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창이란 역사학자
가끔 김해 김씨나 경주 김씨를 만나면 자신은 흉노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생각의 뿌리를 찾아보면 문정창(文定昌:1899~1980)이라는 역사학자를 만나게 된다. 문정창은 1923년 경상남도 동래군 서기를 시작으로 1943년 황해도 은율군수를 거쳐 1945년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으로 재직하던 중 일제 패전을 맞았다. 1941년에는 《조선의 시장(朝鮮の市場)》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는데, 일제강점기 때 관료경력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한 이병도·신석호도 뒤늦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친일인명사전》에 같이 등재되었지만 문정창과 이병도·신석호의 광복 후 행보는 사뭇 달랐다. 이병도·신석호는 광복 후 친일세력이 다시 집권하자 조선사편수회 경력을 발판삼아 역사학계를 장악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하나뿐인 정설(定說)로 승격시켰다. 반면 문정창은 일제 때 관료경력을 반성하면서 이병도·신석호가 고착화시킨 일제 황국사관을 올바른 민족사관으로 바꾸는 일에 남은 생애를 바쳤다. 한국의 모든 대학 사학과를 장악한 이병도·신석호의 제자들이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고를 써가면서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하나뿐인 정설이라고 떠받드는 동안 문정창은 자기 돈을 써가면서 외롭게 민족사학의 외길을 걸었다. 이병도·신석호가 일제강점기를 교묘한 언설로 옹호한 반면 문정창은 《근세 일본의 조선침탈사(1964)》, 《(군국일본)조선강점삼십육년사((軍國日本)朝鮮强占三十六年史:상·중·하, 1965~1967)》 등의 저서로 일제의 한국강점의 실상을 강력히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단군조선 사기연구(史記硏究:1968)》를 필두로 《일본상고사(上古史:1970)》, 《한국고대사(상·하, 1971)》 등 거의 매년 한국사의 첫 뿌리를 바로잡는 역작들을 출간했다. 현재 이병도·신석호의 제자들이 완전히 장악한 한국의 모든 대학 사학과에서 문정창의 저서는 모두 금서이다. 자신들이 떠받드는 조선총독부 역사관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해 김씨나 경주 김씨들이 자신들을 흉노의 후손으로 여기는 계기가 된 저서는 문정창이 1978년에 출간한 《가야사》이다.
*가야 왕실은 왕망의 후손이다.
40여 년 전에 역사학자 문정창이 쓴 《가야사》는 놀라운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육가야의 건설자인 여섯 개의 알은 신라 남해왕 4년(서기 7) (한나라) 평제(平帝)를 살해하고, 2백년 사직의 전한(前漢)을 찬탈하여 17년 사직의 ‘신제국(新帝國)’을 건설하였던 왕망(王莽)의 족당(族黨)이었을 것이다(문정창, 《가야사》)”
6가야 왕실이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던 왕망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다. 한(漢)나라는 전한과 후한으로 분류된다. 중국 학계에서는 전한의 수도가 서쪽인 서안(西安)이고, 후한의 수도가 동쪽인 낙양(洛陽)이라는 이유로 각각 서한(西漢:서기전 202~서기 9)과 동한(東漢:서기 25~서기 220)으로 부른다. 서한과 동한 사이에 있던 나라가 신(新:서기 9~서기 23)나라다. 이 신나라를 세운 인물이 동한의 외척(外戚)이었던 왕망인데 그가 가야 왕실의 조상이라는 이야기다.
서한은 10대 선제(宣帝:재위 서기전 74~서기전 48)가 세상을 떠난 후 원제(元帝)·성제(成帝)·애제(哀帝) 등 용렬한 군주들이 뒤를 이으면서 국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13대 애제가 병사하자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왕망은 9살짜리 중산왕(中山王) 유간(劉衎)을 내세웠는데, 그가 바로 14대 평제(平帝:재위 서기전 1년~서기 5)다. 평제는 원시(元始) 5년(서기 5) 12월 세상을 떠났는데, 열다섯 어린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왕망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왕망은 내친 김에 한나라는 무너뜨리고 신(新:서기 9~23)나라를 세웠다. 왕망이 중국의 역사가들에 의해 수없이 난도질당한 이유에는 그의 계보가 이민족과 닿아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왕망은 중국역사상 걸출한 개혁정치가였다. 그는 소수의 귀족들이 대부분의 토지를 차지하면서 농민들이 몰락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정전제(井田制)를 추진해 전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려고 했고, 노비 매매도 금지시켰다. 왕망이 가야왕실의 조상이라는 문정창의 이야기는 왕망의 선조 김일제(金日磾)의 인생사를 만나야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다. 문정창은 그 사연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왕망은 휴도왕(休屠王)의 아들 김일제의 증손(曾孫)이며, 김일제는 서기전 120년 한무제(漢武帝)의 표기장군 곽거병(霍去病)이 농서(隴西)에서 사로잡은 휴도왕의 아들이다(문정창, 《가야사》)”
김수로왕은 신나라를 세운 왕망의 족당인데, 왕망은 휴도왕의 아들 김일제의 증손이라는 것이다. 한국사를 제대로 알려면 반드시 중국사를 같이 공부해야 하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휴도왕은 흉노의 제후왕이었다. 흉노는 황제인 칸(汗:한) 밑에 왼쪽 강역을 다스리는 좌현왕(左賢王)과 오른쪽 강역을 다스리는 우현왕(右賢王)이 있었다. 휴도왕은 혼야왕(渾邪王)과 함께 오른쪽 땅을 다스리는 우현왕이었다.
*중국인들이 지은 흉노라는 이름
중국과 관계를 맺었던 나라들의 경우 자신들의 국사를 남기지 못한 나라들은 중국에서 일방적으로 나라 이름을 지어 불렀다. 중국은 자신들과 적대적이었던 나라들의 이름을 아주 악의적으로 지어 ‘정신승리’를 구가했는데, ‘오랑캐 종놈’이라는 뜻의 흉노(匈奴)가 대표적인 작명이다. 농경민족이었던 한족은 기마민족이었던 흉노에게 큰 곤욕을 치렀다. 한 고조 유방은 중원을 제패한 기세를 타서 흉노정벌에 나섰다가 호되게 당했다. 한 고조 7년(서기전 200) 유방은 22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정벌에 나섰다가 큰 추위를 만났는데, 《사기》 〈한 고조 본기〉는 “사졸들 중에서 손가락이 떨어진 자가 열에 두세 명이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동상에 걸려 손가락이 떨어지는 고초를 겪었다. 게다가 한 고조 자신도 현재 산서성 대동(大同) 동쪽에 있던 백등산(白登山)에서 칠일 간 포위되어 죽을 위협에 처했다가 막대한 뇌물을 주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후 한나라는 매년 막대한 물자를 흉노에 조공으로 바치고 평화를 구걸하는 사실상 제후국으로 전락했다. 중국 역사가들이 흉노를 극도로 저주한 배경은 이런 사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타개한 군주가 바로 한무제(漢武帝)이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아직도 한 무제를 뛰어난 군주로 생각한다. 문정창이 말한 것처럼 한 무제는 곽거병(霍去病)을 보내 흉노를 격퇴시킨 것이다. 곽거병은 한 무제의 황후 위자부(衛子夫)의 조카였다. 한 무제의 황후 위황후와 곽거병의 어머니가 자매간이었다. 곽거병은 18세 때 위황후의 추천으로 궁중에 들어와 시중(侍中)이 되었는데, 원수(元狩) 2년(서기전 121) 기병 1만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해서 흉노의 우현왕이었던 휴도왕과 그 태자를 사로잡았는데, 그 태자가 바로 가야 왕실의 조상이라는 투후(秺侯) 김일제라는 것이 문정창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