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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태동한 북한산 불교문화, 왕실 불교 신앙 중심지로 꽃피다

세계문화유산으로 가는 북한산성 재조명
<7> 북한산, 불심의 숲에 덮이다

 

 

북한산, 삼국시대부터 불교적으로 신성시
‘북한산진흥왕순수비’ 기록된 ‘도인’ 승려 가능성
신라시대 장의사 창건… 북한산 불교문화 본격화

왕실 불교 신앙의 중심지로 주목
고려왕들 남경 행차 때마다 ‘승가사’ 들러 참배
조선시대에도 왕실의 지속적 후원 속 사세 유지

조선후기 호국불교 성지로 변모
북한산성 내 11개의 승영사찰 설치 관리
팔도도총섭이 머물렀던 ‘중흥사’ 가장 왕성
성능스님, ‘북한지’에 자세히 작성


◇삼국시대, 북한산에서 불교문화가 본격적으로 태동하다

잘 알려지다시피 인도에서 흥기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래된 시기는 삼국시대인 4세기 후반이다.

삼국 가운데 불교를 가장 먼저 수용한 국가는 고구려였는데,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인 372년 중국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으로부터 불상, 불경, 승려 즉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를 받아들이면서 한반도에서 최초로 불교를 수용했다.

이후 백제가 중국의 동진(東晉)으로부터, 신라가 이웃한 고구려로부터 차례대로 불교를 수용하고 국교로 공인함에 따라 1천700여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갖춘 불교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북한산의 불교문화도 아마 이 시기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국보 제3호인 ‘북한산진흥왕순수비’는 북한산에서 불교가 언제부터 태동했는가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자료이다.

568년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한강 유역의 영유권 과시와 민심수습을 목적으로 세운 이 비에는 ‘도인(道人)이 석굴에 살고 있는 것을 보고 돌에 새겨 기록한다’라는 내용을 남기고 있다. 물론 당시 비에 기록된 도인이 불교에서 말하는 승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진흥왕이 세운 다른 순수비인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에서 왕을 수행하는 관료들 중에 수가사문(隨駕沙門)으로 도인의 직함을 띤 승려들이 등장하고 있어 ‘북한산비’에 기록된 도인도 이와 같은 승려였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진흥왕이 북한산을 순행하기 이전부터 북한산 내에는 승려가 거주하며 수행하는 공간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북한산의 불교문화는 신라가 장의사를 창건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신라 무열왕 6년인 659년 백제와의 통일전쟁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 두 장수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금의 창의문(彰義門) 밖 세검정 북쪽에 세운 장의사는 고려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 지속적으로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사찰이었다.
 

 

 


비록 연산군 때 폐사돼 지금은 당간지주(현재 세검정초등학교 내)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당간지주의 크기와 규모를 통해 당시 사찰의 위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신라 고승인 의상(義湘)이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서 세웠다는 청담사(靑潭寺)도 북한산에서 주목해야 하는 사찰이다. 현재 정확한 위치는 확인할 수 없지만, 9세기 대학자이자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崔致遠)이 저술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는 화엄십찰(華嚴十刹) 가운데 청담사를 기록하고 있다.

화엄십찰은 신라 불교 교단을 이끌었던 화엄종의 지도자 의상의 법을 계승하고 그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전국에 세워진 10개의 사찰이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찰이 북한산에 위치했다는 사실은 북한산이 삼국시대부터 불교적으로 매우 신성시됐던 장소였음을 보여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왕실 불교 신앙의 중심지로 주목되다

불교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고려시대나 반대로 불교를 억압하고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도 북한산은 왕실 불교 신앙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에는 이 지역에 삼경 가운데 하나인 남경(지금의 서울)이 설치되고 북한산이 남경의 주산으로 여겨짐에 따라 역대 왕들의 행차가 끊이지 않았으며 적지 않은 사찰이 건립됐다.

고려 제8대 왕 현종(顯宗)은 재위에 오르기 전에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있을 때 천추태후(千秋太后)의 위협을 피해 신혈사(神穴寺)에 몸을 숨겨 목숨을 구했으며, 1010년과 1018년에는 거란과의 전쟁이 일어나자 고려 태조(太祖)의 관을 향림사(香林寺)에 임시로 옮겼다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현릉(顯陵)으로 장례했다.

제13대 왕 선종(宣宗)도 재위 기간에 신혈사로 행차해 기우(祈雨)를 목적으로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설행하기도 했으며, 1090년에는 승가사(僧伽寺)에 행차해 재물과 경례를 들이기도 했다.

특히 고려시대 승가사는 매년 봄과 가을에 사흘씩 재(齋)를 지내는 신성한 사찰로 고려의 역대 왕들이 남경에 행차할 때 반드시 들러 참배했는데, 이는 승가사에 있는 승가대사상의 영험을 통해 개인의 기원이나 가뭄과 수재 등과 같은 천재지변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외에도 고려 초기의 활동한 법상종 고승으로 최초로 왕사와 국사로 책봉된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境)이 주석하고 머물렀던 삼천사(三千寺), 고려 말기의 활동한 고승으로 선종의 하나인 임제종의 시조가 된 태고 보우(太古 普愚)가 개인의 수도처로 창건한 태고사(太古寺) 등도 고려시대 왕실 불교의 신앙과 관련해 주목할 수 있는 사찰이다.

조선시대에도 북한산은 오악(五嶽) 가운데 하나인 중악(中嶽)으로 불리며 국가적으로 신성한 지역으로 인식했다. 조선 태종부터 세종대까지 진행된 불교 교단의 축소·정비 과정에서도 북한산에 위치한 사찰들은 왕실의 지속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사세를 유지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육지와 수중의 고혼과 아귀를 천도하기 위해 북한산에 위치한 진관사(津寬寺)에서 지속적으로 수륙재(水陸齋)를 설행했고, 조선 명종 17년인 1562년에는 명종(明宗)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아들의 무명과 장수, 그리고 자손의 번영을 위해 향림사에서 나한탱화 200여점을 봉안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후기 북한산성 내 11개의 승영사찰을 설치해 호국 불교의 성지로 변모하다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37년인 1711년 두 번의 전란을 겪은 조선이 수도 한양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성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산성의 수비와 관리를 담당하는 11개의 사찰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바로 승영사찰(僧營寺刹)이다.

조선의 정부는 1714년 북한산성 내에 승군(僧軍)의 정원을 350명으로 정하고, 승영사찰에 각각 수승(首僧) 1명, 승장(僧將) 1명을 주둔시켰으며, 특히 중흥사(重興寺)에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둬 산성 내에 모든 승영사찰을 관리하도록 했다.

조선후기 북한산성 내 승영사찰에 대한 내용은 1745년 성능(性能)이 작성한 ‘북한지(北漢誌)’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성능은 전라남도 구례 화엄사에서 벽암각성(碧巖覺性)의 문하로 득도한 인물이다. 그의 스승인 각성은 1642년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된 인물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전국 주요 사찰에 대한 중창불사(重創佛事)를 담당하기도 했다.

성능은 1711년 조정에서 북한산성의 축성을 목적으로 전국 승병을 통솔하는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됐으며, 축성의 공역을 완료한 후 신임 도총섭이었던 서봉(瑞鳳)에게 북한산성에 관한 현황을 인계하기 위해 ‘북한지’를 작성했다.

‘북한지’에 기록된 당시의 승영사찰은 팔도도총섭이 머물렀던 중흥사를 비롯해 용암사(龍巖寺), 보국사(輔國寺), 보광사(普光寺), 부왕사(扶旺寺), 원각사(元覺寺), 국녕사(國寧寺), 상운사(祥雲寺), 서암사(西巖寺), 태고사(太古寺), 진국사(鎭國寺) 등이다.

이 가운데 중흥사는 조선시대 말기까지 북한산성의 중심사찰로 가장 왕성한 사세를 유지했다.

1902년에 촬영한 유리건판에는 대웅보전을 비롯해 승방, 만세루, 천왕문 등 많은 건물이 밀집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북한산성 축성 이후인 1715년 136칸으로 중창했으나 1904년 8월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소실됐다고 한다.

이렇듯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북한산의 불교문화는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화했다. 때로는 왕실과 귀족 등 지배계층을 위한 신앙적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으며, 때로는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호국적인 신념을 발현하기도 했다.

그 결과 북한산에는 시공을 초월해 다양한 층위를 가진 유적과 각 시대의 정신이 담겨 있는 많은 유산들이 전해오고 있다.

/김수현 고양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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