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난 최근 글 ‘이재명 긴급 기자회견 자처’의 뜻을 톺아보고자 한다. CBS노컷뉴스 김기용 기자의 기사를 비롯한 몇 개 언론의 보도다. 하나를 인용한다. 《최측근 영장 청구에 이재명 긴급 기자회견 자처 / 이재명 "특검은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들 망라해야" / "거부할 경우 민주당이 가진 힘 통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 민주당, '특검 카드'로 당대표 '사법리스크' 국면 전환 시도》 ‘자처’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으면 아기집 자궁(子宮)을 한방(韓方)에서 이르는 의료용어인 자처(子處)와 함께, 자처(自處)라는 말이 나온다. 한자가 다른, 아기집 子處 얘기는 아닐 터이니 自處가 (흔히) 쓰는 말이겠다. 풀이가 세 가지다. 1.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여겨 그렇게 처신(處身)함, 2. 자기의 일을 스스로 처리함, 3.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거나 지조(志操)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 등이다. 언론은 이 중 어떤 뜻으로 자처라는 단어를 썼을까. 국립국어원 국어사전의 이 풀이를 저 기사와 함께 살피니 꽤 고민스럽다. 저 글은 《이재명=긴급 기자회견》이라는 ‘수학적 논리로 세상을 묘사한’ 등식(等式)일까? 이재명이 기자회견을 스스로 처리했다고? 또는, 설마
말은 세상(의 모습)을 정직하게 나타내야 한다. 상황을 바르게 표현하지 않는 말은 사람과 사회의 바른 생각을 방해한다. 독하게 말자자면, 기만(欺瞞)이고 사기(詐欺)다. ‘기후변화’의 변화(變化)는 가치 개념이 없는, 무색무취한 단어다. 기후가 변화하고 있단다, 어쩌라고... 하다 여기까지 왔다. 코앞에 닥친 것 아니니 미뤄두자고 했던가. ‘지구온난화’의 검은 구름이 우리(의 의지) 대신 안전핀을 쥐고 흔드는 위태로운 핵폭탄, 지구촌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기후변화가 좋은 점도 있다고 했다. 적극 대응해, 가령 새로운 농사를 짓는 것과 같은 ‘의욕’도 볼 수 있었다. ‘성공사례’로 포장되기도 한다. 대구사과가 춘천사과가 됐다. 불가피한 사정도 있으리라. 당장 먹고 사는 일 급하니, 지금도 그런 생각을 벗지 못하는(않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저 현상의 물밑에 잠긴 의미는 뭐지? 아들딸 챙기면 됐지 뭐가 문제냐고들 하지만, 그 아들딸의 아들과 딸, 손자까지 생각하는 것이 사람됨이고, 덕(德)이다. 자칫 눈앞의 아들딸조차 곧 ‘지구온난화’의 태풍 속에 밀어 넣는 것은 아닌지. 지금 미국서, 방글라데시에서 참사는 벌어진다. ‘강 건너 불’이라고? 그런가! 기후변화
‘심심한 사과’라는 말이 한글날 즈음에 논란이 됐다. 사과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것’이다. 심심하면, 당연히 아니 된다. 마음 전해지도록 진해야 하고, 간간해야 한다. 따분하고 맛없으면 되겠는가. (언어) 전문가들도 걱정한다. ‘심심한 사과’는 문해력 결핍의 상징과도 같다는 얘기들이 무성하다. 그런데 이런 걱정을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슬그머니) 내미는 계기로 삼지 말라는 ‘경고성’ 칼럼도 눈에 띄었다. 그 칼럼의 한 대목 ‘한자 없이 한글만으로도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가능하니 (사회 일각에서는) 딴 생각 말라.’는 취지의 주장이 쟁쟁하다. 이런 논의는 이집트상형문자나 갑골문 같은 어원 공부에 관심이 있는 필자에게 좀 불편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한국어의 어휘와 시민의 어휘(능)력을 망가뜨리지 말자는 것이다. 한자교육은 그 다음의 주제다. 그 논설의 ‘한글만으로도 얼마든지’라는 대목을 거푸 읽는다. 이런 생각에 부응하는 연구와 성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선언’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된다. 이번 경우, ‘심심하다’에 ‘맥없고 맛없다.’는 뜻 말고도, ‘마음의 드러냄(표현)이 깊고 간절하다.’는 뜻도 있음
어리석은 바보, 미치광이 천치... 병 이름 ‘치매’의 한자 癡(치)와 呆(매)의 뜻을 합친 이름이다. 사전은 ‘뇌세포 손상 따위로 인해 지능 의지 기억 등이 지속적 본질적으로 상실(喪失)되는 병으로 주로 노인에게 나타난다.’고 풀이한다. 한자 해석하니, 욕설 아닌가? 불가항력, 어쩔 수 없는 것이 병이다. ‘너’도 ‘나’도 걸릴 수 있는 안타까운 병 ‘치매’도 그렇다. ‘어리석다’거나 ‘미치광이’라는 말이 붙은 ‘바보’라는 명칭, 참 슬프고 어리석다. ‘기왕에 병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니’하고 혀 몇 번 차고 말 일 아니다. ‘한가위 명절에 치매 어르신 잘 보살피자.’는 TV 프로그램 자막 보며 가슴 아팠다. ‘미치광이 바보 어르신’이라니. ‘지랄’을 이제 병명으로 안 부른다. 대신 간질(癎疾)이다. 문둥병도 ‘문둥이’란 말의 실존 때문에 나병(癩病) 한센병으로 부른다. 전염병(傳染病)의 이름에 든 ‘염병’도 병을 빙자한 욕설로 쓰인다하여 피하는 말이다. 배려이기도 하겠다. 癡呆는 痴呆로도 쓴다. 癡나 痴는 같은 뜻이다. 질병의 대표 기호(글자)와도 같은 녁(疒)자와 의심의 疑나 지식의 知가 합쳤다. 의심하는 병, 아는 것의 병이라는 뜻에서 ‘치’는 어리석다
세기의 장례, ‘유해’는 뭐고 ‘운구’는 또 뭐지? ... 여왕의 유해를 운구차로 옮기는 것은 밸모럴 영지의 사냥터지기들이 맡았다. (뉴시스) ... 여왕 유해 보러 2만 명 밤샘, 조문에 최대 35시간 줄 (국민일보) ... BBC에 따르면 이날 오전 여왕의 운구를 영구차에 실으며 장례가 시작된다. (이데일리) 언론의 기사다. ‘여왕의 遺骸(유해)’는 금방 사망한 주검이 아니다. 추려진 뼈도 크게 보아 주검이라고? 억지다. 유해는 ‘남은 뼈’ 유골(遺骨)이다. 骸(해)의 뼈 골(骨)자를 보라. 다 안 적어서 그렇지,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유해’들이 언론에 떴다. 뉴스1 조선일보 중앙일보... ‘여왕의 운구’를 영구차에 싣는다고 했다. 운구가 뭘까? 높은 사람 주검의 이름일까? 아마 ‘시체 넣은 관(棺·柩)의 운반’을 뜻하는 운구(運柩)를 그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 ‘주검=운구’가 된 것이다. 맞나? 틀렸다. 개념어(槪念語)의 활용, 서툴거나 어색한 것 까지는 ‘새로운 언어적 시도’라고 짐짓 못 본체 한다고 치자. 그러나 잘못된 단어가 공공(公共)의 위치에 놓이면 곤란하다. 사람들이 보고 배운다. 기우(杞憂)일까? 언론 종사자들이 BBC를 인용할 정도로 영
추석(秋夕)의 계절, 가을이다. 가을은 그 저녁(夕) 추석이 정겹고, 그 물결(波) 추파는 은근하다. 추파(秋波)가 무엇인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 바람에 시나브로 일렁이는 호수처럼, 가을의 물결은 조용하고 투명하다. 맑아서 서늘하다. 사람 눈빛이라면 보는 이의 가슴을 싸늘하게 얼려버릴 강렬함을 품었겠다. 사랑을 구하는 여인의 그것이라면 아름다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날카로운 비수(匕首)는 아닐까. (2016년 9월) 언어는 역사를 품는다. 그 틀(프레임)이 보듬었던 지난 사람들의 마음(생각)이 그 글자의 획(劃)과 점(點)에 빼곡히 서렸다. 세상 이치다. 서양 언어와 생각(철학)도 비슷하다. 가을의 물결이 ‘은근한 눈빛’이더니 마침내 ‘엉큼한 아첨’이 되었다. 원래의 뜻을 모르는 이들도 있겠다. ‘추파가 윙크지 왜 가을의 물결이야?’ 하는 질문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사전엔 ‘가을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물결’이 秋波의 1번 풀이다.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은근히 보내는 눈길’과 ‘환심을 사려 아첨하는 태도나 기색’이 2, 3번 풀이다. 초사(楚辭)의 ‘초혼(招魂)’, 초나라 문장(시)의 대표 격(格)인 굴원 등의 작품 모음 중 주목할 시다.
폭우 속에 ‘퇴근한’ 대통령이 집에서 전화로 지시했다. 총리는 ‘자택은 지하벙커 수준’이라고 했다. 대통령실은 ‘계신 곳이 상황실’이라며 시민들 마음을 춥게 했다. 한심(寒心)하다. 일반명사 정위치는 군대 경찰 등 어떤 분야에서는 전문용어이기도 할 것이다. 언론엔 현장이 정위치다. 70년대 얘기, 국회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목격한 정치부기자는 “빨리 사회부기자 보내라.” 전화했다. ‘얼빠진 기자’의 표본으로 언론계에 회자된다. 기자는 정위치인 현장을 향해 제 정신, 얼을 한 순간도 닫으면 안 된다. 허허, ‘따붙이기’나 전화질이 요즘 취재라고? 거의 전 분야에서 현장은 ‘철학’이고 때로 전쟁터다. 얼빠진 인간은 일 망치지 말고 손 놓으면 된다. 정위치, ‘바른(正) 위치’이자, ‘정해진(定) 위치’다. 재앙 때 ‘지도자가 어디에 있는가?’는 상징이자 신호다.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코미디언 출신 어설픈 정치인이 전 국민이 의지하고 세계가 주목하는 ‘힘’이 됐다. 정위치다. 우중충한 얘기. 오세훈 서울시장의 전(前) 시장 시절 2006년 7월. 태풍 에위니아로 전국이 비상이고 시청직원들도 비상근무 중, ‘시장님’은 한정식집 저녁 먹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작자(作者) 조선 문신 남구만(1629~1711)이 관련된 이야기다. 문장과 경사(經史·경서와 사기)에 밝았고 영의정까지 지낸 당시의 ‘셀럽’이다. 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간단한 줄거리와 그것의 취지(趣旨)다. 하루는 낚시를 하는데 물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조과(釣果)가 화끈한 곁의 한 낚시꾼에게 남구만이 물었다. 그 문답(問答)의 기록이 남았다. “똑같이 낚싯대를 던지는데 물고기가 그대의 미끼만 잇따라 무는 이유가 무엇인가? 비법을 가르쳐주게나.”(남구만) “법(法)을 일러드리기는 어렵지 않으나, 묘(妙)를 가르치는 것은 어렵소이다.”(낚시꾼) 남구만이 그 대답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이겠다. 요즘 말로 ‘의미부여’다. 그가 어떤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비유(比喩)의 방법으로 글을 지어냈을 개연성(蓋然性)도 있다. 세상 이치이기도 하리라. 낚시의 방법은 같아도 경험이 주는 절묘한 경지가 어찌 같을까? ‘법과 원칙’을 늘 내세우는 대통령과 ‘완장질’로 헛발질 연발하며 급전직하 지지율에 당황하는 여당의 대표 직무대행(당시)을 생각한다. 낚시의 ‘일반론’은 法이고 물고기를 잘 낚는 ‘비법’은 妙일
미국 언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아베 총살과 관련해 우리나라 안중근 장군의 이등박문 총살(1909년)을 언급한 것을 두고 국내 일각(一角)에서 ‘말’이 일고 있다. ‘이토(이등박문)를 처벌한 것은 독립운동 차원이었다.’는 것이다. WSJ가 말하듯 ‘정치폭력 역사’에 해당하지 않으니, 미국인들의 역사인식 부재(不在)가 드러났다는 얘기다. 먼저 명확히 할 것이 있다. 안중근 장군의 이토 총격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그것처럼) 한일(韓日) 간 전쟁에서의 전투행위다. ‘독립운동’을 넘어서는 뜻이다. 우리 임시정부 김구 주석 등과의 협의를 거친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 두목을 처벌한 하얼빈 역의 총격은 당연하다. 또 당당하다. 그게 그거 아녀? 할 이 있을까? 우리나라를 남한(South Korea)으로 부르는 것과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으로 부르는 것의 차이보다 훨씬 큰 의미의 차이가 있다. 미국(언론)의 ‘정치폭력’ 시각(視角)도, 국내 일각의 ‘독립을 위한 민간운동(캠페인)’ 시각도 교정(矯正)되거나 조정(調整)되어야 마땅하다. 다만 처절한 전쟁이었다. 흔히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때) 했듯, 뒤통수를 몰래 봐버리
옥주현 사태로 헤겔의 변증법을 깨치다. 옥주현이 등장하는 뮤지컬 동네 논쟁에 ‘지양’이라는 말이 고개 들었다. 어떤 문제의 시비를 가리는 도구로 쓰인 이 말,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 ‘샤워기 물 낭비 사태’였다. 옥주현은 공연 날 ... 수증기가 목 관리를 위한 것으로 ... 배우와 관계자들이 ‘물이 낭비되니 지양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물을 쉬지 않고 튼다고... - ‘모든 허위 사실 작성, 유통 등에 대하여 법적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며 ‘당사 및 배우와 관련해 추측성 보도는 지양해주시길 부탁드린다.’고... ‘하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그 단어를 썼다. 다른 기사지만 느낌이나 어색한(서툰) 어휘 전개가 흡사하다. 의도가 불결한, 낚시성 기사로 의심된다. 여러 매체가 약속이나 한 듯 이 기사를 실은 걸 보니 ‘대박’을 기대한 어떤 세력의 작전 아닌가 생각도 든다. 요즘 기자, 언론사들은 참 여러 가지 한다. 독자의 신뢰는 망가지겠고. 한자로 止揚이다. 止는 ‘멈추다’ 揚은 ‘오르다’의 뜻. 옳고 그름 시비(是非)처럼 ‘하지 말자’는 止와 ‘하자’는 揚의 서로 어긋나는 속뜻 단어가 함께 붙었다. 한자는 하나하나가 한 단어다. 한 글자만 써도 되고, 몇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