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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이남주 자연아래버섯’ 대표

 

지난해 12월, 농촌진흥청은 농업인들의 최고 영예인 ‘2013년 대한민국 최고 농업기술명인’으로 식량작물 분야와 채소 분야, 과수 분야, 화훼·특작 분야 및 축산 분야 등 모두 5개 분야에서 명인들을 선정했다.

‘대한민국 최고농업기술명인’은 농진청 등 각급 농촌진흥기관에서 개발·보급한 우수기술을 대상으로 농업리더를 발굴해 우수 영농기술과 성공사례를 확산하고, 국제농업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 및 농업인 사기 진작을 위해 마련된 상이다.

이들 5명의 농업기술명인 가운데 경기도 농업인으로 명인에 선정된 자랑스러운 농업인이 있다.

지난 35년간 자연 그대로의 버섯를 생산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은 끝에 화훼·특작 분야 명인으로 선정된 이남주(56) ‘이남주 자연아래버섯’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1979년, 단돈 35만원을 들고 버섯재배에 뛰어든 뒤 버섯 포트재배에 대한 특허 등 다수의 특허권을 보유하고, 버섯에서 가장 큰 애로사항인 배지를 자체적으로 개발해 주변농가에게 전수함으로써 지역농업인의 소득 향상에 기여하는 한편, 생산과 가공, 유통, 체험, 교육 등 버섯의 일관 체계를 구축해 6차 농업의 모델을 제시하기까지….

2013년의 마지막 날, 여주시 강천면에 위치한 농장에서 그를 만나 농업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맺게 된 버섯

“어린시절부터 농사지을 땅도 없이 생활고에 시달렸기에 제가 직접 농사를 짓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남주 대표는 4살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려운 학창시절을 마치고, 가계를 돕기 위해 당시 국비로 운영되던 마산(현 경남 통합창원시)에 있는 육영재단의 직업학교를 1기로 들어갔다.

1년여간의 훈련 끝에 기술관련 자격증 2개를 취득하고 곧바로 취직을 했지만, 자신의 진로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불과 3개월만에 퇴사 후 무작정 귀향하고 말았다.

여러 이유로 회사를 뛰쳐나오긴 했지만, 먹고 살 일이 막막했다.

이 대표는 “그러던 중 우연히 라디오 방송을 통해 버섯에 대한 정보를 듣고, 라디오 방송국에 편지로 문의해 ‘대한버섯연구소’라는 농장을 알게 됐다”라며 “그곳에서 1일 교육을 받고 A4용지에 기록된 한 장의 버섯재배 요약서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섯재배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어머님께서 어렵게 마련해주신 35만원으로, 집 마당에 16평(52.89㎡) 규모의 작은 재배하우스 1동을 짓고 버섯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는 “우연인지, 정성인지 재배 첫해에 1평당 64kg을 수확했는데, 이 기록은 지금까지 넘어서질 못할 정도로 엄청난 결과였다”며 “그제야 제대로 할 일이 생긴 것 같았다. 특히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는 데다 가격까지 비싸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줄 것만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버섯에 실은 꿈과 청춘

그는 보다 좋은 품질과 보다 많은 버섯생산을 위해 노력하던 중 1981년에 제1기 후계자자금을 받아 50평(165㎡) 규모로 재배사를 확장하고 본격적으로 ‘균상 볏짚재배’ 방식의 버섯 농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얼음이 어는 겨울에도 냇가에 볏짚을 담가 수분을 맞춰야 하고, 연탄이나 나무로 직접 불을 때서 살균을 하는 등 모두 수작업으로 해야하는 힘든 작업의 연속이었다.

더 좋은 버섯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공부도 필요했다.

농진청의 보도자료와 농민신문, 버섯관련책자, 특히 균학 책은 낡도록 읽고 또 읽었다.

1986년에는 종묘기능사 자격증도 취득했고, 이후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농사를 계속 지으면서 문득 농산물인 버섯을 공산품 뽑아내 듯 생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균사배양(영양생장)과 버섯생육(생식생장)을 분리한 이원화 재배를 시작했다.

생육실의 이용률을 높이고, 안정적으로 버섯생산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88년에는 느타리버섯의 ‘봉지재배법’도 개발했다.

이 대표는 “이미 일본에서 시작돼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있던 재배법이지만, 정확한 매뉴얼이 없다보니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며 “직접 제대로 매뉴얼을 작성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시행착오도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봉지 속 ‘배지’의 크기도 몰라 일본 농민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고 일본농민이 들고 있는 배지의 크기를 추정하는 등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후 각종 자료를 구하고, 농진청의 도움을 받는 등 꾸준히 노력한 끝에 알맞은 배합비율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렵게 찾은 봉지배합법을 통해 노동생산성 향상, 대량생산체계구축, 소득의 안정성 확보 등을 통해 수확량이 크게 늘었고, 이후 버섯재배와 관련된 각종 기술 및 ‘버섯재배용 용기의 톱밥주입장치’ 등 각종 기계 등도 개발했다.

그는 현재 이 같은 기술들을 전국 농업인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자만 뒤의 위기를 극복하기까지…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는 사실에 절로 자만심 속에서 살았죠.”

봉지재배법과 톱밥주입법 등을 통해 한 동안 나름의 호황이 계속됐다.

그러던 2002년 태풍 루사의 피해를 입으며 위기가 닥쳤다.

태풍은 산사태를 만들어 농장의 심장부인 배지작업실과 배양실 일부를 쓸어버리고 말았다.

복구하는데 1년의 세월이 흘렀다.

“복구 후 현실을 들여다보니 버섯값은 낮아진 반면, 원재료비와 인건비, 광열비, 유통포장비, 기타 관련비 등은 급속히 상승하고 있었다”는 그는 “콩나물보다 싼 버섯이 생산되며 소비자는 좋아졌지만, 생산자들은 점차 빚더미에 오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자연 그대로의 버섯을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시장에서는 유통의 편의상 갓을 작게 키워줄 것을 요구하면서부터 본 모습과 다른 기형버섯(?)을 생산·판매는 실정이었다.

많은 실험과 연구 끝에 자연에서 자라는 것과 같은 버섯재배에 성공했다.

또 2004년 버섯전문체험학습장을 설립하고, 이듬해 친환경농산물인증(무농약농산물 제10-23-3-54호)을 받는 한편, 2006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이남주 자연아래버섯’이라는 상표를 등록하는 등 농장을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 대표는 “생존을 위해 버섯을 팔아야만 했고, 뜻을 같이 하는 집단을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어 여러 업체와 미팅을 가진 끝에 2008년부터 아이쿱 생협과 거래를 시작하며 조금씩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며 “한 동안은 적자를 기록했지만, 점차 먼저 찾아주는 고객이 생겨났다”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농업인 스스로의 고민이 필요한 농업

이 대표는 “현재 재배 중인 노루궁뎅이 버섯 등은 약용으로 쓰이지만, 그 외에도 관상용 등 새로운 분야로도 개발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우리나라는 옛부터 버섯이 갖고 있는 신비로움을 이용해 관상용으로 흔히 사용했다”고 말했다.

이어 “때문에 사라진 옛 선조들의 버섯 활용 문화를 다시 재현해 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농업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도 제시했다.

그는 “막연히 기존의 생산 및 판매 방식이 아닌 소량 고부가가치 체제로의 전환을 위해 농업인 스스로가 고민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농장부터가 도농 간의 생활의식 및 소득격차를 해소하고 상생을 기대하며 농림축산식품부의 위탁을 받아 체험농장을 운영하고 있다”며 “좋은 농산물 생산뿐만 아니라 인식을 전환해 경쟁이 심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글 | 전승표 기자 sp4356@kgnews.co.kr

사진 | 이준성 기자 oldpic316@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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