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을 죽여버린 김일제 흉노 휴도(저)왕의 태자였던 김일제(金日磾)의 자는 옹숙(翁叔)이었다. 그의 장남은 김농아(金弄兒)였는데, 무제는 농아를 총애해서 항상 곁에 두었다. 농아는 때로 무제의 목을 껴안을 정도로 허물없이 지냈는데, 하루는 이를 본 김일제가 눈으로 꾸짖자 농아가 무제에게 달려가 “옹숙이 화났다”고 울면서 일렀고, 무제는 “왜 내 아이에게 화를 내느냐?”고 김일제를 꾸짖을 정도로 허물이 없었다. 무제의 총애에 고무된 농아는 급기야 무제의 궁녀들을 희롱하기에 이르렀고 김일제는 그 음란함을 미워해 농아를 죽여 버렸다. 이를 안 무제가 크게 화를 내자 김일제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농아를 죽인 상황을 갖추어 말하자 무제는 크게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김일제의 어머니 알씨(閼氏)가 병으로 죽자 무제는 궁중 화가에게 초상화를 그려 감천궁(甘泉宮)에 걸어놓았는데, 그림의 제목이 〈휴도왕알씨(休屠王閼氏)〉였다. 알씨가 김일제와 동생 김윤(金倫)에게 법도를 잘 지키라고 가르쳤고 무제가 이를 훌륭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서》는 무제가 “김일제를 마음으로 존경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김일제 또한 무제를 잘 알았다. 무제의 총애는 재앙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바닷 속에 묻힌 신라 문무왕 신라 제30대 문무대왕(文武王:재위 661~681)은 부왕 태종무열왕의 유업을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달성했다. 또한 옛 백제 및 고구려 강역을 차지하려던 당나라 군사와 나당전쟁(신당전쟁)을 치러서 옛 백제 및 고구려 강역을 신라 강역으로 포함시켰다. 이런 문무왕에 대해서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많다. 그중 하나가 아들 아들인 신문대왕이 부친을 위해 세웠다는 동해 바닷가의 감은사(感恩寺)다. 《삼국유사》 〈만파식적(萬波息笛)〉에 나오는 이야기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이 절을 짓기 시작했는데, 끝마치지 못하고 붕어(崩御)해서 해룡(海龍)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개요(開耀) 2년(682)에 끝마쳤다. 금당 섬돌 아래 동쪽으로 굴을 뚫어 열어두었는데, 용이 절에 들어와서 둘러싸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유조(遺詔:황제의 유언)로써 유골을 간직한 곳의 이름을 대왕암이라고 하고, 절을 감은사라고 했으며, 후에 용이 나타나는 형상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삼국유사》)” 《삼국사기》는 문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서 동해 입구의 큰 바위 위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세속에서 왕이 변해
◇흉노에게 공격당하는 한나라 중국에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는 곳이 있다. 하서(河西)라는 약칭으로도 불리는데 주랑(走廊)은 복도, 또는 회랑 등을 뜻한다. 중국 감숙성(甘肅省)은 성도(省都:성의 수도) 난주(蘭州)에서 돈황(燉煌)까지 서북쪽으로 좁고 길게 이어져 있는데 이 하서주랑 때문이다. 황하 서쪽 감숙성(甘肅省) 서북부의 기련산(祁連山)이 북쪽을 가로막고 있고, 합려산(合黎山)이 남쪽을 가로 막고 있는데, 난주에서 신강(新疆) 가까운 돈황까지 1천여 1천여 km의 긴 회랑이다. 하서주랑은 황하의 서쪽 지류가 흐르는 복도라는 뜻인데, 북쪽은 산맥 아니면 내몽골 몽케 텐그리(騰格里“Monke Tengri)사막이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청해성 주랑남산(走廊南山) 등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하서주랑을 통하지 않고는 서역(西域)으로 갈 수 없었다. 서기전 2세기 경 이 하서주랑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이 기락 김씨의 조상이라는 김일제(金日磾)의 부친 휴도왕(休屠王)이었다. 흉노는 황제인 선우(單于) 아래 좌현왕과 우현왕이 있었는데, 휴도왕은 우현왕이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쪘다는 뜻의 ‘천고마비(天高馬肥)’를 우리는 ‘독서의 계절 가을’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지만
*문정창이란 역사학자 가끔 김해 김씨나 경주 김씨를 만나면 자신은 흉노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생각의 뿌리를 찾아보면 문정창(文定昌:1899~1980)이라는 역사학자를 만나게 된다. 문정창은 1923년 경상남도 동래군 서기를 시작으로 1943년 황해도 은율군수를 거쳐 1945년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으로 재직하던 중 일제 패전을 맞았다. 1941년에는 《조선의 시장(朝鮮の市場)》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는데, 일제강점기 때 관료경력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한 이병도·신석호도 뒤늦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친일인명사전》에 같이 등재되었지만 문정창과 이병도·신석호의 광복 후 행보는 사뭇 달랐다. 이병도·신석호는 광복 후 친일세력이 다시 집권하자 조선사편수회 경력을 발판삼아 역사학계를 장악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하나뿐인 정설(定說)로 승격시켰다. 반면 문정창은 일제 때 관료경력을 반성하면서 이병도·신석호가 고착화시킨 일제 황국사관을 올바른 민족사관으로 바꾸는 일에 남은 생애를 바쳤다. 한국의 모든 대학 사학과를 장악한 이병도·신석호의 제자들이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고를 써가면서 조선총독
◇소호 김천씨를 지우려했던 사마천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소호 김천씨를 지우기 위해 여러 장치들을 마련했다. 잘 알려진 소호 김천씨라는 이름 대신 누구인지 잘 모르는 현효(玄囂)라는 이름을 쓴 것도 소호를 지우기 위한 장치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사마천은 소호 자체를 지울 수는 없었다. 소호는 황제(黃帝)의 큰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첫 부인은 서릉씨(西陵氏)의 딸 누조(嫘祖)였는데, 이에 대해 《사기》 〈오제본기〉는 이렇게 썼다. “누조는 황제의 정비(正妃)가 되어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의 후손들은 모두가 천하를 얻었다. 그 첫째가 현효(玄囂)인데, 이 이가 청양(靑陽)이다(《사기》 〈오제본기〉)” 이 현효가 바로 김수로왕과 김유신의 조상이라는 소호 김천씨다. 사마천은 잘 알려진 소호라는 이름 대신 현효, 청양 등 알려지지 않은 이름들을 쓰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청양은 강수(江水)로 내려가 살았다. 그 둘째가 창의(昌意)인데, 약수(若水)로 내려가 살았다.” 황제의 큰 아들인 청양, 곧 소호 김천씨는 강수에 살았고, 둘째 아들인 창의는 약수에 살았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고대의 역사강역을 크게 확장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강 이름들도 마
김유신 비문의 수수께끼 김수로왕은 수수께끼의 인물인데, 그 조상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기사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있다. “신라인들은 스스로 소호 김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므로 성을 김씨라고 했다. 김유신의 비문에도 또한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후손이다’라고 했으니 즉 남가야 시조 수로는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이다(『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이 기사에는 김수로왕의 조상이라는 두 임금이 등장한다. 헌원과 소호이다. 헌원은 황제(黃帝) 헌원씨를 뜻하고, 소호는 소호 김천씨를 뜻한다. 황제 헌원씨와 소호 김천씨는 모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고대 군주들이다. 그것도 사마천의 《사기》 첫 대목인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등장하는 군주들이다. 사마천은 중국사의 시작을 다섯 명의 제왕을 뜻하는 오제(五帝)로 설정했는데, 첫 제왕이 황제(黃帝) 헌원씨다. 《사기》의 첫 구절은 “황제는 소전(少典)의 아들이고 성은 공손(公孫)인데 이름은 헌원(軒轅)이다”라는 것이다. 사마천은 중국사가 황제 헌원씨부터 시작한다고 말한 것인데, 〈김유신 비문〉은 김수로왕이 황제 헌원의 후예라는 것이다. 소호 김천씨는 황제의 맏아들이다. 황제는 서릉
*아주 구체적인 가락국 건국 사화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모두 김수로왕이 서기 42년 가야를 건국했다고 말하고 있다. 먼저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그 내용이 아주 구체적인데, 핵심을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개벽 이후 가야지역에는 나라의 이름과 군신의 칭호가 없었다. 다만 아도간·여도간·피도간·오도간·유수간·유천간·신천간·오천간·신귀간이라고 불리는 9간(干)이 7만5천여 명의 백성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후한(後漢)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서기 42) 임인 3월 계욕일(稧浴日)에 북쪽 구지봉(龜旨峯)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구간과 2,3백여 명의 백성이 모였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사람의 소리 같은 것이 들였다. “황천(皇天)께서 내게 이곳에 가서 새로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해서 이곳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불러라.” 그러면서 부를 노래를 직접 가르쳐 주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드러내어라, 드러내지 않으면 구워먹겠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면 대왕을 맞이하면서 기뻐 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간 등이 이 말처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
*총론과 본론이 다른 따로국밥 역사학 흔히 가야를 수수께끼의 왕국이라고 말한다. 경상남북도 일대에 가야관련 유적, 유물은 숱하게 널려 있는데, 가야사에 대한 체계적 기록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삼국유사』 「가락국기」가 가장 자세한 기록이지만 시조 김수로왕과 허황후에 대한 내용에 집중되어 있고, 그 이후의 임금들에 대해서는 아주 소략하다. 『삼국사기』는 「김유신 열전」에서 가야 시조와 건국시기는 적고 있지만 따로 「가야본기」를 편찬하지 않았다. 『삼국사기』가 부록 형태로라도 가야나 부여 같은 나라들에 대해서 서술했으면 연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기 그지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야와 관련된 단편적 기록이나마 꼼꼼히 살펴보면서 그 전체상을 그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은 물론이다. 가야에 대해서 한국의 대학 강단을 차지하고 있는 강단사학자들의 견해를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가야’ 관련 기술로 살펴보자. 먼저 가야에 대한 ‘정의’편에서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 중엽까지 주로 경상남도 대부분과 경상북도 일부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고대 국가”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정의’는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의 가야 관련 사료를 잘 정리한 문장
◇ 일제 패전 후에도 살아남은 황국사관 일제 식민사학은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도(裕仁)의 무조건 항복선언과 함께 관 속에 들어갈 운명이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의 자살과 함께 나치 역사관이 종언을 고한 것과 같은 운명이어야 했다. 그러나 나치 붕괴 이후 나치 역사관은 유럽에서 종언을 고했으나 일제 황국사관(皇國史觀)은 일제 패망 후에도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1939년 9월 독일·일본·이탈리아가 파시스트 삼국동맹을 맺은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일제 식민사관과 나치 역사관은 쌍둥이였다. 나치의 인종 차별주의 정책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나치는 게르만족이 속한 아리안인은 외형으로 봐도 우수한 인종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게르만족뿐만 아니라 켈트족, 앵글로 색슨족, 슬라브족 할 것 없이 유럽인들은 대부분 아리안족 계통이고, 중동의 이란도 아리안족 계통인 것처럼 선천적 인종 우월주의는 허구의 이론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치가 인종 우월주의 이론에 기대어 유태인 말살정책을 자행한 것처럼 일제도 극심한 민족차별정책을 실시했다. 일제는 일본인들은 1등국민으로 높이고, 조선인과 유구인(琉球人:오키나와인)은 2등국민,
◇ 내물왕이 최초의 신라왕? 한국 강단사학의 이른바 태두(?) 이병도 박사가 ‘매우 존경할만한 인격자’라고 칭송한 도쿄대 교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1878~1952)도 물론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했다. 이병도는 이케우치의 ‘연구방법이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만큼 날카로운 점이 많았다’고 회고했는데, 실제로 그런지 살펴보자. 같은 식민사학자지만 마에마 교사쿠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믿을만하다고 평가했는데 이케우치 히로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도 불신했다는 점이 다르다. 이케우치는 물론 「신라본기」·「백제본기」를 막론하고 『삼국사기』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진성여왕까지의 28대 제왕 중 역사상의 인물로 인정되는 최초의 왕은 내물왕이고 그 이전의 제왕은 모두 공상(空想)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한국의 국정·검인정을 막론하고 모든 『국사교과서』가 신라를 내물왕이 건국한 것처럼 써 놓고 있는 것은 이케우치가 내물왕이 최초의 왕이라고 우긴 것을 이병도가 받아들여 이른바 정설로 삼은 결과이다. 이케우치는 또한 신라에서 박·석·김(朴石金) 세 성씨가 교차로 왕이 된 것은 “중국의 하·은·주의 왕위 계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