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하고 권력이 대단히 닮아있는데요. 이것들은 암만 많아도 물리지를 않아요. 많을수록 더 매력이 있고 더 마력이 생깁니다. 출세하라는 말은 남을 다 찍어누르고 너 다 가져라' 소리거든. 권력이나 돈이나 똑같지. 늙으면 뻔뻔해진다. 꼰대가 되지 말아라. 자기 자식들한테도 갑질하는 게 돈 가진 아버지 하는 짓 아니에요? 기회만 있으면 마음대로 횡포하는 걸 예사롭게 하는 아주 비문명적인 야만적 사태죠. 1등 해라, 1등 해라 하다 보면 그 꼴 됩니다. 그렇게 길들여온 거예요. 독재같이 하여 지배하기 쉽게 하려고 이승만, 박정희 독재하기 위해서 길들여놓은 거니까. 해답이 있을 뿐이지 정답이라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거죠.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그때그때의 해답이 있을 뿐이지 정답이라는 발상은 아주 잘못된 발상이죠. 그게 독재가 만들어낸 사고방식이죠. 여성과 남성, 가진 자와 안 가진 자, 세대, 나이 드신 분과 젊은 세대. 토론은 있어야 하고 건강한 페어플레이는 있어야 하지만 혐오는 아니다. 학교(學校)는 배우는 데지 가르치는 데가 아닙니다. 배우게끔 하는 거고 배우고 싶게끔 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뭘 배우고 함께 사는 걸 가르치는 게 아니라 경쟁부터 가르치고 있
탐욕과 망상과 사치와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지혜의 원천이다. 만일 네가 진심으로 정욕을 극복하고자 하는데도 불구하고 때때로 정욕에 지배당할 때가 있더라도 너에게는 정욕을 이겨낼 힘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부가 단번에 말을 세우지 못하더라도 고삐를 내던지지 않고 계속 잡아당기면 말은 언젠가는 서게 되어 있다. 정욕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는 싸움터에서 백만 군대에 이기는 자보다 위대한 승리자이다. 모든 타인을 이기는 것보다 자신을 이기는 것이 훨씬 낫다. 타인과의 싸움은 언젠가는 질 때가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로 남을 것이다. (법구경) 남을 자기 자신처럼 존경하고, 자기 자신을 이기며,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야 말로 인애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보다 더 높은 가르침은 없다. (공자) 젊은이여! 유흥이나 사치 등의 온갖 욕망의 만족을 멀리하라. 설사 온갖 욕망을 완전히 물리치겠다는 생각이 아니더라도, 뒤로 미루면 미룰수록 커지는 즐거움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관능의 향락을 절제하고 미룸으로써, 네 즐거움은 더욱더 풍성해진다. 즐거움이 수중에 있다는 의식은 그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신을 두려워하고 신을 두려워하는 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생애가 끊임없는 승리의 연속인 사람, 무한한 것과 진실한 것을 위해 세상 사람들의 칭찬 때문이 아니라, 사명 속에서 자신의 의지처를 발견하는 사람, 세상의 눈에 띄지 않고 눈에 띄려고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을 존경하라. 그런 사람은 자기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욕을 먹는 선행을 선택하고, 진리를 선택한 것이다. 가장 높은 선은 언제나 세상의 법칙에 반대한다. (에머슨)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훌륭한 인물을 찾으라.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주저 없이 행하라.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명예도 기대하지 말라. 어리석은 인간은 이성적인 행위에 대한 비판자라는 것을 기억하라. 역사는 자라는 것이고, 자라기 때문에 변하고,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새가 나타나는 것인데, 금새가 보이면 말씀이 옵니다. 모든 시대는 제 말씀을 가졌습니다.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봤다. 먼저 알았다. 먼저 말한다. 혹은 대신 말한다 합니다. 대신은 누구 대신입니까.
“어떻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현자는 대답했다. “해를 보는데 과연 등불이 필요할까?” (아라비아 잠언) 신을 알고 있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들이다. 오만한 사람과 어설프게 현명한 사람들만이 신을 모른다. (파스칼) 아무리 신을 믿고 있어도, 가끔 그 존재를 의심하는 순간에 부딪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심의 순간은 나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를 신에 대한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이해로 이끌어준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신은 완전히 진부해져버려서, 이젠 신을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우리가 진정으로 신을 믿는 것은 신이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 때뿐이며, 신은 우리가 온 마음으로 구하면 그 새로운 모습을 우리에게 계시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무한하다. 어떤 사물이든 가까이 가보면 잘 알 수 있듯, 신을 아는 것도 신에게 가까이 갔을 때뿐이다.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오직 선행에 의해서만, 즉 신의 뜻을 실천하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신을 잘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더 기꺼이 신의 뜻을 실천한다. 그리고 신의 뜻을 훌
살기 힘들다 해서 죽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도덕적인 사람은 자신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을 벗기 위해 자신의 사명을 오로지 실천한다. 자신의 사명을 다했을 때 비로소 그 짐에서 해방될 수 있다. (에머슨) 현재의 삶만이 진정한 삶이다. 과거는 이미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 순간을 잘 사는 것, 오직 그것에만 온 정신을 쏟아 노력하라. 내세를 위해 현세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도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 실제로 살고 있는 삶은 현재의 이 삶뿐이다. 따라서 이 삶을, 이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을 가능한 한 잘 사는 것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인생은 고뇌도 아니고 쾌락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끝까지 성실하게 수행해야 할 사명이다. (토크빌) 너는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아, 뭔가 다른 생활이라면 더 쉽게 할 수 있을 텐데 하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 생활 속에서, 네가 현재 놓여 있는 조건 속에서, 너는 언제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는 진리를 알아야 한다. (칼라일) 사람들 속에서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사는 자에게도, 혼자서 정신적인 목적을 위
인류 사회의 진보와 향상을 위한 진지한 첫걸음마다, 거기에는 반드시 그 주된 원인으로서 신앙의 역할이 있었다. 그러므로 신앙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가르침은 사회의 개선에 언제나 무력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가르침이 훌륭한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방식에는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서 훔친 불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니)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고 건강한 사회 기구를 위한 첫걸음은 언제나, 땅에 대한 당연하고 평등하며 빼앗을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 물론 그것이 전부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럼으로써 그 밖의 모든 것이 한결 수월해진다. 그 보장이 없는 한 다른 모든 것은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 (헨리 조지) 사회는 공통의 신앙과 공통의 목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사회적인 활동은 종교에 의해서 성립된 원칙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다. (마치니)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다. 어쩌면 “옛 성인들에게서 배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
어떤 사람이 죽어서 그 영혼이 하늘나라에 이르자, 그 앞에 온몸이 고름투성이에 추악하고 더럽고 소름이 끼치는 여자가 나타났다. “너는 도대체 누군데 내 앞에 나타나 내 길을 막느냐?” “나는 너의 행실이다.” (페르시아 속담) 중요한 것은 선한 행실에 대한 탁상공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탈무드) 착한 일을 하고, 자비롭고, 온화하고 겸손하며, 좋은 말을 하고, 선한 일을 생각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항상 배우며, 항상 진실을 말하고, 분노를 억제하고, 만족을 알고 인내심이 강하며, 친절하고, 웃어른을 공경하고, 부모와 스승을 존경하는 사람, 이들은 모두 선인의 벗이요 악인들의 적이다. 거짓을 말하고, 훔치고, 음란하고, 속이고 욕하고, 악한 일을 생각하고, 오만하고 게으르며, 이웃을 중상하고, 인색하고 무례하며, 파렴치하고, 화를 잘 내고, 남의 것을 가로채며, 복수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고, 질투심이 강하며, 미신에 빠지는 사람, 이들은 모두 악인의 벗이요, 선인들의 적이다. (페르시아의 교리문답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미루지 말라. 왜냐하면 죽음은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불쑥 찾아오기 때문이다. 네가 이 세상
불행한 정신적 고뇌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모두 끝없는 변화 때문에 영원한 소유(관계)를 허락하지 않는 사물(인간)에 대한 우리의 집착 탓이다. 오직 영원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사랑만이 우리의 마음에 순수한 기쁨을 준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신은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신을 본디 사랑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신을 두려워할 수 있단 말인가? 신은 두려워해야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뿐이다. 나는 신이 인격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신을 사랑할 수가 없지만, 나 자신이 인격체이기 때문에 역시 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신에 대한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즉 사랑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이야 말로 최상의 행복이다. 그러한 사랑은 어떠한 존재도 예외 없이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비록 한 사람이라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너는 신에 대한 사랑과 사랑의 행복을 잃게 될 것
기도한다는 것은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인 하느님의 법칙을 인정하고 그것을 상기하며, 그 법칙에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행위를 적용하여 생각하는 일이다. 되도록 자주 기도하는 것이 좋다. 기도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먼저 자신이 그 시간 동안 온전하게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라. 만약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기도하지 말라.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진실된 기도가 아니다. (탈무드) 우리의 약점과 싸우는 수단인 기도를 어찌 자신으로부터 빼앗아야 한단 말인가?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모든 정신적인 노력은 우리를 아집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신에게 도움을 구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자기 자신 속에서 발견하는 것을 배운다. 신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에게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서면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신에게 간절하게 바라는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루소)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어버이께 기도하여라. 또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고 하여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노동만큼 인간을 고상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사람은 노동하지 않고는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다.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겉치장에 그토록 애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꾸미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경멸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땀 흘려 일하며 자신이 먹을 빵을 제 손으로 얻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 진정한 종교적 이해와 순수한 도덕성이 존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존 러스킨) 지극히 확실하고 순수한 기쁨의 하나는 노동 뒤의 휴식이다. (칸트) 가장 탁월한 재능도 무위도식하면 사장된다. (몽테뉴) 공정함이란 자신이 남에게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남에게서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노동과 자신이 이용하는 남의 노동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언제 어느 때 스스로 일할 능력을 잃고 남의 노동력을 가로채야 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되도록 공정함을 잃지 않기 위해, 평소에 자기가 취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남에게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요 출처: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