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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묻힌 북한산성 행궁, 발굴조사로 ‘옛 위용’ 햇빛 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가는 북한산성 재조명
<4> 북한산성의 심장- 왕궁건설과 관영건물

 

 

풍수지리상 좋은 터에 북한행궁 조성
1915년 일어난 산사태로 점차 파괴돼

현재 4차례 발굴조사 통해 전모 드러나
‘북한지’에 의하면 행궁의 규모는 115칸
3단 지형 위에 내·외전지와 대문지로 구성
삼군문유영·경리청 등 설치 북한산성 관리


◇북한행궁은 최고지대에 건설된 보장처

행궁(行宮)은 왕이 도성을 벗어나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궁궐로, 전쟁이나 내란이 일어났을 때 피난처로 삼거나 왕릉에 참배하러 갈 때 머물렀던 처소이다. 이 밖에도 왕은 사냥이나 무예를 연마하러 가거나 휴양 목적으로 온천이 있는 행궁에 쉬러 가기도 했다.

북한행궁은 외적의 침입 혹은 비상사태시 국난극복의 중심지로 지어졌으나 실제로 사용된 적은 없다. 다만 숙종임금과 영조임금 그리고 세손시절의 정조임금이 행차해 행궁을 둘러보고 동장대에 오르는 등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며 왕권강화와 통치질서 확립에 이바지했다.

북한행궁은 남한행궁의 모습을 따라 궁궐의 특징을 보여주면서도 북한산성의 지형과 목적에 맞게 조성됐다.
 

 

 


북한산성을 축성하자는 의논이 결정된 숙종 37년(1711) 4월 3일에 북한산성을 쌓는 공사가 시작됐고, 같은 해 성곽공사의 감독을 맡았던 호조판서 김우항 등이 터의 길흉을 판단하는 지사를 거느리고 가서 행궁터를 살펴보게 한 후 아뢰어 정했다.

북한행궁터는 풍수지리상 좋은 자리이면서 방어에 유리해 피난처로서 안전하고, 건물을 짓기에 적합한 넓은 대지가 선정됐다. 행궁은 상원봉 아래에 자리잡아 삼면은 급한 경사로 둘러싸이되 앞에는 군사지휘소인 동장대가 바라보이고, 후면에는 남장대를 조성해 주변을 경계하도록 계획했다.

1712년 8월에 내전 공사를 시작으로 이듬해 5월에 외전과 수라간 공사가 마무리됐다. 행궁에 사용된 목재는 강원도와 여주 영릉·녕릉의 주변에서 벌목한 나무로 북한강을 통해 운반해 와서 다듬어 사용했고, 석재는 산성 내에서 직접 떠서 공급했다.
 

 

 


이렇게 창건된 행궁은 해마다 불어 닥친 비바람의 피해를 겪으며 무너진 곳을 수차례 보수하면서 300년의 세월을 버텨왔다.

1904년 도쿄제국대학의 의뢰를 받아 한국건축을 조사하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 의해 그 모습이 소개됐고, 영국선교회의 피서지로 사용하고 있던 1915년 산사태가 발생해 많은 양의 토사 및 암괴가 행궁을 덮치면서 점차 파괴돼 갔다.

이렇게 사료와 사진으로만 남아있던 북한행궁은 현재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북한행궁, 4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전모가 드러나다

행궁은 경사가 완만한 3단의 지형 위에 왕실사람들이 생활하던 내전영역과 업무를 보는 외전영역, 진입공간인 외대문영역으로 나눠져 있다.

각 영역은 좌우행각과 내곽담장으로 구분돼 마당을 갖고 있으며, 크게 아우르는 외곽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처럼 담장을 이중으로 쌓아 건물이나 축대가 풍수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했으며, 행각과 담장에는 중문과 계단을 설치해 출입에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행궁이 창건된 지 33년 뒤에 간행된 ‘북한지’의 기록을 보면 행궁의 규모는 115칸에 달했다. 각 영역은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된 중심건물과 이를 둘러싸 마당을 이루는 좌우행각방과 마루, 주출입로인 문과 어도, 계단, 물건을 보관하던 헛간, 음식을 준비하는 수라소, 화장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행궁의 중심건물인 내전과 외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2칸 온돌방이 있고, 그 주변 사방으로 툇마루를 뒀다. 방바닥을 따뜻하게 데우는 구들은 한 사람이 들어가 불을 땔 만한 공간인 함실과 그 안쪽 아궁이, 뜨거운 불길이 지나가는 고래,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은 물론 그 위에 몸을 눕힐 수 있는 구들장과 황토마감까지 잘 남아있다.

내·외전지 모두 왕이 다니는 어도와 솟을대문이 놓여 있으며, 외전지에는 기단 앞쪽으로 넓은 별도의 단이 마련돼 있다. 내·외전 좌우에는 온돌방과 마루, 헛간, 중문으로 구성된 행각이 대칭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행각인 놓일 대지의 경사나 면적, 방의 기능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주었다.

예를 들어 내전우행각지에는 온돌방이 증축됐고, 경사가 심한 외전행각지와 외대문행각지는 단을 둬 온돌방과 부엌, 헛간을 마련했다.

이 밖에도 내전과 외전영역을 둘러싸는 배수로와 후면 화계·축대는 궁궐건축에 걸맞는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북한행궁의 배수체계는 잘 이뤄져 있는데, 행궁 내에 모인 물이 계곡으로 배출되도록 하면서도 외곽담장 내에 계곡이 일부 포함돼 생활용수로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내·외전지와 대문지, 이들 주변 축대에서는 토수와 용두, 잡상, 막새 등이 집중적으로 출토돼 1910년대 촬영된 사진 속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막새는 봉황문·수자문·화문수막새와 용문·거미문·화문암막새가 내·외전영역에서 고르게 출토됐다. 이밖에 ‘山’·‘戎’·‘己巳’·‘辛訓’·‘公’명이 찍힌 수키와와 철정·와정·배목·돌쩌귀·띠쇠·문고리·철촉·열쇠·자물쇠 등 다양한 건축재료와 생활용품이 출토됐다.

도·자기류로는 상대적으로 적은 양이 출토돼 몇몇 관원만이 거주하며 관리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1910년대 영국성공회가 여름피서지로 북한행궁 내전에서 생활하던 사진과 당시 사용하던 램프 및 스토브편을 발굴함으로써 한층 실감나는 역사 속 시간을 밝혀냈다.


 

 

 


◇북한산성, 전담 수비조직 경리청 신설, 도성수비의 핵심 3군문의 유영지와 장기항전에 대비한 창고시설 8곳 설치

산성 내에는 군사지휘부인 유영 3개소를 두고 10명 내외의 군관을 파견해 병사들을 통솔·관리하게 하고, 성벽이나 성랑·창고 등 시설물의 수축과 관리·방어를 나눠 맡게 했으며, 왕이 북한산성에 들어올 때 호위하게 했다.

숙종 38년(1712)에는 경리청 관성소가 행궁 앞에 건립되면서 북한산성의 실질적인 군사업무와 재정을 주관했다. ‘북한지’와 ‘만기요람’에는 이들 관영건물의 위치와 규모, 건물구성, 관리인원, 보관물품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삼군문유영은 모두 유실돼 현재 기단과 초석, 축대 등만 남아있는데, 감관이 집무를 보고 머무르는 대청과 거주하며 생활하던 내아, 군량창고인 향미고와 무기창고인 군기고, 관원이 머무르는 중군소·낭청소·서원청, 죄인을 가두어두는 구류간 등으로 구성됐다고 한다.

전체 규모는 훈련도감유영이 130칸, 금위영유영이 108칸, 어영청유영이 101칸으로 훈련도감유영이 가장 컸다. 훈련도감유영은 중성문에서 가장 가까운 노적봉 앞 노적사의 서북쪽에, 어영청유영은 현 대성암 자리에 그 터가 남아있으며, 금위영은 대성암 아래에서 보국사 아래로 이건했다는 내력이 적힌 비가 남아있다.

이 밖에 북한산성의 관리시 가장 역점을 둔 점은 군량미와 무기의 보관이었다. 군량미를 실어 나르는 일은 평지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힘든 일이어서 산성에 창고를 배치할 때 편리한 곳에 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산성 내에는 경리청상창·중창·하창·호조창과 더불어 삼군문의 창고인 훈창·어창·금창을 뒀고, 산성 밖에는 평창을 설치했다.

행궁 앞 좌측에는 호조창이 위치해 임금에게 바치는 쌀을 저장했고, 행궁 앞 우측에는 경리청상창을, 중흥사 앞에는 중창을, 대서문과 중성문 중간지점에는 하창을 뒀는데, 이중 하창지는 북한동역사관 건물 주변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평창은 산성 밖 세검정 지역에 표석만 세워져 있다.

향후 이들 유적에 대해서도 더 많은 자료가 수집·발굴된다면 전란시 도성을 대신해 안전한 피난처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계획된 북한산성의 관리체계와 삶에 한층 다가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승연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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