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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36 - 백령도 자존심, 중화동 그리고 주민의 삶

 백령도 서남쪽 해안에 위치한 중화동(中和洞). 1802년에 저술된 ‘백령진지(白翎鎭誌)’에는 중화진(中和津)으로 기록돼 있다. 다른 지역은 모두 동(洞)으로 표기돼 있지만 이곳만 유일하게 진(나룻터)으로, 긴 역사를 간직한 포구였음을 알 수 있다.

 

중화동 마을은 포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진촌(津村)인 셈인데, 현재 53세대 1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은 백령도 백고구마의 자존심이자, 우리나라 기독교의 온실 역할을 한 성소인 중화동 교회가 자리한 곳이다.

 

마을로 들어서면서 담장에 장식된 사진 자료는 과거 초기 종교의 맥락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특징을 보여주며, 현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동네 주민들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인 셈이다. 시너지 효과일까? 금연과 절주를 통한 신앙윤리를 실천하면서 건강과 장수의 행운을 얻었다 하니 일석이조가 아닐까?

 

아늑한 만(灣)으로 이뤄진 해안가. 또 해안가를 따라 조성된 중화동 마을. 마을 벽화 사이를 걷다보면 100여 년 전 중화동 포구를 드나들며 신앙 활동을 하던 선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현재는 마을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한국 기독교 전래 선구지로 표지석까지 세워 알리고 있으며, 나아가 중화동 교회를 근간으로 백령도 근대문화 조성을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이 있으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중화동 특산물과 교회를 중심으로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 체크 포인트 : 중화동 특산물, 백고구마의 자존심 최의신씨

 

중화동은 백령도 특산물인 백고구마의 주 생산지다. 백고구마의 자존심을 지키고 계신 중화동 토박이 최의신씨. 백령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고구마를 재배하며, 한때는 1000상자 이상을 생산한 백고구마 재배의 베테랑이시다.

 

그의 전언에 의하면 백령도에 백고구마가 들어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미 과거 선친 때부터 재배해 왔으며, 종자는 중국 산동 반도에서 들어왔다고 전한다. 일반적으로 고구마가 일본에서 들어온 거에 비하면 다소 이례적인데, 지리적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껍질이 희어 붙여진 백고구마! 익히면 그 속은 약간 노랗고 놀라울 정도로 달다. 어느 자료에 의하면 일반 고구마에 비해 당도가 5배나 된다고 하며, 백령도에서는 과일만큼 달고 맛있다 하여 일명 지과(地果)라 부른다.

 

현재도 주변 일부 섬 지역에서 재배는 하고 있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으며, 백령도를 벗어나면 그 맛이 나지 않는다. 그 만큼 백령도의 특산물로서 백고구마는 지역의 자연환경, 토질과 전문 경작인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인 셈이다.

 

봄철 육묘부터 삽식, 본포 관리는 물론 경작지의 지세, 토질과 일조량, 수확 후 보름 간의 숙성 기간 엄수, 저장에 이르기까지 당도 관리를 위한 철저한 ‘백고구마 준칙’을 지키고 있다. 무엇보다 배수가 잘 되는 경사진 지형, 일출에서 일몰에 이르는 긴 하루의 충분한 일조량, 판매 전 숙성 기간 확보 등 꼼꼼한 준칙에서 백고구마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다.

 

▶ 체크 포인트 : 40년 전 백령도 최초 FRP 선박 운영 오경록씨

 

백령도 이웃인 황해도 장산곶을 배경으로 한 서도민요로서 대표적인 몽금포 일명 장산곶 타령이 있다. 1900년대 초반에 불려진 가사의 일부를 소개한다.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금일도 상봉에 님 만나 보겠네. ~중략~ 임 실러 갈 적엔 반 돛을 달고요, 임 싣고 올 적엔 온 돛을 단다네.”

 

노래에 담긴 선박은 돛을 이용한 범선(帆船), 선체는 목선이다. 세월이 흘러 목선은 어떤 재료의 배로 변화했을까? 중화동에 거주하는 오경록씨는 약 40년 전 백령, 대청, 소청도 3도 중 목선에서 섬유 강화 플라스틱(FRP)으로 제작한 배를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가 운영했던 ‘아랑2호’가 바로 그 선박이다. 현재는 임대된 상태이지만 선박을 통해 백령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으니 충분히 소개할 만한 일이다. 섬 지역에서 배는 생계 수단이자 유일한 교통수단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FRP가 1940년대 미국에서 처음 개발된 이래 기존의 석재, 목재, 금속을 대체하며 이제는 대부분의 배가 이 소재를 사용하고 있다. 선박사에 작은 혁명이었던 것이다. 도서 지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선박, 향후 어떤 재료의 선박이 누구에 의해 선보일지 주목할 대목이다.

 

▶ 체크 포인트 : 중화동 해안가의 까나리 삶던 ‘덕’

 

중화동 마을에 들어서기 전 먼저 마주하는 곳이 까나리 공장이다. 공터에 빼곡하게 들어선 붉은 색 고무 드럼통, 그리고 뚜껑 위에 올려진 일정한 크기의 부정형 돌들이 정겹다. 까나리 액젓으로 숙성돼 가는 연차를 표시하고 있다.

 

보통 까나리는 농어목 까나리과에 속하는 어류로, 우리나라의 경우 백령도에서 많이 잡히며 중화동도 양력 5월에서 6월 하순(하지) 즈음까지 어민들의 손은 매우 분주하다. 과거 1960~70년대 한때는 연평도 못지않게 조기가 유행해 많은 수입을 얻기도 했지만 지금은 까나리가 대체하고 있다.

 

까나리 가공과정에서 필수품이었던 해변가의 ‘덕’. 덕은 배에서 갓 잡아 올린 까나리를 삶던 시설이다. 시멘트로 불을 지피던 화덕을 만들고 그 위에 철 솥을 걸어 물을 끊이고 까나리를 삶았다. 그리고 화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시멘트로 연통을 높이 세웠다.

현재도 중화동 해안가에는 온전한 시설물이 서, 너개 남아 형체만 유지하고 있다. 20~30년 전만 하더라도 가가호호 1개씩 있었다고 하나 세월의 무상함 속에 점차 자취를 감추었고 일부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과거 중화동 주민들의 생계 수단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민속 시설물인 셈이다.

 

중화동 농민과 어민의 삶. 해안가에 정착해 생명과 맞바꿔 땅과 바다를 일구며 살아온 중화동 주민들 모두가 영웅이다. 이들이 한목소리로 지금까지 연명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신앙의 힘이었던 것이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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