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대부분 걸어 다녔고, 양반이라도 하인이 끌고 가는 말을 타고 다녔기에 그 속도는 걷는 것과 같았다. 그러면 서울에서 융ˑ건릉까지 최단코스로는 며칠이나 걸렸을까? 하루? 수원에서 서울로 통학이나 통근을 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 같다. 그러면 이틀? 그것도 힘들 것 같다는 반응이지 않을까? 하루 종일 걸어본 적이 없는 현대인에게 이런 물음 자체가 무리일 것 같다. 그래도 가끔 궁금해 할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그 답을 찾아보자. 영조 임금 때 편찬한 전국지리지 '여지도서(輿地圖書)'(55책, 1765)에는 모든 고을의 앞쪽에 서울과 고을 읍치(邑治, 중심지)를 오가는 최단코스 길 위의 거리가 적혀 있다. 예를 들어 충청도의 천안에는 “210리 이틀 반나절 일정(二百十里二日半程)”, 충주에는 “282리 사흘 일정(二百八十二里三日程)”, 제천에는 “330리 나흘 일정(三百三十里四日程)”이다. 요즘과는 많이 다른 거리 개념인데, 이런 수치들은 어떻게 나온 걸까? 원리를 알면 답은 의외로 쉽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하루에 평균 90리를 간다고 여겼다. 그래서 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90리로 나누었을 때 나머지가 1~29리면 버림으로, 30~59
1795년 윤2월 9일, 조선왕조 통틀어 가장 장엄한 7박 8일의 정치 퍼포먼스가 시작됐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3월 29일로 매화꽃이 한창인 봄이었고, 길가 여기저기에는 농사일을 시작한 백성들이 바삐 움직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1796)에 수록된 행렬 그림인 반차도(班次圖)에는 1,779명의 인원과 779필의 말이 등장하고, 정조의 친위대인 장용영(壯勇營)을 비롯하여 군사 4,500여 명을 합하면 6천 명을 훌쩍 넘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권위주의 시대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정조의 효심만을 부각시키며 정치적 의미를 축소하고자 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시대인 요즘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정치적으로 계획되고 정치적으로 해석된다. 대통령의 결정이 국가와 국민의 삶에 미치는 힘이 그 누구보다도 지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물며 권력이 혈연을 통해 승계되던 조선에서는 어떠했겠는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할아버지 영조(재위: 1724~1776)에 이어 1776년 3월 10일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를 외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자신이 펼치고자 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