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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오솔길’ 노랫말에 담았어요

작사가 황상박 선생의 ‘고향사랑’

 

웃는 산기슭에

안개 타고 내렸나 숲속에 숨었나

산나물 돋아나는 오솔길은 걷기도 좋아

포동진 애고사리 손잡고 놓질 않네

음~아~

내 고향 오솔길은 걷기도 좋네

바쁘게만 돌아가는 일상에 쫓기듯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속 유독 눈에 띄는이가 있다. 혼자말을 중얼거리듯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는 한 사람, 힘없이 구부정하니 처진 어깨에 묵직해보이는 가방 하나를 둘쳐메고도 저만치 앞장서 걸어가는 그 사람은 작사가 황상박(77세)선생이다.

사람들은 흔히 작사가라고 하면 마치 시인처럼 자신만의 감성을 담아 운률에 맞게 잘 읽히는 문장을 쓰면 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사가의 일과 삶은 그렇게 록록치만은 않다. 더구나 요즘처럼 한국의 류행가요와 팝송에 저만치 밀려난 설음을 안고 가야 하는 우리 연변노래의 작사가로 살아가는 이들에겐 말이다.

“우리 말 가사는 또 하나의 우리의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따라 낱말들은 새로 생겨나고 사라질지라도 우리 말의 틀과 바탕은 거의 변하지 않고 오래도록 이어져갈겁니다. 우리 사회도 이제 변화가 커 나라 바깥으로 많이 나가기도 하고 바깥에서 새 이웃들이 많이 들어오기도 하는데요. 그 이웃들도 분명 다 같은 우리입니다. 더 많은이들과 어우러져 쓰는 우리 말, 정말이지 아름답고 좋은 말로 길이 남도록 우리가 잘 지켜갔으면 좋겠습니다.”

5일, 자신이 편집으로 있는 가사전문지인 ‘해란강여울소리’를 일일이 손수 배달을 마친 황상박 씨를 만난 자리에서 그가 환하게 웃으며 건넨 말이다.

우리 말과 글을 지키려고 동분서주하는이들의 방식은 저저마다 다르다. 그리고 16년 우편배달원으로 지내다 작사가로 된, 조금은 특이한 리력을 가진 황상박 선생이 선택한 방법은 힘 다하는 날까지 아름다운 고향산천을 노래말에 담아내는것이다.

룡정시 팔도향 수북촌이 고향인 황상박 선생은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특히 좋아했다. 그리고 지난 세기 1970년대말, 우연하게 작곡가 최삼명 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용기 내여 일기장에 적어뒀던 가사를 넌지시 건네며 곡을 붙여달라고 청들었다. 그의 당돌함이 기특해 최삼명 선생은 그 청을 흔쾌히 수락했고 그렇게 탄생한게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게 불리워지는 노래 ‘내 고향 오솔길’이다.

그 인연이 계기가 되여 그후 황상박 선생은 1981년 룡정시방송국으로 전근했다.

황상박선생은 “차츰 가사를 쓰는것이 숙명처럼 다가오더라구요. 그리고 가사를 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굴뚝처럼 올라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지금의 ‘해란강여울소리’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다.

‘해란강여울소리’가사전문지가 정규간행물로 되기까지는 황상박선생의 노력을 빼놓을수가 없다.

“주머니사정이 록록치 않았을 때라 변변한 사무실 하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란강변에서 홀로 주내 각지에서 보내온 가사들을 편집했습지요. 누구 하나 알아봐주는 사람 없어도 왜 그렇게도 뿌듯했던지…”라고 말하는 황상박 선생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넘친다.

후원해 주는 이도 없었을 때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게 황상박 선생의 몫이였다. 밤잠을 설치며 가사편집은 마쳤지만 인쇄비가 없어 당장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값 나가는 물건들을 모아 팔았지만 푼돈 밖에 안됐다. 그래도 쉽게 포기가 되지 않더란다. 그래서 생각해낸것이 등사판이라도 찍어내는것. 그리고 1996년 4월 20일 첫 등사판이 드디여 빛을 보았고 20여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작사자들의 터전’, ‘작곡가들의 샘터’로 자리매김했다.

해마다 600여수의 가사를 신문에 싣고있으며 창작대오도 초창기의 수십명으로부터 지금은 전국 각지에 500여명의 창작대오를 두고있다.

황상박 선생은 우리 작사가들에게 좀더 나은 환경을 마련해주고저 지난 2006년에는 연변가사협회도 설립하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활동하고있다.

“언젠가는 저도 맥이 진할 때가 있겠죠. 이제 더 바라는게 있다면 누군가 내 뒤를 이을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거랍니다. 우리의 노래말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꼭 누군가 할 사람이 나타나겠습지요”라고 말하는 황상박 선생, 그의 바람이 더이상 바람이 아닌 현실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글·사진=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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