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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에게 길을 묻다<18>- 예춘호 전 국회의원

조문래 문화운동가 대담

 

조 : 선생님께서는 올해 여든 한 살이 되셨는데, 뵙기에 연세에 비해 아주 건강해 보이십니다. 요즘 어떻게 지는시는 지 근황이 궁금합니다.
예 : 건강 때문에 운동을 하거나 약을 먹거나 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예전부터 죽 해오던 낚시를 하고, 그 외에는 집에 있을 땐 글씨를 좀 쓰고 지냅니다. 이런 시간이 결국 세속적인 것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입니다. 또 이것이 가장 건강에 좋은 것 같고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조 :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에 대해 ‘마지막 재야인사’라는 표현을 쓰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 최근에는 좀 부끄럽게 생각을 합니다. 저희들은 삼선개헌과 유신을 반대했습니다. 박(박정희)대통령이나 김종필씨 측근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사실 존경했던 부분도 있습니다. 그 애국심이라든지 국가나 겨레를 위해서 일한 뜻에 대해서는 공감을 합니다. 다만 우리들이 만들어놓은 헌법을 짓밟고 자기집권화 하는 것은 민주적으로 반대를 했습니다. 저희들도 물론 젊은 때는 비교적 진보적인 사상을 지녔다는 것에 대해 많은 곤욕도 치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러한 생각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저희들이 민주투쟁을 할 때는 어디까지나 민주투쟁이지 사상을 배경으로한다거나, 아니면 그런 것을 전제로 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요즘에 들어서는 한국의 해방직후의 사정들이 간과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틀 안에서는 여러 사정들도 수용을 하고 거기에 부정적인 어떤 연관 정신들이나 주장들이 잊혀지고, 마치 진보적인 정권을 가지려는 투쟁을 한 것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상당수 많은 분들이 색깔없는 이미지 투쟁을 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개다 다 정권에 참여하는 입장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물론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사회주의도 민주주의고 자유주의도 민주주의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수립될 당시 사정들은 국제적인 문제들을 초월해서 잃었던 나라를 세웠다는 이런 입장에서 수립이 된 것입니다. 또 참여한 사람들도 쇄도했지만 그런 것이 짓밟히는 느낌을 받을 때에 서글픈 생각도 듭니다. 결코 어떤 주의주장을 목적으식으로 보면 안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조 : 전 국회의원 출신이고, 일선에서 활동하실 당시 여당의 핵심브레인으로 꼽히고 했습니다. 어떻게 정계에 입문하게 됐는 지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죠.
예 : 사업을 하고 학계에 관여를 했습니다. 젊을 때 진보적이라는 평가 때문에 상당히 곤욕을 치렀습니다. 구속, 고문같은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공화당 시절 사무국장으로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5.16 나기 전에 젊을 때부터 사회적인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 입장에 서서 심부름 하고 젊을 때 고등학교 둘 중학교 둘을 유치하고 간부로서 역할도 하고 체육회 등을 고향에 만들어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 사이 부산시장과 내 앞에 국회의원을 지낸 분들이 나를 지목했습니다. 서른 한 두 살 때 4.19가 나고 민주당 정부가 들어섰고, 또 5.16이 일어나서 민주당 정부가 무너지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사실 그때 군사정권에 대해서는 지극히 못마땅했습니다. 어느날 혁명주체 중 한 사람이 찾아와 “나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며 민간인 책임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나를 지목했습니다. 저는 그 때 솔직히 군사정권에 대해서는 반대 이상을 갖고 있었고 잘되거나 못되거나 헌정질서가 유지되면서 정치활동이 계속됐을 때 언젠가는 보람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한 달 열흘을 이리저리 생각해 보더니 “당신이 적임자 인 것 같다. 맡아 달라”고 해서 경남지부 운영부장 겸 부산시촉진회회장을 한 6개월 활동했습니다. 사실 그때 처음 그 분을 만났을 때 신분은 안 밝히고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서 “선생님께서 동의를 안 해주면 비밀문제 때문에 상당히 신상에 어려운 문제들이 생길 것”이라고 협박도 했었습니다.(하하하)

 

 

조 : 당시 진보적인 생각으로 정치에 입문을 하셨는데 요즘 정치판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특히 참여정부나 여·야를 보면서, 또 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특별연설을 보신 소감이 궁금합니다.
예 : 조금 거꾸로 이야기를 하십시다. 지금 사는 것이 모양이 굉장히 바뀌었습니다. 40년 전에 비한다면 천양지차로 바뀌었습니다. 그땐 요즘 이맘때 되면 농촌이나 도시다 다 식량을 걱정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리고 국민소득이 그때만 하더라도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활동을 하고 5.16이 터지던 당시 100불이 안됐습니다. 올해 예산이 3백몇십조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60년대 6대 초의 예산이 200억밖에 안됐습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변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학교에서 다 공부하겠지만, 주의주장은 가치가 아닙니다. 어떤 민주주의다, 사회주의다, 공산주이다 라는 것이 가치가 아닙니다. 행복의 수단으로, 살기 위해서 주장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어쨌건 어려운 고비들을 넘기고 잘 살고 있고, 작년에 수출 실적이 3천억불이라는 결과도 낳았습니다. 3천억이라는 이야기는 하지만, 세부에 들어가서 무엇을 수출했다는 이야기는 안나옵니다.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서 어떤 나라에 보내서 무엇이 얻어졌다는 것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것을 따지게 되면 우리나라의 입지조건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내 입신양달보다는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크게 내다봐야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조그마한 생각을 키워나가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사회가 지니고 있는 특수여건, 존립조건 이런 것을 잘 간추려서 어떻게 하면 이 단계에서 한 단계 더 넘어서고 올라설 수 있는 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이 역사라는 것이 무엇인가. 즉 우리들이 걸어온 과정이고 많은 사람들이 걸어온 것입니다. 이 역사라는 것은 많은 것을 일깨워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좋은 점도 알아야 되고, 나쁜 것도 수용을 하고 수완을 해야됩니다. 지금 이런 것을 뒤죽박죽 문제만 따지지, 무엇 때문에 하는 지 그것으로 인해서 무엇을 얻는지 배울 게 없습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6.25가 나기 전만 하더라도 혼돈상태였습니다. 해방이 되자 우후죽순 격으로 정당들이 일어났고 말 한마디 하는 사람들은 전부 정당을 만들어 시끄러웠던 시기였습니다.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지고 우리도 처음에는 당정수립에 대해서 미국에 대해서 상당한 의심도 갖고 불신도 가졌습니다. 지금은 눈이 많이 바뀌어서 우리보다 나은 쪽으로 갔던 것들과 목적의식을 갖고 나가는 쪽에 집중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당시에 좌익쪽이 상당히 많을 정도로 일부 사상적으로는 처음부터 탄압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유가 있었는데 점차 대한민국이 수립이 되고 6.25를 거치면서 탄압이 심해졌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가 자고 일어나면 좌익은 우익을 우익은 좌익을 서로 죽이려던 시기였습니다. 그 투쟁이 심했지만, 조직은 좌익이 훨씬 앞섰습니다. 정권이 만들어지고 민청련이 만들어지고 부녀동맹, 문학동맹 등이 다양하게 체계적으로 만들어지고 조직도 구체적 사회활동을 했습니다.
임시정부들도 각계 방향으로 활동을 하다 해방직전에 김구라는 인물이 중심이 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뭉쳐진 경향이 있습니다. 그 안에도 예를 들면 군사부장을 맡았던 사람과 분열이 있었고, 내부에선 조중환과 김구와 또 입장이 다르면서 복합된 착잡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이 수립이 되고 차츰 질서가 잡힐 즈음에서 자유가 탄압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들도 처음 단독정부 수립을 할 당시 5.10선거 사건이 있었는데 그 선거는 자유라는 부분에 상당히 방해가 있었습니다. 투표소와 개표소에 불지르는 일들이 다반사로 있었고 그런 와중에 선거가 치러져서 여러명이 당선이 됐습니다. 그분들이 사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유식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독립운동가도 있고 동네 유지로 친일하며 돈을 모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건국을 하고 사회 어깨를 겨누어 나가는데 지식인이라는 측면에서는 조금 떨어지는 입장이었습니다.
대통령 이야기를 하자면 일단 지금처럼 그러면 안됩니다. 그분이 부산상고를 나와 고학과 고시합격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당히 집중적으로 몇 년간 공부를 해야하는 과정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그래서 사회라는 것을 잘 모를지도 모릅니다. 알기로는 현재의 386과 대통령이 별로 연대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80년 3월에 국회에 들어갔을 무렵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날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80년에 지역선거 나와서 광주에 초청받아간 일이 있는데 3.1절 기념연설을 하고 부산에 내려갔습니다. 부산에 우리와 동조세력으로 있던 임목사라는 분이 조사 중 맞아 사망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지금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더불어 부산에는 김대중을 변론했던 김광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김영삼 전대통령의 비서실장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러 갔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전혀 활동이 없었습니다. 12대 국회 구성될 당시 김강일이라는 사람이 김대중쪽일을 하다 김영삼으로 넘어갔습니다. 김영삼씨 추천으로 김강일이 부산동부에 출마를 하게 됐는데, 김강일은 나중에 노무현 씨가 당선됐을 때 10가지를 조목조목 들며 노무현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천거도 했고 부산후배였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이 잊혀질 수 없는 일들입니다.
당원이 되자마자 그분이 민주당을 깼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자기가 대통령 출마할 때 공약을 많이 했는데 자기의 주장들을 TV와 라디오 등 각종 글과 매체를 통해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주당이 공약한 것을 깨 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통령이라는 자리의 각국의 사정들을 보면 50세 미만도 많이 있습니다. 60세 넘어가는 사람들은 별로없는데 젊어야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경험을 해보니까 40대보다 30대, 50대보다 40대인 것 같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나이가 적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만 이야기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대중에 대한 표정도 틀렸습니다. 말할 때 보면 생긋 웃다가 눈은 가늘게 뜨다 굵게 뜨다, 화를 불끈 내는 것이 그렇습니다. 국민들에게는 그렇게 해선 안됩니다. 국민은 민주사회에서는 나라의 근본이고 주인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장관이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국회의원을 할 때는 6대 7대 10대 등에서는 장관들도 우리에게 맥을 못췄습니다. 국민을 대할 때는 어디까지나 겸허하고 진지해야 합니다. 잘 못한 결과에 대해서는 수용해야 합니다. 노대통령에게 정책적으로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대통령이란 것이 성실하고 진지하고 겸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태도부터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10시간, 100시간을 이야기 한다고 다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두 시간이라도 좋으니 가능한 범위에서 국민들에게 알릴 것을 알리고 주장할 것은 주장해야 합니다.
개헌문제도 말이 안 됩니다. 지금 의석이 안되면 개헌도 안 됩니다. 야당이 독려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현실 때문에 장기집권을 하게 되면 부패하고 또 딴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결론적으로 망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들이 개선을 해야되겠다해서 꼭 개선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사회가 잘 된다고 한다면 정당이 정말 정상적인 룰 위에서 활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대통령이 나서 결론을 내고 정당이 나서서 한 사람이 날아가면 그 정당도 날아가는 모양입니다. 이런 식으로 언제 우리가 맑은 정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온 국민들이 슬기롭게 헤쳐나가야 하고 정당들도 깨트릴 것이 아니라 정당이 집권을 하게 되면 열심히 하고, 또 패배를 하면 국민들이 무얼 원하는지 무얼 심부름 해야 하는 지 와신상담하고 이래서 차기를 노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 깨고 만들고 당략에 맞서는 모양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조 : 잠시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를 좀 듣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박정희 대통령을 오래 모셨습니다. 박 대통령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 : 박정희 대통령은 사실 애국자입니다. 내가 당시 사무총장으로 재임할 당시 2년 동안 아침 저녁으로 모셨습니다. 그 분이 마흔 후반, 내가 서른 후반쯤 됐을 때일 겁니다. 그분이 나를 밤에 1∼2시가 돼서 부를 때가 있습니다. 들어가보면 아무도 없는데, 또 그때는 화려한 집도 아니었습니다. 예전 총독부 자리를 이승만 대통령이 쓰고 윤보선 대통령이 썼는데 집무실이라고 아주 작고 소박했습니다. 2층의 주거공간도 소박했습니다.
밤새 비가 오고 그러면 전화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집에도 못 가고, 파김치가 되도록 다그치면서 일을 했습니다. 그 분이 그렇게 억척스럽게 일을 했습니다. 비교적 세상에서 말하는 것보다는 결백했고 인정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박정희에 대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 : 최근 경제와 민생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그것이 양극화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양극화 문제의 해결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사람의 임금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나서 자라고 공부하는 환경에 드는 비용이 다시 재생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이 든 사람들은 조금 더 받을 수도 있고, 적게 든 사람은 적게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 노동포화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와 있냐는 것이지요. 지금 100만명이 일터가 없다는데, 그 전부 지식인들입니다. 예를 들면 1929년에 뉴딜 정책을 내세울 때, 10년 뒤를 내다보고 경쟁력있는, 탄력성있는, 경쟁에 이길 수 있는 것을 내다보자는 주장이었습니다. 항만이나 철도 건설을 한다든지 도로 공사 등이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노동력을 그 쪽으로 돌렸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정부가 경기 부양책을 쓴다는데 안되는 것은 지식인들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력은 다른 나라에서 데려오면서 말입니다. 최근에 중산층도 무너졌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회주의 논리로는 봉합이 안됩니다.
경북대학교의 김 모 교수라는 사람이 경제이론이 밝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본을 가 보면 TV나 신문에 글 쓰는 사람들은 대학 부교수 정도입니다. 나이는 한 40대 정도고요. 참 대단한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노벨 경제학상 후보도 있었습니다. 공부를 20년 했다 30년 했다 이 것이 문제가 아니고 조금은 머리와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사회의 경제는 정상적인 룰을 가지고는 치정이 안됩니다. 지금 현재는 해결방안이 없다고 봅니다. 노 대통령의 말도 일부는 맞습니다. 경제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옛날에는 10년을 주기로 경제를 콘트롤 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유시장 경제원칙에 따라 각자가 머리를 써서 힘을 만들고, 지적 수준에 따라서 부분적으로는 일본을 능가한 것도 있었습니다.
요즘 이런 말들도 많이 나옵니다. 돈 많이 번 사람들은 환원, 빌게이츠처럼 멋진 기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환원하는 여건, 심정적인 분위기 자극 등을 정부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정부는 공정해야 합니다.
지금 노무현 정부는 진보적이라고 하는데, 진보적이려면 훨씬 더 진보적이여야 합니다. 말만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 배에서 나오는 소리, 뿌리가 사회적으로 돼 있어야 합니다.
젊을 당시 우리사회도 사회주의 경제로 가야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이 안 된다고 하니까 팔아먹을 데가 없습니다.

 

 

조 : 올 해 대통령 선거가 최대 이슈인데, 대통령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 대통령은 첫째로 철학과 신념이 있고 경박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 욕심을 갖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내 임기 중에 하나를 이룬다”는 생각, 즉 노동이든 부동산이든 하나만 쫓아야 되는 것이지요. 좋은 훌륭한 박사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을 많이 활용해야 하는 지도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대학 동기들, 언론계 사람들이 1년에 한 두 번 만나는 자리가 있는데 1년 전쯤인가 고건 씨가 큰 뜻을 갖고 동창들을 모아 결심을 하겠다고 했는데 언론인 중에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사람이 말렸다고 하더라구요. 인기만 갖고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조 :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 궁금합니다. “북한을 돕는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해왔는데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요?
예 : 북한 동포를 돕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도와지느냐가 문제입니다. 돕는 방법이 잘 못된 것입니다. 외교라는 것은 1대1일 때 이야기가 됩니다. 당사자 외에 4개국이 더 끼면 이야기가 안됩니다. 박정희가 자주국방을 주지했다가 주변인과 부딪치고 핵을 갖지 못했는데 그때 만약 핵을 가졌다면 현재 우리나라처럼 외부에 끌려 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과의 대화만큼은 우리와 북한이 1대1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것이지요. 일본과 대등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조 : 87년도 3김이 불안할 당시, 선생님께서 김대중 김영삼 단일화를 추진했었습니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 있는데요. 요즘도 신당 창당이다 탈당이다 합당이다 말이 많습니다. 따끔한 충고나 조언이 필요해 보입니다.
예 : 김대중과 김영삼은 참 외골수입니다. 둘은 결별을 했었습니다. 어느날인가 밤에 회의를 하는데 이상한 낌새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민주투쟁을 한 것은 개인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정권타파를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우리 사회에 대해 확신을 갖고 주장을 강조해 나간 것입니다. 옛날 정치인들 사이에는 어느정도의 의리나 신뢰같은 것이 있었지만, 요즘 정치인들은 의리나 신뢰가 없어 보입니다. 최근 열린우리당의 모습을 보면서 ‘이건 안되는 일이다’라는 생각이 듭디다. 끝까지 그 정당이 여당으로서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하는 것입니다. 국회에 아무도 없는데, 대통령 혼자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대통령 혼자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박정희 독재 이상의 일입니다. 정당이라는 것은 뭉쳐야 하고, 어느 정당이건 간에 대통령을 냈다면 그를 중심으로 뭉쳐야 합니다. 일단 민주당 깨고 정당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는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최근 김대중 전 대통령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실 지금 정당에 매달려야 합니다. 열린우리당을 통해 나가야 되고 가능하다면 민주당과 협술을 하고 뭉치는 것이 좋습니다. 뭉침으로써 다수파가 돼야 합니다. 의석의 3분의 2가 안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대통령의 현지지도가 20퍼센트도 안되는 상황에서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조 : ‘행운유수’가 생활신조라고 들었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승복하고, 바른 것을 바른대로 주장한다는 지금껏 선생님께서 보여주셨던 모습이 그대로 담긴 것 같습니다. 취미로 하시는 낚시와도 무관하지 않은 듯 합니다.
예 : 나이가 들면 에너지를 재충전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재충전을 하는 것에 있어 가장 핵심은 세속적인 것을 잊는 것입니다. 회사나 사회, 집안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그대로 쌓아두고 있으면 홧병이란 것이 생깁니다. 일주일 열심히 일하고, 산에 가든, 하다 못해 고수부지에 나가든 자연 속에서 고함도 질러보고 돌도 던져보고 이러는 것이 좋습니다.
겨울에 낚시를 나가서 두 시간 세 시간 앉아있다 보면 자연은 계속 변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도 흐르고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는 돌들이 짜임새 있게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격정의 삶을 다 잊어버리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내가 글씨를 쓰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조심성 있게 먹을 가는 것도 30~40분이 걸리고, 글도 한 시간 두 시간 쓰게 됩니다. 벼루와 붓을 씻는 데도 시간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그 시간에는 온전히 ‘자신’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노력하는 만큼 쉬어야 합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어떤 것이 됐든 그런 시간들을 통해 세속적인 것을 털어버리고 욕심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 : 선생님의 정치신념과 철학에 비춰서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 정치인이라는 것은, 평생 자신의 일을 일하다가 봉사하는 마음으로 한 번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직업이다 혹은 돈을 벌겠다는 생각과 신념없이 팔랑개비로 이 정당 저 정당 왔다갔다하는 것은 정치제도 발전에 저해가 됨은 물론 결국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정당은 뜻을 모은 철학들이 정리가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국민들이 바라고 있는 것 중에 가능한 것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국민들의 시각, 속의 근심까지도 다 읽어야 하는 것이지요. 드라마 중 나라를 창건하는 사람도 쫓겨나고 밥도 못 먹는 것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늘 그런 상황들을 머리 속에 넣고 자기 길을 가야 합니다. 초야에 묻혀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고락을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춘호 전 의원은?
69년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 파동 때 그는 공화당의 창당멤버로서 사무총장까지 지낸 여권의 핵심이었지만 헌법을 파괴하는 3선개헌에 소신껏 반대를 선택했다 고초를 겪었다. 80년 유신독재를 끝으로 찾아 온 '서울의 봄' 시절에도 동향출신의 정치인 김영삼 대신 출신지역을 떠나 순수히 누가 더 나은 정치지도자인가 하는 그의 판단에서 호남출신인 김대중을 선택해 단일화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고, 그 후 함석헌, 문익환 등과 함께 재야의 길을 걷게 됐다.
 정치인으로서 승승장구를 할 수 있었던 그가 신념과 지조를 지키기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고 험난한 재야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권력 대신 정의를 택한 그는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았으며 지금은 깨끗이 정계를 떠나 용인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조문래 문화운동가는?
조문래(48·사진 왼쪽)씨는 국내 문화예술인 200여명과 '붓다의 사람들'이란 수행단체를 결성해 명사들의 삶과 소신을 공부하고 그들의 철학을 전파하는 문화운동가다.
조씨가 만난 명사는 김지하, 백기완, 고은, 이어령, 현각스님 등 다양한 분야의 원로들이다. 또 명사로부터 직접 받은 글씨와 각종 자료를 수집한 것이 수백점에 이른다.
조씨는 우연히 예춘호 선생을 만나 지난 50년 한국정치사를 듣게 되고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서예작품을 받기도 했다.
지난 2003년부터는 '중광기념사업회'를 조직해 근대 고승의 유묵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최근들어 '한 집 한 그림 걸기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대담=조문래 문화운동가
/정리=오흥택기자 oht@  /사진=장태영기자 jty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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