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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균의 재미있는 仁川 26 - 배다리 헌책방 거리

 배다리 헌책방 거리

“동~인~천, 동인천 여기는 동인천역입니다. 손님 여러분께서는 잊으신 물건 없이 하차, 개찰구로 질서를 유지하며 안녕히 가시기 바랍니다.”

 

느리고 구성진 열차(여객) 방송을 끝으로 출찰구로 나오면 횡 하니 휘파람 소리 같은 바람 부는 역 광장, 발길을 좌 측으로 돌려 길을 재촉하면 배다리 철로교 밑을 통과하게 되는 사람들의 주거지는 송림동과 창영동, 금곡동, 우각리쪽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다.

 

파출소(지금은 없어졌음)를 끼고 바쁘게 우회전하면 접어드는 곳, 헌책방 길이다. 삼거리 길로 금곡과 창영을 가르는 중심의 길 양옆으로 늘어선 헌책방, 그 시절엔 다분히 학문 탐구를 위한 서점이 아니라 살기 어려운 살림살이에 새 책을 살 수 없는 형편에 놓인 학생들의 교과서나 참고서 등 헌책을 사는 행렬들이다.

 

인천의 책 장사라고 하면 ‘인천석금’의 저자 ‘고일’ 선생의 말로는 1930년대 책을 파는 서점이라기보다는 책을 대여하는 곳 대서점(貸書店)이다. 그 주인은 ‘임만호’라는 분으로 성씨에 붙은 어떤 계급 같은 칭호를 가지고 계신 분인데 ‘주간 인천’ 사장 ‘임영균’ 선생의 부친이셨다.

 

지금같이 활자가 아닌 목판이나 모필로 쓴(그림) 2호 활자 크기의 읽기 좋은 큰 글씨이며, 지질은 한지에 기름(동백)을 먹여서 만든 제 책으로 옥루몽, 춘향전, 심청전, 삼국지 등 이야기 감의 책으로 대본한 것이다.

 

근대에 와서 생긴 헌책방 거리는 60년 전쯤 동란 이후 노점상들이 늘어 동구 쪽에 몰리며 헌책방도 생기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잘사는 중구 쪽보다 생활이 어려운 곳으로 모이다 보니 오늘의 배다리 헌책방 거리가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한때 인현동 학생교육문화회관 옆 공구상가 길에 있다가 월남 파병에 건설의 붐을 타고 형성된 공구상가에 밀려 이주한 곳으로 확실한 헌책방 거리를 만들게 된 것이다.

 

지금도 2대째 운영하는 ‘한미서적’의 ‘장경환’ 점주도 그 때 이주해 지금까지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음을 보면 60여 년 짧지 않은 세월이다. 그 이전에는 ‘글천지 서원’이라는 간판의 서점과 호산나, 동아서림, 수도서점, 재인서점 등이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하나둘 문을 닫고 말았다.

 

지금도 남아있는 서너 개의 서점을 포함해 성했을 때는 서울 못지않은 헌책방 거리를 형성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집현전’은 1959년도에 문을 연 후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집이다. 참으로 대단한 지킴이가 아닐 수 없다.

 

현재 문을 열고 있는 서점을 보면 전자에 언급한 집현전, 한미, 서점조합을 두고 있는 대창, 그리고 국제, 삼성, 창영, 우리서점, 아벨서점 등이다. 이제 남은 서점이 이 땅을 지키며 그 융성했던 시절로 가기까지 버텨주었으면 하는 바람 굴뚝같다.

 

아직도 이 헌책방 거리를 찾는 사람이 적지 않음은 엄청난 새 책의 가격도 가격이겠지만 절판된 책을 찾으려는 마니아들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지학자들도 있겠지만 이 필자의 주위에도 문학을 사랑하는 이에서부터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참으로 많다.

 

주말 일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이곳을 찾는 문필가들은 아직도 이 거리에서 콧등 아래로 흐르는 안경을 고치며 책 고르기에 여념이 없다. 우정 입소문에 서울서 원정 오는 사람들까지 합친다면 명소(?)다운 명소로 인천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돌아가신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내 기억 속엔 ‘글천지 서원’ 주인의 모습이 또렷이 남아있다. 존함 말고는 우리는 늘 별명을 입속에 달았는데, 그 글천지에서 나는 두 마리의 대어(大魚)를 건졌던 일이 있었다.

 

1962년 장마철로 기억되던 일요일, 1955년도에 발행된 유치진 선생의 여섯 번째 희곡집(자매)과 우리 인천의 향토사학자이자 시조 시인이신 소한 최성연 선생의 첫 시조집 은어(銀魚)를 손에 넣게 된 것이다. 그 때 본인의 기분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자본주의는 마흔 살에 백만장자와 정치 권력을 가진 자, 두 가지 목표를 이루려는 젊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체제다. 헌책 마을은 젊고 굶주린 자본주의가 아니라 고향을 걱정하고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중년을 위한 공간이다”라고 한 영국 웨일스 지방의 ‘헤이온와이’의 저자 ‘리처드 부스’의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그가 헤이온와이를 다른 도시와 차별화시킨 것처럼 우리 인천 배다리 헌책방 거리를 어느 도시보다도 차별화해 기적의 거리로 만들어 보자 함이 본인의 속내라면 과한 것일까.

 

도깨비 책방 배다리의 거리에는 역사가 살아있고 문명이 길 따라 흐르며 강을 만들고 있다./김학균 시인·인천서예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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