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너의 노동은 0원. 너의 노동은 자원봉사. 너는 과로하는 백수” 나의 실상이다. 나는 ‘무급’ 마을활동가이다. 그 시작은 이랬다. ‘아이 셋을 데리고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은 없을까?’ 세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과 병행하면서 점차 도시재생, 사회적 경제, 마을공동체 영역으로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 그러다보니 아이를 데리고서 하려던 일은 아이를 데리고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초등학교 돌봄교실에 알아봤더니 자녀를 맡기려면 ‘맞벌이 부부’라야 한단다. 일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재직 증명서’와 ‘의료보험 납부 확인서’를 제출하라는데. 그건 뼈 빠지게 일해도 내가 만들어낼 수 없는 문서였다. 그때 처음 무급으로 일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돈으로 노동의 가치를 매기는 사회에서 돈을 받지 않는 노동에 ‘공권력’이 발부하는 성적표였다.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에 대한 증명서와 확인서였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Shadow Work)이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마을활동은 육아와 가사노동과 함께 대표적인 그림자 노동에 속하고 나는 주구장창 그림자 노동을 해왔다. 임금노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림
한 소녀가 고층 아파트에서 몸을 날렸다. 자살이었다.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아이는 식물인간이 되었다. 죽어도 죽은 게 아니고 살아도 산 게 아닌 어정쩡한 몸이 되어버린 그와 남겨진 가족의 슬픔과 고통을 목격했다. 자신의 몸을 죽임으로써 삶의 끝에 이르고자 했겠지만 그 선택은 모두가 불행해지는 결과를 가져 왔다. 대학을 자퇴하고 꽃동네에서 자원봉사자로 지낸 적이 있다. 노숙인, 노인, 버려진 아기, 정신병동과 호스피스 병동이었는데 특히 호스피스 경험은 혹독했다. 몹쓸 병에 걸려 죽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끔찍했다. 새벽녘 개들이 늑대처럼 일제히 울부짖으면 이불 속에서 귀를 틀어막고 또 어떤 분이 돌아가신 걸까 두려움에 떨었다. 개들이 짖은 날이면 어김없이 병상에서 누군가 사라졌다. 어느 날 일용직 노동자가 입원했는데 공사판에서 발이 못에 찔렸다 했다. 대수롭잖다며 겸연쩍게 웃던 그 아저씨는 다음날 파상풍으로 사망했다. 가난한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죽음을 알리는 소식-부음(訃音)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고인이 된 이에게 당신의 죽음은 어떠했는지 부질없이 묻곤 한다. 천수를 누리다 기력이 쇠하여 돌아가신 분, 창창한 나이에 뜻하지 않은 죽음을
우리 부모님은 툭하면 싸우셨다. 다정한 대화는 지리멸렬한 싸움으로 끝났다. 시시비비는 폭언이 되고 폭언은 폭력이 되었다. 그 광경을 일상처럼 지켜보던 어린 날들, 너는 내게 유일한 친구이자 놀이였다. 엉뚱하고 호기심 많은 나는 언성이 높아지면 너의 세계로 숨바꼭질하듯 숨곤 했다. 거기서는 뭐든 할 수 있었다. 네 뒤에 숨어 현실의 고통을 이리저리 피했다. 수 년 후 부모님은 갈라서기로 했다. 그러자 이제는 누가 아이들을 키울 지로 다투기 시작했다. 양육권을 서로 가지려는 아름다운 싸움 따윈 없었다. 이혼 소송 기간 아빠와 엄마의 고향을 짐짝처럼 오갔다. 도시에서 어촌, 농촌으로 또래들과 친해질 새 없이 전학을 다녔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도 전에 버스에 실려 어딘가로 옮겨가야 하는 단조롭고 지루한 세상을 네게 기대어 버텼다. 장난감도 딱히 없던 시절 나는 사물에 너를 입혀 놀았다. 쓰임새 없는 막대기도 너는 왕자와 공주로 변신시켜 로맨스 가득한 세계로 나를 데려가 주었다. 시외버스로 장거리 이동을 할 때면 차 창 밖 굽이굽이 끝없는 산들을 너는 거대한 무덤이라 했다. 그러면 정말 거인이 긴 잠에서 벌떡 깨어나 저벅 저벅 걸어오는 것 같아 긴장감에 숨죽였다.
1. 그의 이야기 "검고 긴 머리를 늘어뜨렸어요. 핏기 없이 희고 창백한 얼굴이었죠. 신비로웠어요." 일본 농부라 자신을 소개한 그는 그녀를 회상했다. 네팔 게스트하우스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여자에게 묘한 떨림을 느꼈다 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숙소에서 시작된 한일 간 운명적 러브스토리였다. 차마 고백할 용기가 없던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건 뜻밖에 그녀였다. 여자는 일본 지인에게 편지를 쓰는 일을 도와 달라 부탁했다. 그녀가 불러주는 안부를 일본어로 옮기면서 심장은 쿵쾅거리고 손은 떨렸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밤을 붙잡으며 새벽녘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었지만 다음날 그녀는 사라졌다. 이른 아침 체크 아웃을 하고 게스트하우스를 떠났다고 했다. 절망감에 그는 사라진 그녀를 찾아 다녔다. 강기슭을 따라 정처 없이 걷고 있을 때 기적처럼 그녀를 발견했다.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그 검고 긴 머리를 늘어뜨리며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녀 주변에 몰려든 네팔 꼬마 아이들과 뒤섞여 노는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재회했다. 그는 내게 이국땅에서 운명처럼 만난 신비한 사랑에 대해 비밀을 속삭이듯 털어놓곤 다시
시아버지가 부쩍 노쇠해지셨다. 식욕이 줄고 활동량이 없으시더니 무기력하게 누워만 계셨다. 은퇴 후 소일거리 없이 지내신지 15년, 무심한 세월에 기력마저 잃으셨다. 병원에 모시고 가서 혈액검사를 시작으로 뇌, 위, 전립선, 대장까지 검사해 봤지만 뚜렷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존엄한 노후에 대해 곧잘 말해왔지만 정작 현실의 어려움에 부딪치자 자식으로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툴고 헤매기만 했다. 그렇게 한 달. 한국 의료와 복지의 “현실”을 체감했다. 그것은 허점과 오류, 맹탕 수준의 노후였다. 엄격하고 자존심 센 아버지 당신이 무력한 존재가 되면서부터 노년의 삶이란 대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거동을 못하시게 된 아버지를 위해 노인용품을 하나씩 장만하면서 자식들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서러운 사연을 짐작해본다. 청년 시절 빛나던 청춘이 풍화(風化)되어 재처럼 남고 장년의 기세도 추억으로 아른거릴 삶. 가난에 찌들어 눈빛도 바랬고 온 얼굴 가득 주름살 오글쪼글 지하철 공짜로 타는 것 말고는 늙어서 받은 것 아무것도 없네 /김광규, 쪽방 할머니 한국 70대 노인 빈곤율은 전체 노인의 절반에 이르고 자살률은 세계 1위를 기록한다. 노인 자살의 주된 이
‘일본 극우’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토야를 떠올린다. 20여 년 전 남인도에서 만난 친구! 나는 시간을 아껴야하는 단기 여행자였고 토야는 돈을 아껴야하는 세계일주 여행자였다. 오토바이는 내가 빌리고, 운전은 그가, 주유비는 반반씩 부담해 고아와 함피를 둘러보자는 제안에 숫기 없는 그는 당황한 듯 망설이다 겨우 말을 꺼냈다. "저는 극우입니다” 혐한(嫌韓)시위를 다닐 정도라는 그에게 "그게 어때서?”라 되물으며 우리는 역사가 아닌 비즈니스로 만난 관계라 했다. 그렇게 계약이 성립되어 고아와 함피를 둘러봤다. 스콜-늦은 오후 소나기가 내리면 짜이 집에 뛰어 들어가 지붕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우리는 친해졌다. 그는 어릴 때 이지매를 당했고 와세다 법대에 진학, 유흥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거기서 만난 접대부 여성이 그의 첫사랑. 그러나 사랑에 실패하면서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고 몇 번의 자살 시도, 몇 번의 사법시험 실패 끝에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이 극우였던 것을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마지막 날 그는 데려갈 곳이 있다며 언덕 능선을 한참 달리다 한적한 바닷가에서 오토바이를 세웠다. 모래밭 오두막에서 술을 팔고 있었다. 우리는 파도소리를 들
인도의 바라나시는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도시였다. 그곳에는 성스러운 하천(河川) 갠지스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은 여기에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축복을 내린다. 갠지스 강에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장지(葬地)였다. 상여를 매고 수천 킬로를 걸어 온 사람들도 있었다. 화장터 장작더미에 올려진 시체를 태우고 수습해서 강에 수장(水葬)했다. 장작을 사지 못한 가난한 사람은 시신을 몰래 강에 던진다고 했다. 어느 것이든 지상에서 삶을 마친 인간을 신에게 돌려보내는 의식이다. 강물에서 목욕을 하면서 소원을 비는 인도인들도 있었다. 죽은 몸들이 잠긴 강에서 한 모금 물을 떠먹으며 기도하기도 했다, 이해가 불가한 풍경이었다. 나는 바라나시 가트에 우두커니 앉아 구경했다. 청년 시절, 언제나 뭔가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던 경쟁 사회에서 벗어 나와 긴 여행을 떠난 나는 인도에서 그렇게 넋잃은 채 가만히 있는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바라나시에서 머물 작정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필 세균성 장염에 걸려 꼼짝없이 발이 묶이고 말았던 것이다. 몹시 아팠다. 밤이면 갠지스 강 위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게 보였다. 환시였다. 바라나시에서 병을 얻으면 죽어 나간다
나는 마을활동가다. 일터가 아닌 삶터에서 마을활동은 감사(感謝)와 인정(人情)의 노동이다. 대도시가 허락하지 않을 듯한 그런 삶을 알게 된 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서울살이 20년, 삶의 가치와 의미를 나는 마을에서 발견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이 아닌 연대와 협동으로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느슨하고 느리고 느긋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만나도 그저 멀뚱멀뚱하던 이웃들 사이에 관계가 만들어지고 공공의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발휘되는 집단지성은 또 얼마나 짜릿한가. 마을은 하나의 ‘인격체’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내 인생 가장 푸르른 날 경력 단절 여성이 되어 출산과 육아로 시간을 보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감격이었지만 내 삶은 어디론가 자꾸 흘러서 멀리 가버리는 듯했다. “사회로” 나가려 무던히 애썼으나 한번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고 몸은 가정에 묶였다. 마흔두 살에 셋째를 낳자 내 인생 모든 게 끝난 기분이었다. 사회생활은 더 이상 불가능해 보였다. 아이 셋을 데리고서라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걸까? 그러자 ‘낙후된 마을과 떠나는 이웃’이 보였다. 한국사회 변혁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살고 있
며칠 전 내 아이가 엄마는 장애인들의 출근길 기습시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질문에 짜증 섞인 느낌이었다. 그 순간, 파노라마처럼 함께 했던 장애 친구들의 비통한 일상이 떠올랐다. 청년 시절 장애인 야학에서 활동한 덕분에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존재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달걀처럼 뼈가 쉽게 부서져 평생 영화관에 가본 적이 없는 친구, 매일 도뇨관을 삽입해 소변을 빼줘야 하는 친구, 스스로 몸을 뒤집을 수 없어 욕창을 걱정하는 친구, 외출을 할 때면 계단과 10cm 턱을 넘지 못해 단박에 갈 곳을 돌고 돌아서 가야하는 친구, 겨울 거리에서 두 시간 이상 추위에 떨며 휠체어를 실을 수 있는 장애인 콜택시를 기다려야 했던 친구 등 중증장애인이 내 친구들이었다. 세상에 있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존재하는 중증장애인의 곁을 들여다보면서 나에게 당연한 일이 그들에게는 생존의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타게 해달라며 휠체어로 거리를 점거하거나, 쇠사슬을 묶어 전철을 멈춰 세우는 장면은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 시위에는 생존의 문제와 함께 “인간의 존엄”이라는 무게가 실려 있기 때문이었다. 2001년 오이도역, 2002년 발산역에서 장애인
나는 행복하지 않은 청년이었다. 일상처럼 불안정한 성장기와 무엇 하나 수월하지 않은 위태로운 날들을 거치며 선택보다 포기를, 패기보다 허무를 배웠다.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았고 살아가는 게 행복하지 않은데 치열한 삶을 강요하는 사회가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살아내기가 죽기보다 고통스러웠던 90년대.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PC통신 채팅이 유행했다. 얼굴도 모른 채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는 세상이 신기했다. 자존심은 세고 자존감은 낮은 나는 무수한 관계 속에서 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사이버 공간에 갇혔다.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가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현실의 고통을 피하고자 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누군가 지나가며 이 말을 툭 던졌다. "가짜를 추구하지 마" 살다보면 그렇게 다가오는 말들이 있다. 무심한 언어는 가슴에 내리꽂혀 의식을 흔들어 인식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심장에 비문(祕文)처럼 새겨진다. 통찰과 자각으로 연결되어 사물과 세상의 본질을 꿰뚫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가짜를 추구하지 말라는 충고는 예리하고 정확하게 가슴에 박혀 시퍼런 칼날처럼 번득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준거가 되었다. 진짜는 무엇인가. 나는 진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