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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건축’ 리옹의 5대 프로젝트중 정점지 둘러보는 행운

이한숙 작가의 감성여행기
☞피르미니 베르의 르 코르뷔지에 사이트

 

 

아차하면 기차를 놓칠 상황 턱에 숨차도록 뛰어
‘혁신 주거지’ 20세기 전세계 건축계 널리 회자
삼각형 디자인 조합 도시 건축공간에 새 활력 줘

현지인에 길 물으니 멈출줄 모르는 친절한 설명
버스타기 포기 걷고 또 걸어서 찾던곳 도착
투어출발지 먼거리… 다행히 현지인이 차 태워줘

전날과 다름없이 에보 마을들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좋은 수도원 식당에서 검소한 식사를 마친 후 아브렐 역사를 향해 언덕길을 내려갔다.

S자로 구불어진 산길을 걸어내려가는 동안 촉촉하게 이슬을 머금은 푸른 초원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초록의 대지는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주변의 단풍나무들과 잘어우러졌다. 소리없이 역동하는 아침의 기운이 호흡을 타고 내 몸 속으로 파고 들었다. 이런 기운을 나보다 먼저 누리는 자들이 있었으니 소와 양들이었다. 터치하지 않아서 아름다운 자연, 있는 그대로 충족감을 준다. 무얼 해야한다는 요구가 내 안에 없으니 보이는 모든 것이 다툼없이 내 안에 스민다.

결과를 내려놓으면 과정은 그만큼 즐거워진다. 결과 속에 있을 거라고 믿는 보상은 과정 속에 이미 다 녹아있다. 복은 무엇을 이루어서 받는 인과응보의 선물이 아닌지도 모른다. 나를 내려놓고 상대에게 온전히 맘을 열 때 저절로 오는 것이다. 자연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른다. 복은 오로지 신의 선물이다.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계획하려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고 그래서 저항이 많이 생긴다. 저항은 삶을 뻑뻑하게 하고 병들게 한다. 여행은 저항을 놓게 한다. 넉넉함의 원천에 대해 자신에게 묻게 한다.
 

 

 


기차가 론강과 손강을 차례로 건너 페라쉬 역에 도착했다. 프로방스 여행을 하는 동안 늘 곁에 따라다니던 론강은 이곳까지 이어져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은 마음을 안도하게 하고 따뜻하게 한다.

매표소에 가서 피르미니 표를 산다. 28유로 왕복표다. 좀더 시간 여유가 있었더라며 왕복표를 사지 않았을 것이다. 자유, 그래서 더 사모하게 된다. 자유에의 갈망, 그것이 나를 길에 서게 했고 앞으로 더 길에 세우게 될 것이다. 시간에 대한 미진함에도 불구하고 일정에 없던 피르미니로 가서 르코르뷔지에를 더 만나보기로 결정하지 않았나. 지금 내 가슴이 떨린다는 것이 중요하다.

기차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아 플랫폼으로 서둘러 갔다. 그러나 J플랫폼은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아차하면 기차를 놓칠 상황, 숨이 턱에 차도록 뛰었다. 다행히 그곳이 출발역이고 우리를 지켜본 승무원이 기차를 대기시켜줘서 무사히 탈 수 있었다.

내 손에 들려진 팸플릿에는 ‘구현된 유토피아, 20세기 건축의 다른 견해’라는 제목이 달려있고, 리옹 지역 다섯 곳에서 진행된 혁신 주거지 개발에 대해 소개되어 있었다. 이 개방은 미래 비전을 가진 건축가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막강한 후원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리옹시의 거대 프로젝트였다. 이들은 새로운 건축과 도시계획이 더 나은 세상을 구현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개발을 진행했던 것이다.
 

 

 


리옹지역 다섯 곳의 프로젝트는 그 혁신의 정신으로 20세기 전반에 걸쳐 전세계 건축계에 널리 회자됐다. 리옹(토니가르니에 시티) 및 빌뢰르반(그라테시엘그라트-시엘 카르티에)에서 시작한 선구적 아방가르드는 에보(라투레트 수도원)와 피르미니(르 코르뷔지에 사이트)에서 정점에 이르렀고 그 중심에는 르 코르뷔지에가 있었다. 피르미니는 재건축 및 고층단지라는 맥락 속에서 모더니티가 풍미했던 곳이다. 지보흐에서는 삼각형 디자인의 조합으로 도시 건축 공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새로운 시도가 이뤄졌다. 전혀 사전 지식 없이 온 리옹에서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정점을 찍는 두 곳을 둘러보게 되는 행운을 얻어 이번 여행은 의도치않게 건축에 편향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피르미니에 역사에 도착해 광장으로 나오자마자 현지인을 붙잡고 길을 물었다. 불어로 설명해서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얼마나 열심히 설명하는지, 그의 몸 전체가 연장된 입이었다. 우리가 알아들었다고 여겨질 때까지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메르시!”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하며 인사를 했다. 사실 잘 알아듣지 못했다. 버스 타는 건 포기하고 지도를 들고 걷기로 했다. 지도와 실제거리 사이에는 오차가 있어서 생각보다 많이 걸었다. 유서깊은 공동묘지를 지나자 공원이 나타나고 그 공원을 가로질러 가니 그곳이 우리가 찾던 곳이었다. 힘들었지만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간판을 보지 않아도 그곳이 르코르뷔지에 사이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몬드리안 격자무늬와 시멘트 열주 등 라투레트에 적용된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특징이 여기서도 재현되고 있었다.

마침 사이트 전체를 돌아보는 투어가 30분 후에 있다고 했다. 불어로 진행되는 투어였지만 돈을 내고 신청했다. 안내소에서 안내를 해주던 아가씨가 오늘의 투어가이드라고 했다. 그런데 투어시작점이 단지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진 ‘우니테 다비타치옹’(복합주거단지-아파트)이어서 갈 방법이 묘연했다. 걷기엔 먼 거리였다. 감사하게도 투어를 같이 신청한 현지인들이 같이가자며 차에 태워줬다.

파리에서 놀러온, 현지인 부부(다비드와 크리스티나)의 친구 아니(Annie)가 중간에서 영어로 통역을 해줘서 소통에 불편이 없었다. 고맙게도 그녀는 투어 가이드가 설명하는 것까지 상세히 통역해줬다. 영어선생을 한다는 그녀의 문화 소양은 뛰어났다. 이곳에 가자고 친구부부에게 제안한 것도 그녀였다고 한다. 덕분에 건축을 생각하는 르코르뷔지에의 마음과, 그의 생각이 건축물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직접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좋아하고 감응하는 방식이 닮아서 우리는 쉽게 친구가 됐고 사이트의 다른 건물을 다 돌아서 역에서 헤어질 때까지는 우리는 좋은 동행이 됐다.
 

 

 


르 코르뷔지에 사이트의 총 4개 작품 중에 가장 마음을 끈 건 역시 피에르 성당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마지막 설계 작품이다. 호세 우브러리가 스승 르 코르뷔지에 사후 41년 만인 2006년 완공했다. 그가 설계한 롱샹성당을 가보고 싶었지만 못가본 나에게는 피에르성당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내부 곳곳을 돌아보며 여러 위치에서 빛의 샤워를 체험해봤다. 거장이 연출한 빛의 긴장 속에 나를 조용히 맡기는 일은 그대로 예배였다.

유토피아 프로젝트 중에 나를 끈 또 하나의 장소는 리옹 8구에 위치한 토니 가르니에 박물관이다. 피르미니에서 돌아온 후 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토니 가르니에는 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발명하고, 공업도시계획을 설계한 리옹 출신의 프랑스 건축가다. 토니 가르니에가 1930년대에 만든 건축물에 그가 생전에 설계한 건축물들을 25개의 벽화로 재생, 그를 기념하는 야외 박물관을 만들었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위대한 건축가를 위해 아파트 외벽을 거대한 캔버스로 삼은 리오네즈들의 발상이 경이로왔다. 상식을 깨는 이런 파격적인 재치야말로 예술가들이 숨쉴 문화적 토양이 아닌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1991년,이 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리옹의 구시가지가 건축의 생성과 진화를 잘 보여주는 귀중한 보고라고 인정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보다 7년을 앞섰다. 얼마나 잘 지었으면, 또 보수를 얼마나 잘했으면 193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 아직도 이렇게 튼튼하게 유지되는지, 그 점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전에 공부하지 않고 떠날 때 여행의 예기치않은 즐거움은 배가된다. 그러나 아쉬움도 있다. 코 앞에 멋진 유적지가 있었는데도 지나치고 못봤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될 때가 그렇다. 생각해보면 아쉬움도 일종의 심리적 저항이다. 삶의 무수한 저항들을 좀더 쉽게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면 여행이 우리에게 가르칠 바를 가르친 것이다. 직관을 신뢰함으로 눈 앞에 길이 열리는 경험을 좀더 자주 하게 된다면 그 역시 여행이 주는 특혜를 제대로 누리는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 비행기에 오르며 “참 좋은 여행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래도 이미 머릿속에 다음 여행지를 떠올리고 있다면 그 여행은 당신에게 줄 것을 다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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