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사람이라도 자기 속에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의식의 눈뜸이야말로 복음서가 부활이라고 부르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열매가 익으면 꽃잎은 진다. 네 속에 신의 의식이 자라기 시작하면 너의 약점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비록 천년에 걸쳐 어둠이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해도 빛이 그것을 뚫으면 이내 환해진다. 네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아무리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해도 신이 그 속에서 눈을 뜨면 당장 환하게 밝아진다. (바라문의 잠언) 자존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신을 보는 데서 생긴다. 그러므로 자존심의 근원은 종교 안에 있다. 그 가장 좋은 예는 겸허함 속의 위대함이다. 어떠한 귀족도 황후도 자존심이란 의미에서는 성자와 비교될 수 없다. 성자가 겸허한 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그가 느끼는 신에게 의지함으로써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머슨) 사람을 아는 지자(知者)이지만 자기 자신을 아는 자는 진정한 현자(賢者)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자는 신도 알게 된다. (동양의 지혜) 신은 네 가까이 있다. 하느님은 너와 함께, 그리고 네 속에 있다. 신의 영혼은 우리 속에 있고, 언제나 우리의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
위대한 현인이 권력을 쥐고 있을 때, 백성들은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리 현명하지 않은 사람이 권력을 잡을 때, 백성들은 그의 명령에 따르며 그를 찬양한다. 더욱 현명하지 않은 사람이 다스릴 때는, 백성들은 그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현명하지 않은 사람일 경우에는, 백성들은 그를 경멸한다. (노자) 깨어난 사람에게는 이른바 국가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폭력행위는 변명의 여지없는 악이며, 따라서 그는 국가기구에 결코 참여하지 않는다. 국가의 폭력행위는 외적인 수단으로 사라지지 않으며,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의 의식에 의해 비로소 사라지는 것이다. 힘은 서로의 사랑 속에 있으며, 나약함은 서로의 적대 관계 속에 있다. 우리는 사랑의 힘에 의한 합일에 살고, 불화에 의한 분열에 의해 멸망한다. (류시 말로리)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국가적 폭력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고, 지금도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폭력은 그들의 평화로운 생활을 방해할 뿐이기에 국가권력이 없는 미래를 꿈꾸지 않을 수 없다. 또 그렇게 꿈꾸는 이상, 아무래도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한 세상을 실현하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 유해한 것을 자랑한다. 즉 권력과 부귀가 그것이다. 어디를 찾아봐도 어떤 점에서든 자신보다 더 나쁜 사람을 찾아낼 수 없는 악한 자, 따라서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악한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칠 수 없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현명한 가르침을 듣자마자 남에게 그것을 가르치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섭취한 음식을 이내 토해내는 병든 위장과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흉내 내어서는 안 된다. 귀로 섭취한 마음의 양식을 자신의 내부에서 잘 씹고 소화하기 전까지는 성급하게 토해내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누구의 마음에도 양식이 되지 않는 오물이 나올 뿐이다. (에픽테토스)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의식하는 것은 결코 교만이 아니다. 교만한 마음은 세속적인 성공에 비례해 커지지만 인간적 존엄성의 의식은 그 반대로, 세속적으로 냉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증대한
동물로서의 인간은 죽음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죽음을 모르고 따라서 죽음에 저항할 수도 죽음을 원할 수도 없다. 죽음에 대한 관념이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야 할 영향을 주지 않고 있는 까닭은, 우리는 행동적인 존재로서의 본성으로 인해, 실은 결코 죽음을 생각해서는 안 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에는 죽음과 상통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이성을 흐리게 하고, 죽음의 불가피성에 의심을 품게 하려는 막연한 희망이 끝까지 우리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생명은 악착같이 열심히 살고자 한다. 그것은 우화 속의 앵무새처럼 목이 졸려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뭘, 괜찮아, 이까짓 것!” 하고 되풀이 한다. (아미엘) 죽음의 순간, 영적 본원은 육체를 떠나지만, 육체를 떠남과 동시에 시공을 초월한 모든 본원과 합치하는지, 아니면 다른 유한한 존재 속으로 옮아가는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오직, 죽은 뒤에 육체는 자기를 길러왔던 것에게 버림받고 단순한 대상이 된다는 것뿐이다. 죽음은 의식하는 대상의 변화 또는 소멸이다. 연극의 막이 바뀌었다고 해서 손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의식
자신의 생명이 자신의 영적 ‘자아’에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삶에 있어서나 죽음에 있어서나 악이 있을 수 없다. 물질은 영혼의 굴레이다. 진정한 생명은 이 굴레를 끊임없이 타파하여, 마침내 완전히 파괴에, 그것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즉 죽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관이야말로 삶에 있어서나 죽음에 있어서나 완전한 평화를 가져다준다. 설사 운명이 너를 어디로 내던지더라도, 네가 스스로 생존의 법칙에 충실한 한, 너의 본질, 너의 영혼, 너의 생명, 너의 자유와 힘의 중심은 언제 어디서나 너와 함께 따라다닐 것이다. 세상에는 자신과 자신의 영혼의 합일을 파괴하거나, 영혼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자기 자신과의 내면적 불화에 의해 영혼의 평화를 깨면서까지 추구해야 하는 외면적 행복이나 외면적 위대함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 값비싼 희생을 치러서라도 손에 넣어야 할 무엇이 있다면 부디 나에게도 가르쳐주기 바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신은 기도를 드리고 아첨을 떨어야 하는 우상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실현해야 하는 이상(理想)이다. (류시 말로리) (理想은 ‘생각을 분별하고 다스린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부는 우리에게 결코 만족을 주지 않는다. 부가 늘어남에 따라 욕망도 커지기 때문에, 부가 크면 클수록 욕망의 만족도는 낮아진다. 우리의 재물욕에 적당한 한계를 두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그 점에 대한 사람들의 만족도는 어떤 사람의 절대적인 크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크기, 즉 그 사람의 욕망과 재산의 크기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므로 재산 그 자체는 분모가 없는 분자처럼 지극히 의미가 적은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싶어한 적이 없는 것, 그래서 그에게는 필요 없는 것은 없어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그런 반면 그 사람보다 백갑절이나 되는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더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은 스스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법이다. (쇼펜하우어) 좀더 재산이 있었으면 하는 기분이 들 때는 즉시, 실은 이것만으로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거라고 고쳐 생각하는 것이 좋다. (리히텐베르크) 조금밖에 가지지 않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이 가난한 것이다. (세네카) 욕구를 적게 가지고, 그 적은 욕구도 스스로 충족시키며, 모든 기회를 이용해 얻으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주고자 하는 것이 훨
진정한 현자는 무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의심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수고와 탐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자신이 지식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알려면 사람은 많이 배워야 한다. (몽테뉴) 모르는 것을 남에게 묻는 것을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말라.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언제나 진실을 말하라. 학문을 배우고도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지 않는 사람은 모처럼 밭을 갈아 놓고 씨앗을 뿌리지 않는 사람과 같다. (아라비아의 아르비테스) 철학이나 자연과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보통 사람들이 확실하다고 믿는 것을 단순히 그럴 수도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리히텐베르크)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 그리고 악한 일은 어떤 종류이든지 멀리하십시오. (데살로니카전서 5장 21절) 우리의 영혼에는 양식이 부족한 일이 없다. 그것을 자기 몸에 섭취하는 능력이 부족할 뿐이다. 과거에 존재했고 또 앞으로 존재할 모든 요소는 육적, 지적, 정신적인 모습으로 지금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한 요소들을 지배하는
인간은 고독해질수록 항상 자신을 부르고 있는 신의 목소리가 잘 들린다. 오로지 침묵하고 감추어라 너의 감정도, 꿈까지도! 네 영혼 깊이 그것을 키우고 심화하라.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그것을 사랑하며 침묵하라!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누가 이해하랴 네 마음을 누가 이해하랴 네 생명을 언어는 사상을 속이는 것을 샘물은 흐림을 꺼리는 것을 오직 침묵하고 헤아려라! 이젠 고독을 배울지어다 네 마음에는 한없는 만다라의 세계가 펼쳐지거늘 떠들썩함은 마음의 귀를 빼앗고 드러난 빛은 눈을 빼앗도다. 침묵 속에 마음의 노래를 들어라. (추체프) 좋은 의도도 입 밖에 내어 말해버리면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이 약해진다. 그러나 청년 시절에 선을 지향하려고 분발한 감정을 입밖에 표현하지 않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훨씬 시간이 지난 뒤에야 우리는, 아직 제대로 피지도 않을 꽃을 기다리지 못하고 꺾었다가, 얼마 후 그것이 땅 위에서 짓밟혀 있는 모습을 볼 때처럼 후회하게 된다. 인생의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고독하다. 따라서 우리의 진정한 역사는 결코 남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연출되는 드라마의 가장 훌륭한 부분은 독백 또는 오히
전쟁의 모든 참화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고, 그것의 가장 큰 악의 하나는 인간의 마음을 비뚤어지게 하는 것이다. 군대가 존재하고 군사비가 지출되는 것을 어떻게든 설명해야 하는데,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이성이 비뚤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강 건너편에 살고 있고, 그의 황제가 내 황제와 싸우고 있다는 이유로 그와 나 사이에 무슨 나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에게 나를 죽일 권리가 있다고 하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얘기가 또 있을까? (파스칼) 사람들이 전쟁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는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4세기 전에 피사와 루카의 주민들은 서로 맹렬하게 미워했는데, 마치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피사의 짐꾼까지도 신분이 높은 루카 시민에게 뭔가 신세를 지는 것을 피사에 대한 수치스러운 배신이라고 여겼다. 지금 그 적개심의 흔적이 어디엔가 남아 있을까? 마찬가지로 현재의 프러시아인의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에는 장차 무엇이 남을까? 그러한 감정이 장차 우리의 자손에게, 마치 아테네인의 스파르타인에 대한 증오심이나 피사의 주민의 루카 주민에 대한 증오심과 마찬가지로 보일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하다. 사람들은 이윽고 자신들에게는 서
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다. 노동과 걸식과 도둑질이다. 그런데 만약 노동자의 몫이 적다면 그것은 거지와 도둑의 몫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 사람이 선의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특별히 깊은 사상은 필요하지 않다. 나는 전 세계의 일을 알 수도 없고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해하고 그것을 설명할 능력도 없지만,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을 향해 내 행위의 기본 원칙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타당한 법칙이 될 수 있는지 물어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 행위의 기본 원칙은 옳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그로 인해 나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근본 법칙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칸트) 신은 자신이 자신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한 인간들한테서 칭송이나 숭배를 바라지 않고, 인간들이 신이 준 이성을 토대로 그 행위에서 자신을 닮기를 바란다. 무화과도 때가 오면 영글고, 개와 벌도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이 위대하고 거룩한 진리는 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갈 뿐, 나날의 삶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