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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근초고왕이 백제의 시조라고 우기는 역사학자들

삼국사기 불신론 비판①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한국 역사학계에는 다른 나라 역사학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 교리들이 있다. 국민들에게는 비밀로 삼고, 자신들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교리다. 그중 하나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김부식이 만든 가짜라는 논리다. 한국 국민들은 물론 초등학생들도 삼국의 건국시기를 물으면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신라는 서기전 57년, 고구려는 서기전 37년, 백제는 서기전 18년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 나라 역사학계를 장악한 강단 사학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 때 만들었던 국정 교과서와 현 정권에서 사용하는 검인정 교과서는 큰 차이가 있을까? 99%는 그 내용이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예로 천재교육에서 발행한 검인정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보자. 이들은 삼국의 건국시기를 부정하기 위해 ‘국가의 기틀’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삼국이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는 차이가 있다. 고구려는 2세기, 백제는 3세기, 신라는 4세기로 보고 있다.”

 

고구려는 6대 태조왕(재위 33~146) 때, 백제는 8대 고이왕(재위 234~286년) 때, 신라는 17대 내물왕(재위 356~402년) 때 나라가 되었다는 논리다. 그 전까지는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고구려 태조대왕은 후한(後漢)을 여러 차례 공격해서 중국 기록에 나오기 때문에 일찍 국왕으로 인정받는 행운아(?)다. 그렇다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태조대왕의 기록을 모두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삼국사기’는 태조대왕이 재위 3년(55)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에 대비했다(築遼西十城, 以備漢兵)”고 말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는 그 주석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요하의 서쪽 지역을 요서라 칭하는데, 중국 후한대에는 이곳에 요서군이 두어져 있었다. 이 시기에 고구려가 중간에 있는 요동군을 넘어 요서 지역까지 진출하여 이곳에 10개의 성을 쌓았다는 것은 어떤 착오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태조대왕이 요서에 10개 성을 쌓았다는 기사는 ‘어떤 착오’ 곧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조선 후기 순암 안정복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고구려가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 한나라에 대비했다”라고 썼지 ‘착오’ 운운하지는 않았다. 조선의 역사학자들 중 ‘삼국사기’를 가짜라고 본 학자는 없었다. 그럼 누가 가장 먼저 ‘삼국사기’를 가짜라고 주장했을까? 물론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다.

 

 

일본인 학자들의 ‘삼국사기’ 비판

 

‘삼국사기’를 포함한 모든 역사사료는 사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비판에는 논리가 있어야 한다. ‘삼국사기’ 기록이 가짜라고 주장한 최초의 학자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의 국학자였던 나가 미치요(那珂通世:1851~1908)였다. 나가 미치요는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서생이었다가 그가 세운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역사를 공부한 후 1896년에는 도쿄제국대 강사가 되었다. 나가 미치요는 1900년에는 고등관이 되었는데, ‘가라고’라는 논문에서 가야가 임나이자 고대 야마토왜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한 황국사관(皇國史觀) 논자였다. 나가 미치요가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한 것은 임나일본부설을 사실이라고 우기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시각으로 보면 고대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일본서기’의 기사가 명백한 거짓이므로 ‘삼국사기 불신론’이라는 희한한 이론을 발명한 것이다.

 

나가 미치요는 고구려는 6대 태조대왕, 백제는 12대 계왕, 신라는 16대 흘해왕 이전의 기년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백제는 13대 근초고왕이 첫 임금이고 그 전의 ‘삼국사기’ 기록은 가짜라는 것이다. 그 후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했다. 도쿄제국대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물론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1869~1943) 등이 나카 미치요의 뒤를 이어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했다. 아사미 겐타로는 1906년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와서 통감부의 법무원(法務院) 평정관(評定官), 조선총독부 검사와 판사를 역임했고, 1916년에는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古蹟調査委員會)의 위원도 겸임했다.

 

‘삼국사기’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비판한 일본인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1873~1961)였다. 만주철도에서도 근무한 쓰다 소키치는 와세다 대학에서 남한 강단사학의 태두 이병도를 가르쳤는데, 지금까지 한국 사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다. 쓰다 소키치의 주장 또한 간단하다. ‘삼국사기’는 ‘일본서기’에 비추어 보면 가짜라는 것이다. 쓰다 소키치가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가짜라고 부정하는 논리를 몇 개만 살펴보자. 쓰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 등은 가짜고 근(近)자를 붙인 후대의 근초고왕, 근구수왕 등만 진짜라고 주장했다. 나가 미치요와 같이 근초고왕이 백제의 시조라는 주장이다. 쓰다 소키치는 이렇게 주장했다.

 

“백제의 실제의 건국과 ‘삼국사기’ 기록(서기전 18년)과는 340~350년간의 차이가 생기므로 이것을 메우기 위하여 온조왕 이후 12대 계왕(契王)까지의 국왕을 조작하였다. 신라인이 조작하였지만 신라사를 길게 하기 위하여 백제사도 고구려사도 길게 잡았다(쓰다 소키치, ‘백제에 관한 일본서기의 기재(百濟に關する日本書紀の記載)’)”

백제 시조 온조왕부터 12대 계왕(재위 344~346)까지는 모두 조작이고 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이 백제의 건국시조라는 주장이다.

 

 

‘삼국사기’와 너무도 다른 ‘일본서기’

 

국내외에서 이 분야를 가장 깊게 연구한 고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는 쓰다 소키치가 11가지 논리로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가짜라고 주장했다고 분석했다. 쓰다의 논리는 “신라·고구려·백제의 건국연대를 거의 20년 간격의 차로 배열한 것으로 보아도 조작”이라는 것이고, “백제의 왕명, 계보, 즉위, 훙거(薨去:세상을 떠남) 등의 기년은 ‘일본서기’가 ‘삼국사기’보다 더욱 정확하다.”라는 것이다. 쓰다 소키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 내렸다.

 

“‘삼국사기’의 계왕(12대) 이전의 백제기사는 모두 사실로서 믿을 수 없으며 그것이 후세의 사가(史家)에 의해서 구조(構造, 조작)된 것이라는 것은…벌써 말할 필요조차 없다.”

12대 계왕 이전의 백제본기는 모두 거짓이라는 쓰다 소키치의 주장이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이야말로 “벌써 말할 필요조차 없다.”

 

나가 미치요나 쓰다 소키치가 13대 근초고왕이 백제 시조라고 우기는 이유가 있다. ‘일본서기’의 신공(神功) 49년조의 내용 때문이다. ‘일본서기’는 신공 49년에 야마토왜군이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서기’는 야마토 왜군이 기수를 서쪽으로 돌려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도륙해서 백제에게 주자 감읍한 백제의 초고왕(肖古王)이 왕자 귀수(貴須)와 함께 야마토 왜에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서기’ 신공 49년은 서기 249년인데, 주갑제를 적용해서 2주갑 120년을 끌어올려 369년의 일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초고왕이 백제의 근초고왕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이것이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해 임나를 세웠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핵심내용이다.

 

‘삼국사기’는 서기 369년에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 2만 군사를 격퇴하고, 황제의 깃발을 뜻하는 황색 깃발을 휘날리면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했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의 눈으로 보면 369년에 야마토왜가 가야에 임나를 설치했다는 서술이나 근초고왕이 야마토왜에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는 서술 등은 모두 거짓이기 때문에 일본인 학자들은 ‘‘삼국사기’ 불신론’이라는 희한한 논리를 발명한 것이다. 그런데 쓰다 소키치 등의 이런 억지에 대해 남한 강단사학계의 고 이기백 서강대 교수는 “(일본인 학자들의 삼국사기 비판은) 근대적·학문적이자 엄격한 비판이며 철저한 비판이다”라고 높게 평가했다. 일본인들의 시각으로 자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대학 강단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큰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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