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제심이 중요하다. 그 자제심은 되도력이면 일찍부터 습관을 다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릴 때부터 그것이 몸에 배여 있으면 우리의 덕행은 견고한 것이 될 것이다. (노자) 언어에 의한 해독은 명백하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에 의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눈앞에서 보지 않는다 해도 그 해독이 큰 것은 마찬가지이다. 총에 맞은 상처는 나을 수 있지만, 언어에 의한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는다. (페르시아 격언) 사람들이 그처럼 매혹되어 있는 모든 것,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처럼 골몰하고 있는 것, 그러한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행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골몰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갈망하는 것 속에 자신들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손에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다시 안절부절못하고 아직 손에 넣지 못한 것을 바라며 남들이 갖고 있는 것을 부러워한다. 마음의 평화는 헛된 욕망의 충족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같은 욕망을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러한 헛된 욕망을 만족시키
사람들에 대한 선의는 인간의 의무이다. 만일 우리가 선의로써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이 된다. 아무리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그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어떤 사람의 내부에도, 우리들 속에 살고 있는 것과 똑같은 영혼이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때도, '그래, 세상에는 온갖 사람이 다 있게 마련이니까 참아야지' 하고 생각하라. 만일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드러낸다면, 첫째로 우리는 옳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며, 둘째로 그들을 결사적인 싸움으로 유인하게 된다. 그가 어떤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신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서로 싸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현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면 좀더 잘해 줄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선의로 대하며, 그에게 다른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쇼펜하우어) 악의 유혹에 빠진 사람을 잔인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자신도 남에게 위로받은 적이 있는 것
모든 종교의 본질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리고 나를 둘러싼 무한한 세계와 나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에 있다. 가장 고차원적인 종교에서 가장 야만적인 종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교가 그 밑바탕에, 이러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나’의 관계의 수립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교육장이며 최대의 계몽주의자이지만, 반면에 외면적인 현상과 정체성의 이기적 활동은 인류의 진보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종교의 본질인 신성함과 영원함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한 모든 사람의 마음은 한결같이 채워진다. 우리가 탐구의 길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모든 위대한 종교의 근본 원리는 하나라는 것, 천지창조 이후 오늘날까지 연명해 이어져 온 가르침이 그 하나로 관철되어 있음이 밝혀질 것이다. 모든 신앙의 밑바탕에는 오직 하나의 영원한 진리의 흐름이 있다. 조로아스터교도는 조로아스터교의 깃발을, 유대교는 유대교의 깃발을, 그리스도교는 십자가를, 이슬람교도는 반월의 깃발을 걸게 하라. 그러나 그들도 모두, 그러한 것은 단순한 외면적인 표징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종교의 본질적 원리는 예수, 바울, 마누, 조로아스터, 부처,
그리 중요하지 않은 평범한 것을 많이 알기 보다는 참으로 좋고 필요한 것을 조금 아는 것이 더 낫다. 작은 서재에 굉장한 보배가 존재할 수 있다. 수천 년에 걸쳐 세계의 모든 문명국에서 추려낸 가장 지혜롭고 고귀한 인물들의 세계, 즉 그들의 연구와 지혜의 소산이 그 책들 속에 고스란히 살아 숨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가까이 하기 어려운 존재인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의 고독을 깨뜨리거나 자신들의 작업을 방해하는 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고, 또는 사회적 조건들이 그들과의 교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 속에는 그들의 최상의 벗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사상이, 세기를 건너뛰어 누구인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명료한 언어로 펼쳐져 있다.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큰 정신적 은혜를 책 속에서 얻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반추동물(反芻動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많은 책을 머리에 채워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삼킨 것을 잘 새김질하여 소화시키지 않는다면 책은 우리에게 아무런 힘과 자양도 주지 않을 것이다. (로크) 무엇보다 먼저 좋은 책부터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평생 그 책을 읽을 기회를 놓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이며 평등하다는 의식은 인류에게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예수께서 이 말을 하는 목적은, 모든 사람을 통합하여 국경을 초월한 형제자매로 만드는 것, 그들을 신과 합일하게 하는 것,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영원한 생명인 사랑의 계율 아래 그들을 하나되게 하는 것이다. (라므네) 사회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는 새로운 관계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지금처럼 상대를 거의 동물로 보는 한 그들은 사람들을 동물처럼 다루는 것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고, 폭력 또는 계책을 이용해 인간을 자신들의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이 하느님의 딸과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생명의 가치를 깨닫지 않는 한 새로운 관계는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채닝) 네가 두려워하는 사람도 너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는 있다. (키케로) 도덕을 얘기하면서 너희의 의무를 너희 가족과 조국의 범위 안에 한정하는 사람들은, 그 범위의 크기와 상관없이 너희에게도 타인에게도 해로운 자기애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가족과 조국은 더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그 사물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능력이 도와주는 한도 안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위대하다. 거기에는 색깔과 형체와 크기가 있다. 그런데 인간의 내부에는 색깔도 형체도 수도 크기도 가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 무언가는 이성이다. 만약 이 세계가 이성을 스스로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세계에 있어서 이성은 인간의 이성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세계는 무한하고 인간의 이성은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이 전 세계의 이성일리는 없다. 따라서 세계는 이성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그 이성은 무한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공자) 천국에 대해 얘기할 때, 사람들은 보통 머리 위의 무한한 공간 속 어딘가 높은 곳을 연상한다. 그러나 그때 그들은, 우리가 사는 지구도 그 우주 공간에서 바라보면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 중 하나로 보인다는 것, 그러므로 그 우주의 주민들도 지구를 가리키면서, “저기 저 별을 보라. 저건 영원히 축복받은 장소, 우리를 위해 마련된, 우리가 언제가는 가야 할 하늘의 집이다”라고 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문제는, 우리의 지성이 일으키는
인간은 어린 시절에 가장 암시를 받기 쉽다. 논리는 어른이 실제로 보여주는 본보기에 비하면 천분의 일의 영향력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린이가 보는 앞에서 잘못된 본보기를 보여주면서 그들을 훈계하는 것은 헛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어린이의 신앙은 부모가 말로 하는 설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실제 행동에서 나온다. 그들의 생활을 움직이는 내면적이고 무의식적인 이념, 그것이 어린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들의 말은 모두 잔소리와 설교, 또는 욕설까지 어린이에게는 그때 그뿐이다. 어린이는 부모의 신앙을 본능적으로 예감하고 그것을 꿰뚫어 본다. 어린이는 우리가 아무리 겉모습을 꾸며도 우리의 실체를 다 간파하고 있다; 어린이가 관상쟁이라는 말을 듣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교육의 근본은 먼저 자기 자신을 교육하는 것이며, 어린이의 의지를 지배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첫 번째 원칙은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아미엘)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성향만큼 인간에게 불행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어린이에게 일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교육이다. 어린이에 대한 도덕교육의 핵심은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사회구조의 개선을 방해하는 가장 큰 원인은, 그것을 사회의 외면적 형식의 변경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잘못된 생각은 사람들의 활동을 엉뚱한 곳으로 끌어들이고 만다. 사회생활은 사람들의 의식 위에 구축되는 것이지 학문 위에 구축되는 것이 아니다. 문명은 무엇보다 먼저 도덕적인 문제이다. 만약 성실함이 없으면, 또 인간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존경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다시 말해 사람들에게 선덕이 없으면, 모든 것이 위험해지고,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학문도 예술도 영화도 산업도 미사여구도 경찰도 세관도, 토대가 없는 국가는 추악하고 불안정한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대중의 도덕성만이 모든 문명의 견고한 기초를 이룬다. 그리고 그 건물 네 귀퉁이의 주춧돌 구실을 하는 것이 의무이다. 조용히 나의 의무를 다하면서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야말로, 미래의 빛나는 세계를 구원하고 이를 지탱하는 사람이다. 아홉 명의 의인이 더 있었으면 소돔을 구할 수 있었겠지만, 민중을 타락과 멸망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수천 명의 선인이 필요하다. (아미엘) 문제는 결코 그리스도교인가 사회주의인가 하는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양자
인간은 그 의식이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고독하다. 그 고독은 때로는 이상하고 낯설며 괴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생각이 부족한 사람은 여러 가지 기분전환을 시도하며, 괴로운 고독의 의식에서 도피하고자 의식의 높은 곳에서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만다. 이에 반해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 그 높은 곳에 계속 머물러 있다. 개체는 유한하다. 그러므로 신은 결코 개체일 수가 없다. 그런데 기도는 신에 대한 호소이다. 개체가 아닌 것에 어떻게 호소한단 말인가? 천문학자들은 정말로 움직이는 것은 보이는 별자리가 아니라, 자신들이 천문대와 망원경을 설치한 지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역시 지구의 움직임이 아니라 별자리의 움직임을 기록한다. 그렇게 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기도도 바로 그것과 같다. 신은 개체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개체이기 때문에, 자신과 신의 관계를 신이 개체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개체와의 관계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개체를 인격체로 이해하는게 더 옳을 것 같다. 옮긴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 우리의 시대가 오늘날 사로잡혀 있는 이기주의와 회의와 부정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요구되고 있는 것, 그것은 우리
진정한 행복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은 물체의 그림자처럼 선한 생활에 항상 따르기 마련이다. 신은 우리를 더욱 선하게, 더욱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의 눈앞에 또는 우리 가까이에 갖다 두었다. (세네카) 자신의 생명을 정신적 자기완성 속에 두는 사람은 불만을 느끼는 일이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파스칼) 진정한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활동은, 언제나 쾌락의 획득을, 고뇌의 회피를,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의 도피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쾌락에 대한 욕망은 타인과의 투쟁에 박차를 가하고, 고뇌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며 죽음을 끌어당긴다. 그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 그들이 알고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더욱더 많은 쾌락을 좇는 것이다. 그러나 쾌락에는 한계가 있어, 그 한계를 넘으면 쾌락도 고뇌로 바뀌고 더욱더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바뀌어버린다. 진정한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뇌의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은 남으로부터 힘으로 빼앗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쾌락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 남으로부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힘으로 빼앗는 것은,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을 주는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