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에는 대부분 걸어 다녔고, 양반이라도 하인이 끌고 가는 말을 타고 다녔기에 그 속도는 걷는 것과 같았다. 그러면 서울에서 융ˑ건릉까지 최단코스로는 며칠이나 걸렸을까? 하루? 수원에서 서울로 통학이나 통근을 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 같다. 그러면 이틀? 그것도 힘들 것 같다는 반응이지 않을까? 하루 종일 걸어본 적이 없는 현대인에게 이런 물음 자체가 무리일 것 같다. 그래도 가끔 궁금해 할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그 답을 찾아보자.
영조 임금 때 편찬한 전국지리지 '여지도서(輿地圖書)'(55책, 1765)에는 모든 고을의 앞쪽에 서울과 고을 읍치(邑治, 중심지)를 오가는 최단코스 길 위의 거리가 적혀 있다. 예를 들어 충청도의 천안에는 “210리 이틀 반나절 일정(二百十里二日半程)”, 충주에는 “282리 사흘 일정(二百八十二里三日程)”, 제천에는 “330리 나흘 일정(三百三十里四日程)”이다. 요즘과는 많이 다른 거리 개념인데, 이런 수치들은 어떻게 나온 걸까? 원리를 알면 답은 의외로 쉽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하루에 평균 90리를 간다고 여겼다. 그래서 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90리로 나누었을 때 나머지가 1~29리면 버림으로, 30~59리면 반나절로, 60~89리면 반올림하여 하루로 계산했다. 이 계산법을 천안, 충주, 제천에 적용하면 210리는 2일×90리+30리(반나절)로 이틀 반나절, 282리는 3일×90리+12리(버림)로 사흘, 330리는 3일×90리+60리(하루)로 나흘 일정이 된다.
아쉽게도 '여지도서'에는 수원의 지리지가 빠져 있다. 다행히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25책, 1531년)에는 88리로, 규장각 소장 '해동지도(海東地圖)'(8첩, 1720년대)에는 90리로 나온다. 옛사람들이 하루면 걸어가는 거리인데, 이때 수원의 읍치는 정조가 팔달산 아래로 옮기기 전의 옛읍치, 즉 융ˑ건릉 지역에 있었다. 사도세자의 현륭원이 들어선 이후 서울-현륭원의 거리가 100리로 나오는데, 그 이전 최단코스의 길보다 좀 돌아가게 됐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90리는 지금의 미터법으로 몇 ㎞였을까? 요즘 사람들은 10리를 무의식적으로 4㎞라고 여기지만 일본식 거리 개념이다. 1909년에 일본의 곡척(曲尺) 1척=30.3cm을 채택하여 10리=10×1,296척×0.303m=3,926.88m≒3.93㎞로 계산한 것을 약 4㎞로 본 것에서 유래했다. 조선에서는 주척(周尺) 6척=1보(步), 360보=1리(里)라는 원칙을 적용하여 거리를 측정했다. 현재 남아 있는 주척의 길이는 약 20.62cm로 10리=10×360보×6척×0.2062m=4,453,92m≒4.454㎞이고, 90리=9×4.454㎞≒40.09㎞다.
하루에 40㎞를 걸어간다고? 현대인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거리일 것 같다. 필자는 2019년부터 시작하여 2024년까지 여덟 번을 완보한 경복궁-도산서원 구간의 600리 퇴계길 걷기에서 하루에 얼마나 걸어갈 수 있는지 여러 번 실험해본 끝에 나에게 딱 알맞은 거리를 찾아냈다. 점심과 쉬는 시간 포함해서 하루 9시간 30㎞를 기본으로 하여 상황에 따라 ±4㎞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며칠을 연속으로 걸어도 별 무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