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형성되면서 적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해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성을 쌓았다. 적으로부터 방어를 할 목적으로 만들다보니 성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희생도 있었지만, 탄탄한 성은 지금까지도 남아 역사의 이야기를 전해주곤 한다.
유럽의 성은 입구에 수십m 높이의 땅을 둘러파고, 성에서 내려주는 다리를 통해서만 통과할 수 있도록 했다. 성안의 공간은 대부분 좁고 복잡하다. 왕을 죽이기 위해 자객이 침투해도 자칫 성 안에서 길을 잃을 정도다.
일본을 대표하는 오사카성도 비슷한 형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3년 건립한 오사카 성의 천수각은 35m 높이의 5층 규모인데, 내부를 복잡하고 설계하고, 방을 작게 만든 점은 서양의 성 구조와 비슷하다. 모두 막대한 인력의 희생을 바탕에 둔 성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성은 어떠했을까.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성을 축조해 노동력을 최소화하고, 외적 방어라는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성안 거주자들의 소통을 염두에 둔 성의 구조라는 특징을 지녔다. 국내에는 삼국시대 흙으로 쌓은 토성에서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쌓은 수원 화성까지 수많은 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연천의 고구려 3성은 천년을 훌쩍 뛰어넘은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구려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광개토대왕, 장수왕이 한때 충주까지 진출하면서 유적비를 남겼지만, 고구려 문화의 중심도시가 북한 지역에 위치해 있고, 1500년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남은 남한 내 유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연천군은 남한 지역에서 고구려의 영향이 가장 오랫동안 이어진 곳이다보니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겨져 있다. 대표적으로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3곳의 성터가 남아 고구려인의 강대한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임진강변 주상절리 절벽위에 위치한 고구려성은 성 좌우로 20m 높이의 절벽이 위치해 있어 강을 건너 공격해야 하다는 점에서 천혜의 방어요새라 할 수 있다.
호로고루는 이 부근의 지형이 표주박처럼 생겼다고 해서 명칭이 지어졌다는 설과 고을을 뜻하는 ‘홀, 호르’와 성을 뜻하는 ‘구루’가 합쳐졌다는 설이 전해온다.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한 호로고루는 원당리에서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지류로 인해 형성된 약 28m 높이의 현무암 대지 위에 조성된 성이다.
이곳은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구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임진강 하류에서 배를 타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에 자리해 있다.
‘삼국사기’ 등을 보면 삼국시대 한강을 경계로 대치했던 고구려군이 백제 수도 한성을 공격하는 길은 평양~개성~문산 구간이 아니었다. 평양에서 동쪽으로 우회해 호로고루 앞 여울목을 지나면 바로 의정부로 들어서는데, 고구려군은 이 길을 따라 백제와 전투를 벌였다.
그만큼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호로고루는 중요한 군사적 전략지였다.
성은 북동쪽에서 남서 방향으로 흐르는 임진강의 천연절벽을 따라 위치해 있으며, 성벽의 전체 둘레는 401m이며, 내부 면적은 606㎡다. 동쪽 벽은 여러 번에 걸쳐 흙을 다져 쌓은 위에 돌로 성벽을 높이 쌓아 올려 석성과 토성의 장점을 적절하게 결합한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고구려 수도인 중국 집안(集安)의 국내성(國內城)과 평양의 대성산성(大城山城) 등에서도 확인된 고구려의 특징적인 축성기법이다.
성벽 중 가장 높은 동벽 정상부와 서쪽 끝부분에는 장대(將臺)가 설치되었으며, 성으로 진입하는 문지는 동벽 남쪽을 제외하고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성은 통일신라 시대 이후 기록에서 사라졌다가 조선 효종 7년(1656년) 편찬된 ‘동국여지도’에 삼국시대 유적으로 소개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진행된 학술조사를 통해 성의 존재가 알려졌으며, 1991년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이뤄졌다.
이곳에서 구석기시대 주먹도끼를 비롯하여 삼국시대, 조선시대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고구려 기와류다.
한 고구려의 토제 모형과 저울추와 도침, 삼족벼루, 도침형태의 토제품 등 지금까지 출토 예가 없는 다양한 유물자료가 출토됐다. 금속유물로는 화살촉과 도자류, 금동불상 등이 출토됐다.
당포성(堂浦城)은 당포나루로 흘러 들어오는 당개 샛강과 임진강 본류 사이에 형성된 약 13m 높이의 성곽으로, 삼각형 절벽 위 대지에 쌓은 성이다.
성의 형태는 호로고루 및 은대리성과 매우 유사하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수직단애를 이루지 않는 동쪽에만 석축성벽을 쌓아 막았다.
동벽에서 서쪽끝까지 길이는 200m에 달하며, 당포성 뒤로는 개성으로 가는 길목인 마전현이 위치해 있다. 이곳은 양주 분지에서 북상하는 적을 방어하기에 필수적인 지형조건이며, 1994년 처음 소개됐고, 2003년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곳에서는 성 내부는 신라계 유물이 다수 출토됐으며, 고려~조선시대 와편도 다수 발견됐다.
유물은 신라계 유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석축이 있는 부분의 퇴적토와 성돌 사이에서 삼국시대와편을 포함하여 고려-조선시대의 와편도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성벽 기저부에서는 경질무문토기편과 타날문토기편이 확인되었다. 또한 성 내부에서는 고구려 토기편과 고구려 기와편들이 다수 출토됐다.
은대리성은 한탄강과 장진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천 침식으로 형성된 삼각형의 대지 위에 지어졌다. 이곳은 서울과 원산을 잇는 교통로로 활용됐던 추가령 구조국과 맞닿아 있어 수로와 육로 어느쪽이든 주변 지역과 교통이 매우 편리한 곳이다. 은대리성은 동서 400m, 남북 145m로 둘레가 1km가 넘으며, 면적도 3만2600여㎡에 이른다.
성 내에서는 고구려 토기와 소량의 백제 토기, 철기 등이 출토됐다. 이를 토대로 볼 때 고구려에 의해 5세기 이후 이 성이 축조됐으며, 신라 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는 점으로 볼 때 삼국시대 이후에 폐성됐을 가능성이 높다.
연천에 가면 볼거리가 많다. 또 DMZ를 따라 가는 안보관광도 인기다. 하지만 고구려 3성을 찾아 나제연합군과 맞서면 한반도 통일을 꿈꿨던, 도도히 흐르는 강과 함께 1500여 년 전 웅대했던 선조들의 기상을 한번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 경기신문 = 안직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