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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룡문] 수원 별시

이창식<주필>

지금으로부터 218년 전(1790) 이 맘 때(4월14일)쯤 수원부는 별시(別試) 열기로 후끈 달아 올랐었다.

원래 별시 과거는 한성(漢城)에서 치르는 것이 관례인데 수원 신도시 건설을 주도한 정조의 특명에 따라 수원 읍내에서 치러진 것이다. 그것도 응시 자격을 읍내 유생과 무사에 한정시키고 4월부터 12월까지 매달 정기적으로 치르도록 했다. 이는 시취(試取:시험을 치름)를 통하여 수원부에서 태어나 자란 과거 지망생들에게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망극하기 그지 없는 특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해 10월과 12월에는 수원읍에 새로 이주한 유생과 외촌(外村) 유생에 더해 한량(閑良)에게 까지 응시 기회를 줌으로써 지역과 신분 차별을 없앴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역사 드라마 ‘이산’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정조의 개혁·개방정책은 수원으로 읍치(邑治)를 옮길 때부터 실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들은 필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수원하지초록(水原下旨抄錄)에 기록되어 있는데 지난 해 수원시 화성사업소가 역주(譯註)해 출판함으로써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그런데 당시의 별시는 요즘의 행시(行試)나 사시(司試)에 버금 간다할 수 있는데 급제자에게 주어진 부상이 하도 검소하고 실용적이어서 물질적 가치보다는 의미에 가치를 두는 고결함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예컨대, 문과 급제자 삼상(三上) 윤배언에게 팔자백선(八子百選) 1권, 대장지(大壯紙) 1권, 삼하(三下) 박간 등에게 붓 3자루, 먹 1개, 부채 2자루를 주고, 무과 급제자 김지택에게는 활 1장, 화살 1부, 차하자에게는 부채 2자루가 부상의 권부였다. 200년 전과 오늘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바른 정신과 가치관만은 이어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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