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 평가하면 할수록 그가 선 자리는 불안해지고, 반대로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그가 선 자리는 더욱 견고해진다. 강해지려면 물과 같이 되어야 한다. 물은 가로막는 것이 없으면 흐르고, 둑이 있으면 멈춘다. 그러다 둑이 터지면 다시 흐른다.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된다. 그처럼 부드럽고 막힘이 없는 유연함으로 인해 물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강한 것이 된다. (노자) 물이 높은 곳에 머물지 않고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듯, 선덕 또한 자신을 높이는 사람들에게 머물지 않고 오직 겸허한 사람에게만 머문다. (탈무드) 사람은 내면을 깊이 성찰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이 하찮은 인간임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예지에 이르는 첫걸음이다. 현명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겸허해지자. 그러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채닝) 어진 사람은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이를 행할 힘이 부족한 것을 한탄할지언정,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거나 잘못된 비판에 대해 한탄하지 않는다. (중국 금언) 선량하고 총명한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자신은 아는 것이 조금밖에 없으며 자신보다 훨씬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고, 남을 가르치기보다 남에게서
더러운 육체적 욕망, 독으로 가득 찬 그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온갖 고뇌가 뿌리 없는 덩굴풀처럼 달라붙는다. 그 욕망을 이겨낸 사람은 마치 연꽃잎에서 빗방울이 굴러 떨어지듯이 모든 고뇌가 사라진다. (부처)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힘보다 자신의 욕망의 힘 자체를 더 자랑한다. 이 얼마나 해괴한 미망(迷妄)인가? 지금은 거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많은 일들이 과거에는 얼마나 간절하게 원했던 일인지를 생각해보라. 지금 너를 혼란 속에 빠트리고 있는 욕망도 마찬가지이다. 또 네가 여태까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애쓰다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를 상기해보라.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네 욕망을 달래고 가라앉혀라. 그것이 가장 유익한 일이고, 또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다. 삶은 먼저 맞춤(適應)이다. 살았다 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터전을 보게 된다. 삶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둘러쌌기 때문에 환경이라 한다. 환경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아무도 이것이 왜 변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산 것은 그 변함을 무시할 수 없고 그 변한 환경에 맞추어가야만 한다. 둘째 생명은 대듦(拒否)이다. 맞춰감으로만 보면 생명은 순전히 수동적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너희는 그저 잠자코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종교상의 율법을 조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오만불손한 행위가 있을까? 그런 율법이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참으로 어이없게도, 어느 시대에나 자신들의 추행을 종교와 도덕과 조국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속이는 사기꾼들이 있다. (하이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을 즐기며, 모임에서는 높은 자리를 찾고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으려 한다. 그리고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도 기도만은 남에게 보이려고 오래 한다.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예수) (율법학자란 오늘날의 목사를 말한다. 옮긴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본질은 그의 계명을 실천하는 데 있다. 하늘나라에는 “주여! 주여!” 하고 외치는 자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들어간다. 예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과 사람 사이에 중개자는 필요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그는 모든 사람이 신의 딸아들이라고 가르쳤다. 어버이와 자녀들 사이에 무슨 중개자가 필요하겠는가? 구원이 뭐야? 구원 문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이웃과 또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게 함으로써, 그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진정한 내면적인 행복을 가져다준다. 본인 외에 그 누구도 인간의 정신적인 성장을 방해할 수 없다. 육체의 쇠약이나 지력의 감퇴도 정신적 성장에 대한 장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적 성장은 오로지 사랑의 증대 속에 있고, 그 증대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류시 말로리) 현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에서 행복을 발견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파스칼)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마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허위는 회개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실은 오직 사랑하라고 말한다. 모든 추억을 멀리하라. 지나간 일에 대해 얘기하지 말라. 오로지 사랑의 빛에서 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지나가버리는 대로 내버려 두어라. (페르시아의 금언) 사람들이 중국의 현자에게 물었다. “지혜는 무엇입니까?” 현자가 말했다. “그것은 사람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또 물었다. “그럼 또 인(仁)이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현자가 대답했다.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여간해서는 행복에 도
부자는 아무래도 무자비해지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가 인간다운 자비심을 발휘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이내 가난해질 것이다. 우리가 식탁에 둘러 않아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배불리 먹고 있을 때, 길가는 사람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화를 내고 사기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부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빵 한 조각 때문에 남에게 사기를 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설령 그 사람이 정말 그랬다 하더라도, 너는 그를 가엾게 여기고 더욱더 그 사람을 가난에서 구해주어야 한다. 만일 네가 끝까지 자선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적어도 그들에게 모욕만은 주지 말아야 한다. (요한) 먼저 약탈을 중지하고, 그 뒤에 자선을 베풀어라. 부정한 돈에서 손을 뗀 뒤, 그 손을 이웃을 위해 내밀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제 손으로 어떤 사람의 옷을 벗겨, 같은 손으로 다른 사람에게 입힌다면, 우리의 자선 행위가 곧 범죄행위에 대한 방아쇠가 되는 셈이다. 그 같은 자선은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요한) 부자가 자선 행위를 할 때만큼 그의 잔인함이 잘 드러날 때는 없다. 부잣집에서는 세 사람 앞에 열다섯 칸의 방이 있지만, 가난한 사람이 몸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한 마리의 제비로는 봄을 부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미 봄을 느끼고 있는 첫 번째 제비가 날지 않고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그처럼 온갖 꽃봉오리와 풀이 그저 기다리고만 있을 뿐이라면 봄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자기가 첫 번째 제비든지 아니면 천 번째 제비인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 그것이 영원한 것은 하늘과 땅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인도 자기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영원해진다. 그는 영원해짐으로써 비할 데 없이 강력해지고 자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한다. 개인의 생활이든, 사회 전반의 생활이든, 법칙은 오직 하나, 생활을 개선하고 싶으면 그것을 버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유냐 예속이냐 하는 인류 미래의 운명이 걸려 있는 오늘날, 이같이 중대한 시점에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병사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또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생활을 한 하느님 나라 군대 지휘관의 본보기를 따라야 한다. 죽은 사람이란, 변천하는 것에 대한 번민에
지혜로운 사람이란 자기 인생의 사명을 알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학자란 책을 읽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교양인이란 그 시대에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는 지식과 풍속, 관습을 완전히 터득한 사람을 말한다. 현자란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오늘날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필요 없는 지식을 산처럼 가득 채워 넣고 자신을 학자나 교양인, 현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의의도 모르면서 오히려 그 모르는 것을 자랑하는, 깊은 미망의 구렁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학 분자식도 모르고 라듐의 시차와 그 성질도 모르는 무지한 문맹자 가운데, 인생의 의의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지혜로운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지도 내세우지도 않으며, 다만 끝없는 자만에 의해 더욱 미망의 구렁에 빠져드는 사이비 지성인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유일한 학문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학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의 손에 닿는 학문이다. 생명의 원리는 스스로 함이므로 이론으로 하면 진리는 곧 나 자신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생각만 하면 스스로 깨달
나쁜 사회제도의 가장 큰 원인은 그릇된 신앙이다 인간의 삶의 의미는 자기 속의 불합리한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이끌어가는 데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생활의 불합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을 외면하지 말 것. 둘째, 다가올 미래 사회의 합리성에 대해 지극히 순수한 이념을 가질 것. 사회제도는 불합리와 거기서 생길 수밖에 없는 비참함을 생각할 때, 그것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는 반면, 합리적인 생활의 가능성을 뚜렷이 의식할 때는, 자연히 그것을 향해 정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불합리에서 생기는 병폐를 숨기지 말고 합리적인 생활의 행복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모든 인류의 스승이 해야 할 임무이다. 우리는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해 신중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항상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바꿀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 또 선입견을 버리고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사물을 판단해야 한다. 바람의 방향도 살피지 않고 언제나 똑같이 돛을 올리는 사공은 절대로 목적한 항구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헨리 조지) 사람들이 지금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 한, 어떠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사업을 성취하는 데 있다”고 예수는 말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우리를 보내신 분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신이 우리를 통해 이룩할 사업의 전모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업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를 수가 없다. 지혜의 법칙을 아는 자는 그것을 사랑하는 자보다 못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실천하는 자보다 못하다. (중국 잠언) 나는 괴롭다. 나는 신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내가 신을 섬겨야 하는 것이지 신이 나를 섬겨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를 깨닫는다면 괴로움은 절로 가벼워질 것이다. 이 지상과 천상 사이에 심연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이 우리에게 준 주거가 영원히 악과 이기주의와 압박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상은 단순한 속죄의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곳이다. 그 진리와 정의에 대한 갈망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다. (주세페 마치니) 인생의 목적을 단순히 일신상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생은 견디기 어려운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색에 의하여 얻어진 것만이 참된 지식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을 때 진정한 인식은 시작된다. 어떤 것을 인식하려고 할 때, 그것과 자신의 관계가 학자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 발짝도 그 인식에 다가갈 수가 없다. 어떤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백지의 상태에서 거기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 (소로) 책에서 읽은 사상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자신의 사상을 내쫓는 것은, 세익스피어가 당시의 여행자를 비난하여 말했듯이, 남의 땅이 보고 싶어서 자신의 땅을 팔아치우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항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기도 전에, 남이 그것에 대해 쓴 책을 읽는 것도 유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재료에 대한 타인의 견해와 타인의 태도가 그 사람의 머리속에 끼어들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에게는, 나태하고 무관심해서 스스로 노력하여 사색하기보다는 기존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끝내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독자적인 사상을 지닌 학자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쇼펜하우어) 사람의 두뇌를 위해서는 너무 일찍 너무 많이 배우는 것보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