 과천시 갈현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대동가극단'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전후로 신의주에서 해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 후기 전통문화·예술의 우물이기도 했던‘대동가극단을'을 이끌던 임씨 집안의 후손인 임정란 명창(경기도무형문화재 제31호 경기소리 보유자). 그는 가극단의 본산이던 과천에서 뿌리를 두고 '대동가극단'의 맥을 잇고 있다.

1990년 국가 중요무형무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후보 자격을 포기하고 도지정무형문화재 제31호 경기소리 보유자가 되어 경기소리를 알리는데 일생을 바치고 있는 그를 만나 봤다.

▲ 경기소리에 입문.

임정란 명창은 1943년 과천시 갈현동 찬우물에서 태어났다. 당시 갈현동의 자연마을이던 찬우물에는 대동가극단을 이끌고 있는 임씨 집안 8집이 모여 살고 있었다. 친할아버지의 사촌동생인 임종원 씨가 대동가극단의 단장을 맡고 있었으며, 그 아들인 임상문 줄타기 명인을 비롯해, 6~7촌들은 모두 악기 하나씩은 다루는 예인 집안이었다. 근대에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박초월, 박귀희, 박동진, 오태석 등 많은 이들이 이곳 대동가극단을 거쳐갔을 만큼, 당대 대동가극단은 전통문화·예술의 우물과도 같았다.

그러나 임정란 명창은 어린 시절 자신이 예인 집안의 사람이라는 데 대해 반감이 컸다.

“당시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광대집안이라고 많이 놀려댔어요. 그게 듣기 싫어서 어려서는 예인이 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친척 오빠들 중에도 악기나 소리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농사일을 하신 분이 있었을 만큼 당시 예인들에 대한 대우는 좋지 않았어요.”

그런 그가 경기소리에 입문하게 된 것은 가계가 어려워 졌기 때문이다. 1950년 초, 서울로 이사한 임정란 명창은 10식구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소리를 배우게 된다. 사돈인 지연화씨(장고명인 지갑성의 딸)의 인도로 1961년 소리에 입문하기 위해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찾은 그는 이 곳에서 이창배, 정득만, 묵계월 선생님을 큰 스승으로 모시면서 소리의 기반을 쌓기 시작한다. 1960년대 초 청구고전성악학원은 경기명창들의 등용문이며, 배움터였다.

오늘날 그의 신념과 예술적 기반을 만들어 준 묵계월 명창과의 만남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묵계월 명창은 1975년 이은주, 안비취 두 명창과 함께 경기소리 12바탕을 4바탕씩 나눠 중요무형문화제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로 지정된다. 이 때 임정란 명창은 묵계월 선생의 첫번째 전수 장학생으로 입문해 본격적으로 경기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배웠던 것은 다 잊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묵계월 선생의 말을 듣고 다시 소리공부를 하게 된 그는 “묵계월 선생은 철저하셨기에 야단도 많이 맞고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전수 장학생이 된 이듬해에는 첫 음반을 내고, 1983년 제9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민요부 장원을 받는 한편, 전수조교로 지정된 그는 그해 스스로도 서울에 학원을 열어 문하생을 두기 시작했다.

▲ 경기도무형문화재 지정과 경기소리전수관 설립.

임정란 명창이 고향인 과천으로 돌아온 것은 1987년의 일이다. 그는 서울의 학원으로 출퇴근하며 문하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과천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한국국악협회 과천시지부장으로 취임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1990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후보로 승격됐으며, 1998년에는 경기도립국악단 민요악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 때 도에서 그에게 도지정 무형문화재가 되어줄 것을 제안해 왔다.

“도에서 ‘임 선생이 경기도 사람이니 도에 와서 문화재가 되어 달라’고 당시 도문화관광국장을 통해 의사를 전해 왔지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어요. 25년을 모신 묵 선생님 곁을 떠나야 하는 마음도 그러했고, 당시 아직 지방에서는 무형문화재라는 것이 그다지 입지가 없던 때였으니까요.”

1년을 숙고한 끝에 임정란 명창은 결국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후보에서 사퇴하고 도에서 경기소리 활성화를 위해 활동하기로 마음 먹는다. 최초로 경기12잡가 전 바탕의 기예능 보유자로 지정 받은 것은 값진 일이었다. 그러나 소리를 전수할 공간이 없어서는 허울뿐인 문화재가 될 공산이 있었다.

“도지정 문화재가 되는 대신 경기소리를 전수할 수 있는 전수관을 지어 줄 것을 제안했습니다. 당시 경기도에는 제대로 소리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었고, 가르칠 장소도 없었어요. 문화재가 올바로 전수되기 위한 기본적인 부분은 갖춰야 도지정 문화재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지정 무형문화재가 되면서 임정란 명창은 서울에 있던 학원 문을 닫고 본격적으로 경기소리 전수를 시작했다.

“과천에 내려왔지만 제자들을 가르칠 장소가 없었습니다. 거실에서 소리 교육을 시작했지만 민원이 많이 들어왔어요. 결국 집의 지하실에 연습실을 마련해 10여년을 가르쳤지요”

어려움 속에서도 2001년 ㈔한국경기소리보존회를 창단한 그는 경기소리 저변을 확대하고자 소리의 대중화에 박차를 기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소리극이다. 이는 과거 대동가극단의 공연양식과 그 맥을 같이 하되, 대동가극단이 판소리를 기반으로 한 소리극을 한 데 반해, 경기소리를 기반으로 한 소리극을 선보이는 차이가 있다.

임정란 명창은 소리극을 완성하기 위해 2년여에 걸쳐 제자들에게 소리에 더해 춤과 악기를 가르쳐 가무악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연기 수업까지 병행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실로 2003년, 수원지방 설화를 바탕으로 한 ‘낚시대장 서얼’이라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 된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이야기를 설명해 주는 현대의 할머니 역으로 등장해, 여러 창작곡을 선보이며 현대 시각에 맞는 우리 소리를 풀어냈다. 이어 2005년 6월에는 ‘과천골 딸 부잣집 경사 났네’, 2007년 9월, ‘과천현감 민치록’, 2009년 12월에는 ‘애민의 방적식’ 등을 선 보였다.

그는 “소리극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공연문화를 연다는 기쁨과 현대인의 정서에 맞게 우리음악을 재해석한다는 의미있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꼈다. 관객에 한층 더 가깝게 다가가서 호흡하고 있다는 생각에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 대동가극단의 맥을 잇다

그가 대동가극단이란 이름을 다시 가슴에 새기게 된 것은 1990년대 초에 와서 였다.

“20여년을 경기민요 이수자로 지내오면서도 고향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어요. 어려서 부터 가졌던 트라우마가 작용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90년대 초, 포항대학교로 판소리공연을 갔는데 거기서 박동진 선생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하루 종일 분장실에 있다 보니 대화가 많았는데 박동진 선생님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오셨어요. 말하는 것을 들으니 경기도 사람인 것 같은데 한번도 고향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면서요. 그때서야 과천이 고향이라고 말을 꺼냈더니 오촌 당숙이신 임상문 선생님 이름과 함께 '조카님' 이라고 부르시며 손을 꼭 잡아주셨지요”

이후 그는 자신의 뿌리가 되는 대동가극단을 되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경기소리전수관의 개관과 함께 2012년부터는 소리극의 명칭을 ‘대동가극단의 맥을 잇다’로 개칭했다. 시기를 맞춰 경기소리전수관의 바람직한 활용방안과 대동가극단에 대한 역사를 조명하는 학술대회도 열었다.

지난 11월 29일 소리극으로는 6회, ‘대동가극단의 맥을 잇다’ 공연으로는 2회 째 공연을 가졌으며, 12월 2일에는 ‘대동가극단의 예술사적 재조명과 경기창극단의 방향’을 주제로 2회 학술대회도 진행했다.

그는 “중요 무형문화재의 뿌리가 돼 준 대동가극단은 도 뿐아니라 국가적으로도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야 할 단체”라면서 “지금은 대동가극단을 직접 거친 분들이 다 작고하시고 그 제자들이 맥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대동가극단을 되살리는 노력을 해야 할 때다. 정부와 지자체가 많은 관심을 가져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 경기무형문화재총연합회

임정란 명창은 지난 2012년 ㈔경기무형문화재총연합회 이사장으로 취임해 활동하고 있다.

지난 2년을 돌아보며 그는 “도내 각지에서 활동하는 문화재들의 단결력을 높인 것과 그 간의 사업을 문서화한 것”을 가장 큰 자부심으로 꼽았다. 그러나 그는 도무형문화재 처우 개선에 대한 간절한 바람도 전했다.

“도 무형문화재의 환경이 너무도 열악합니다. 도에서 한달에 120만원씩 지원금을 주는게 전부예요. 때문에 많은 문화재 보유자들이 제대로 된 공연이나 전시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도문화재단을 통해 조금이나마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나마도 없어졌어요. 도가 지정한 문화재에 시가 예산을 지원해 주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시도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도에서도 해당 시가 지원해 주는 만큼은 도지정무형문화재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합니다.”

그는 도무형문화재 공개행사인 ‘무형문화재 대축제’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전했다. “앞으로 무형문화재 대축제 행사가 보다 내실 있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경기도무형문화재연합회가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운영되기 위한 인력구조 확보와 전시·공연에 대한 입체적인 기획이 이뤄져야 보다 많은 도민들에게 도문화재의 예술성과 우수성을 바로 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끝으로 “정부와 함께 도민 여러분도 어려운 와중에 전통예술을 이어가고 있는 무형문화재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취재 박국원기자 pkw09@kgnews.co.kr

사진 오승현기자 osh@kgnews.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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