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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에게 길을 묻다<15>-조화순 목사

 

- 제가 작년 초에 목사님 책을 읽어서 산골이지만 쉽게 찾았습니다. 활동가 중에 안식년을 갖고 온 사람이 있어서 편지와 함께 그 책을 선물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요.(웃음) 정말 만나뵙게 되어서 행복해요. 선생님께서 강원도 산골에 자리 잡으신지도 벌써 10년이 넘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을 기억하는 산 아래 많은 사람들은 건강과 근황에 대해 몹시 궁금해 합니다. 궁금증 좀 풀어 주시지요.

 

▲ 만 10년이 넘었어요. 11년째지. 교단에서는 70세에 은퇴하는데 예순 두 살에 이곳에 왔으니까 빨리 은퇴한 편이죠. 교회나 어디나 좋은 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시 젊은 희망인 그들에게 일할 기회를 줘야 겠다는 생각도 들고, 내가 갖고 있는 에너지가 다 소진됐다고 여겨지기도 했죠. 또 오만가지 사회운동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환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환경운동한다고 하면 또 ‘빨갱이’로 쫓겨다니는 실정이었습니다. 나이 들면서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땅 한평이라도 살려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과 자연이 모두 죽어가고 있잖아요. 너무 욕심부리지말고 조금이라도 살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이 산골에 들어온거죠. 저는 말보다 몸으로 일생을 살아온 사람이어서 시골사람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농촌에서는 몸으로 일을 해야 하잖아요. 늘 몸으로 사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서인지 이곳 생활이 마냥 편하고 좋았어요.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이 강했고, 하늘나라를 확장해야한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저를 현장으로 끌어내면서 남들에게는 ‘희한한’ 사람이 되어버렸죠. 하지만 농촌 생활 경험이 없었던 저는 시골을 그리워하며 늘 그것을 준비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후배들이 이 집을 지어준 거예요. 제 재산이 아닙니다. 제 것이라고 의료보험료 내는 것, 그것 외에는 소유물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살다보니까 보너스는 많이 받았죠. 자연은 제게 놀라운 스승입니다. 과격하단 소리를 숱하게 들었는데 자연은 나의 표정과 행위를 순화시켜줬어요. 목사로서 기도를 많이 해서 변화한 것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의 삶이 소위 ‘여성성’(웃음)도 만들어주고 나를 변화시킨거죠.
김치도 담그고, 뜨개질도 하고요. 집 주변의 나무는 제가 씨앗을 뿌려 10년 간 키운 것들입니다. 매일 눈 뜨면서 진정 내가 여기 있는 것인가 되 묻곤 하죠. 자연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항상 감동받고요. 하나님이 나를 샘플로 만들어 놓은 것 아닌가 싶어요. 남자도 없이(웃음) 자연과 더불어 전혀 외롭지 않은 삶 말이죠. 내 소원은 예수님처럼 자유스럽게 담대하게, 포용하면서 그렇게 사는 거예요.

 

 

- 저도 시골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머리로는 계속 하고 있어요. 너무 부럽습니다.
▲ 시골에 있으면 자연을 아름답다 스쳐지나가지 않고 깊이있게 관찰하는 습관이 들어요. 거창하게는 우주라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생명의 근원,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게되죠. 내 안에 우주, 자연,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다가 ‘왜 남녀차별금지 운동을 했을까, 자연을 무시하고 그랬나’하는 생각도 한답니다.

 

 

- 성경 구절에는 낮은 대로 임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늘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생각을 공유하라는 말로 알고 있는데요. 진정으로 낮은대로 임하라는 뜻을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풀이하고 계신지요.
▲ 그 생각이 자꾸만 달라져요. 의식이 생긴 이후로 교도소, 노동현장, 슬럼가 즉 사회적 정치적으로 소외받은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눴어요. 그 고통을 내가 대신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죠. ‘목사가 뭐 그런 소리를 하냐’며 빨갱이로 취급받았는데요. 어쨌든 구체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달라지더라고요.
‘나부터 낮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요. 그것이 예수의 사상이 아닌가 싶어요. 예수는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신의 아들에서 인간이 된 분이죠. 이처럼 자리를 바꿨다는 점과 말구유에서 탄생한 것 등이 스스로 자기가 낮아지는데서부터 시작한 것임을 보여주죠.
낮은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덜 성숙한 생각이었던것 같아요. 나부터 낮아져야한다는 생각은 또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어떻게 무소유자가 되어야 하는가 고민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가진 것이 없으니까 고민은 덜 하지만 말이죠. 하지만 늘 죄의식이 있었어요. 제가 유명해진 이후 노동자들을 똑바로 볼 수 없었고, 미안하다고 생각했죠. 세상이 지식인 조화순을 칭하고 나를 높이는 것이 너무 미안했어요. 하지만 그것이 세상의 코드더라고요.
지금은 이 집에서 주부들과 학생들을 만나며 살고 있습니다. 행복합니다.

 

 

- 후배들이 집을 선물한 것은 많은 사람들을 보듬고 살라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최근 ‘낮추고 사는 즐거움’이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책을 집필하게 되신 계기와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주세요.

 

 

▲ 책 이야기만 하면 나는 창피해요. 나는 목사로서 특이하게 살아서인지 ‘책 써라! 인터뷰하자’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죠. 70년대부터 그래왔으니까요. 산업선교 당시 미국의 선교사로부터 훈련을 받았는데 첫 번째 훈련이 ‘신문에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 ‘노동자를 팔아먹지 말라’, ‘책 따위 펴내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저도 세뇌받았고 공감했어요. 때문에 언론에 노출될 때마다 기쁜 적도 없었고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날 정도였어요.
책을 쓴다는 것 또한 상상을 못했죠. 한 번은 느닷없이 농협 ‘전원생활’이라는 잡지사에서 기자가 왔어요. 와서 사진을 찍고 그게 잡지에 실렸어요. 그 잡지를 보고 한 출판사에서 왔어요. 난 관심이 없었는데 그 출판사 사람이 감동을 받았다면서 내가 없을때 사진을 남겨두고 갔습니다. 수 없이 거절했지만 결국 넘어갔죠. 제가 거절못하는 것이 딱 하나 있거든요. 후배들에게 말해줘야 하고 알려야 하는데 왜 당신은 자기만 생각하느냐는 설득이에요. 지금 인터뷰도 사실 그런 의미에서 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아시겠죠. 내가 병적으로 그걸 싫어하는걸. 그러니까 오히려 더 유명해지나. 미치겠네요(웃음). 어쨌든 책은 그렇게 나왔어요. 

 

 

- 여성목사로 노동운동가로 늘 궂은 일에 앞장서 오셨는데요. 가장 어려웠던 일은 무엇이고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나요.
▲ 해고 노동자들 120명하고 같이 살 때였어요. 3명의 대표가 들어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목사님도 다른 목사들과 똑같아요’라는 거예요. 다른 두 사람은 그 한 명을 ‘미쳤다’며 말렸죠. 그 말을 들었을 때 너무 서운하고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고생도 많이 했지만 모든 관계를 끊고 그들과 함께 했거든요. 선교사가 ‘꿈을 꿔도 노동자 꿈을 꿔라’해서 친구들을 모두 끊고 빨갱이라 찍히면서 생활했는데, 나는 희생하고 포기했는데, 굉장히 화가나고 슬펐죠. 속으로 그랬지만 용케 부드럽게 ‘뭐가 다른 목사랑 같은지 말해줄래. 내가 반성하고 고칠께’ 했더니 ‘지금은 생각이 안나지만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요’라고 답하더군요. 그 세 사람이 나갔어. 저는 조그만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화가 나서 혼자 무척 울었죠. 이 사람들이라도 나를 인정해야지. 내가 세상에 단절됐는데 하면서 원망하고 있는데 그 생각 밑바닥에서 ‘너도 박정희랑 똑같아’ 이러잖아요. 그래서 ‘나는 박정희는 안돼’하고 소리쳤죠. 박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만들어놓고 그걸 반대하면, 자기 신념과 다른 이는 모두 감옥으로 보냈잖아요. 그 노동자는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말하고 그 주변 두 사람은 아부하는 태도였는데.... 순수하게 이야기한 친구를 원망하는 것이 마치 자기와 다른 이들을 미워했던 박정희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혼자 울고 정리하고 나니까 뒤늦게 진리를 깨달았죠.
거창한 이론으로 머리는 노동자로 살았지만 34살까지 부잣집 딸로 산 세포들이 무의식적으로 노동자들을 그렇게 느끼게 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의식이 바뀌려면 오랜 시간동안 세포 하나하나 다 바뀌어야 합니다.
기쁜 것은 내 생일날 그 노동자들이 나를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노동자 그룹은 회갑이 다 되는데 50~60명이 모여서 축하를 해줘요. 노동자를 통해 각성하게 됐고 잊을 수 없는 큰 사건이었지만 지금의 기쁨입니다.

 

 

- 여성 노동운동가로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분으로 추앙받고 계신데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 시대적 배경이나 계기가 있었는지요.
▲ 노동운동보다 여성운동을 많이 했죠. 안기부에서는 선동자, 백만불짜리 목소리가 들어온다고 했어요.
저는 타고난 선동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할 때마다 선동관련 일을 저를 시키더라고요. 원고 하나 없이 그냥 느낌으로 청중보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 모두 함께 일어났죠. 노동절 때는 성명서를 읽었는데 일명 ‘손뼉부대’를 만들어놓은 손학규도 놀라더군요. 성명서 하나 읽어서 모두를 일어나게 만들었거든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라는 달란트가 아니었나 싶어요.

 

 

- 민주화운동은 20년이 지난 상황이고 많이 바뀌었는데요. 서슬 시퍼런 70년대 동일방적, 원풍, YH사건은 부마사태 등과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독재를 종식하는 단초가 됐다는 평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성노동운동이 공교롭게도 우리의 민주주의 발전사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암울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최고의 가치는 무엇이었고 그 가치는 어떻게 변화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지금이야 잘하죠. 과거에는 여성운동이 없어서 내가 뛰었지만, 지금은 여성운동도 성폭행 등 세분화되고 잘하고 있어요. 하지만 교회는 후퇴했어요. 나는 신앙이 뿌리인데 꼴보기 싫어서 가지도 않아요. 기도를 시키는데 기도가 안 나오고 울기만 했죠. 너무 화가 나요. 교회가 미국의 앞잡이인지, 한나라당 대변인인지,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고 정말 요즘 세상을 보면 더 화가 납니다.
과거에는 독재타도만 외치면 되고 하나의 주제를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 지 슬프고 막막해요. 근원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가 바뀌면 교회가 달라집니다. 저는 그걸 경험했죠. 50년된 시골 교회에 나같은 희한한 사람이 갔는데 소신갖고 하니까 1년만에 마을사람이 달라지더라고요. 정치인들을 교회에 불러모아서 농민을 위해 어떤 정책을 할 것이냐 질책하고 강연회를 하니까 지역센터가 되었어요. 원칙은 없어요. 지금은 노동자, 여성의 언어가 없어요. 노동자라는 말을 근로자의 날로 바꿨잖어요. 그걸 다시 노동자로 바꿨는데 단어 하나의 변화만 봐도 언어가 주는 위력이 대단한 것을 알 수 있죠. 지식인의 언어만 있는 지금의 세상에서 단 한 번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의식화보다 한 번의 경험이 의식의 업그레이드를 가져올 것이예요.

 

 

- 하산할 계획은 없으신가요? 자연과의 사랑에 빠져 계시니(웃음)
▲ ‘아리랑의 날개’(윤두병)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을 통해서 최근 생긴 한국민족역사바로찾기운동이라는 단체를 알았고, 소속 사람들을 만나면서 우리나라 고대역사를 탐방하는데 참여했었어요.
거기서 강의를 들었는데 내가 너무 밉고 속상하더군요. 목사니까 이스라엘의 역사는 알면서 우리 민족의 대단한 그 역사를 너무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역사의식이 너무 없어요. 그래서 우리의 얼을 되찾는 운동, 그것의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교회에서 여성운동을 해야죠.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얻은 것은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에요. 지도자를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죠.
감리교의 여성개발원이나 쉼터 등에서 실천하고 있죠.
제가 아는 사람은 모두 유명한 사람들인데 저는 그들이 기득권에 들어가면 사회가 바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잖아요. 인간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아서 변한 것이 없어요. 운동했다는 사람들이었으니 똑같은 검은차, 그것 하나라도 바꾸라고 이야기하는데 바꾸질 않아요. 순수한 사람들이 기득권에 들어가면서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근원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쉼터, 개발원에서 지도자를 키우고 근원적인 우리의 역사를 알리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요즘 고전무용을 배우면서 언어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춤으로 설교를 하고 싶어요. 세포 하나하나가 다 깨어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깨어 일어난 것을 나도 모르는 표현으로 표출하고 싶어요.

 

 

조화순 목사는?
한국 기독교사를 통틀어 아홉 번째 여성목사인 그는 동일방직 사건을 통해 노동운동에 불을 지피고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권 찾기를 주도했다. 어느 날 18년의 산업선교의 현장을 떠나 또 다른 현장, 농촌교회로 내려가 지역사회에서 교회가 할 바를 실천하기도 했다. 여성 운동의 대모로 불린 실천가는 10여 년 전 현장을 떠나 해발750m 고지 봉평 태기산에 집을 짓고 혼자 살고 있다.

 

 

류명화 대표는?
수원여성회 상임대표로 수원지역 시민운동 특히 여성운동에 중점을 둬 활동하고  있는 여성 권익보호 운동가다.
불우이웃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고조시키기 위해 매년 말,바자회를 열어 수익금 전액을 불우단체들에 기부하는 등 우리 사회 어두운 곳을 찾아 어려움을 나누는 양심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 지역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해 매탄4동 주민자치위원회 위원, 수원방송 시청자위원회 위원, 수원구치소 성폭력모니터링 감시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담=류명화 수원여성회 상임대표  /정리=류설아기자 rsa@kgnews.co.kr
사진=최윤영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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