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1 (목)

  • 흐림동두천 27.0℃
  • 맑음강릉 32.3℃
  • 흐림서울 28.0℃
  • 흐림대전 27.8℃
  • 맑음대구 28.8℃
  • 맑음울산 29.1℃
  • 흐림광주 28.1℃
  • 맑음부산 29.1℃
  • 맑음고창 28.7℃
  • 맑음제주 30.2℃
  • 구름많음강화 27.5℃
  • 흐림보은 26.6℃
  • 맑음금산 ℃
  • 구름많음강진군 28.5℃
  • 맑음경주시 30.4℃
  • 맑음거제 29.0℃
기상청 제공

[문화의향기] 경기도미술관 김홍희 관장

커피향이 짙은 사람….

진한 아메리카노 같다고 할까? 그 사람을 만났다. 경기도미술관 김홍희 관장은 처음 대면할 때부터 강인한 인상과 솔직담백한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는 편이다.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안산시 화랑호수은 시민들의 발걸음으로 항상 분주하다. 때로는 운동을 하고 때론 산책을 하고 공원 옆에 위치한 미술관에 미술의 세계에 빠지기도 한다. 이곳은 초여름날의 뜨거운 햇살에도 불구하고 흙내음과 물향기가 사람을 반긴다.

그래서 시민들은 이곳을 줄곧 사랑하는 지도 모르겠다.

시민들은 좀 의아하게 생각할만 한 멋진 건물이 그 화랑호수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햇살이 따스하게 비칠 때 그 건물을 바라보면 ‘아름답다’라는 감탄사를 절로 내뱉게 된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경기도의 미술의 발전을 위해 한걸음 한걸음 분주하게 나아가고 있다.

 

 


경기도미술관에는 독특하게 카페테리라아가 있다.

풍경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집무실이 아닌 그곳에서 흔들리는 작은 물결들을 바라보며 경기도미술에 관한 여러 생각을 그에게서 들어봤다.

카페에서 만난 미술관장. 역시 그다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머릿 속을 스쳐지나간다.

그래서 인지 모르지만 경기도미술관을 찾을 때면 전시 현장 곳곳에서 커피향이 담기는듯 신기한 환상에 빠지곤 한다.

아담하고 고운 꽃들이 우아하게 흔들리고 그 손짓에 이끌려 발길이 닿는 곳마다 김 관장의 손길이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물길을 담은 풍경이 펼쳐지는 1층 카페테리아, 그곳에서 먹는 베이글 샌드위치와 카페라떼는 굳이 개인의 취향을 묻지 않아도 기분 좋은 선물이다.올해 경기도미술관의 두번째 기획전인 ‘이미지 반전’전이 항상인 때 오후의 한때의 시간을 빌렸다.

조금 일찍 출발한다는 것이 공교롭게도 김 관장의 집무실에 도착하니 아직 늦은 점심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시간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소박한 도시락 한 개가 그의 집무실 테이블에 올려져 있었고 사람 냄새나는 김홍희 관장은 거기에 앉아 있었다.

짧은 인사를 마친뒤 집무실을 벗어나 카페테리아로 옮기는 수고는 몇초가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 인사치레로 나눈 몇 마디는 유쾌했다.

좀 딱딱한 인터뷰가 되리라는 예상은 어김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것 또한 기분 좋은 만남의 한 테마가 된다. 소박한 도시락으로 한 끼 식사를 하고 있는 김 관장의 모습 속에서 멋진 커리어우먼의 성공메뉴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스쳐지나갔다.

그의 화려한 시간과 경력들과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작은 여유로움과 소박함은 삶을 진정 즐길 줄 아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 장면은 순간이 됐고 어느새 미술관과 그의 미술세계에 대한 대화로 주제를 옮겨 가고 있었다.

대뜸 ‘어떻게 미술과 인연을 맺게 됐나?’란 형식적 질문을 선물로 안겼다.

 

김 관장은 “지난 1979년 서른 줄에 들어설 때 남편이 미국 뉴욕문화원 문정관을 일하게 됐어요. 뉴욕에서 뮤지엄을 찾아다니면서 만난 현대미술의 충격과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고 술회했다. 그는 “앤디워홀, 잭슨폴록으로부터 받은 그때의 문화적 충격은 곧 미술에 대한 관심을 키워줬고 기호가 돼 헌터컬리지(Hunter Collage)에서 미술사 석사과정을 시작하게 됐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화여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새로운 학문과 매력에 빠져든 그는 1986년에 동대학에서 미술사학 석사과정을 수료하게 되고 1989년에는 콩코르디아대학교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석사과정을 마치게된다. 또 지난 1998년에는 홍대에서 박사학위까지 얻었다. 끊임없는 학구열로 이끈 미술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그는 “문화적 충격은 곧 미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미국의 불문학을 전공했던 그에게 어느날 문득 다가온 미술이라는 거대한 산은 넘으면 넘을수록 스스로를 이겨내는 짜릿함을 줬다”고 간단히 받아넘겼다.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에 대한 탐구가 없었던 때 소박하게 시작한 공부는 ‘나’ 혹은 ‘여성’으로써의 정체성을 찾게 했다”고 소회했지만 영어에 익숙한 이들보다 성적이 우수했다는 후일담은 타국에서 고군분투했을 그의 모습에 땀방울을 더한다.

여성으로 이 사회를 걷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좋은 교훈, 인생의 본보기가 될 것만 같다.

그 후 귀국한 김 관장은 열정적인 큐레이터로, 시대를 아우르는 미술 평론가로, 미술관을 꼼꼼하게 이끄는 경영자로도 명성을 날리고 있다.

한미디로 눈부시다.

1995년에는 제1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로 발을 내딛어 2006년에는 광주비엔날레 예술총감독을 역임하기에 이르렀으며, 쌈지스페이스 관장으로 우리나라 대안공간의 정착과 발전에 힘을 더하는 등 열정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의 발자취 뒤에는 확고부동한 철학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

김 관장은 “미술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문화적 전략이 필요하다”면서 “지역 미술관일지라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이끌어갈 힘이 필요하다. 공공미술관의 경우 미술을 일상에 접근시켜 대중이 함께 이해하고 소통하는 책무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내친김에 ‘그래도 정말 어려웠던 순간들이 있지 않았겠냐’며 연이어 물음표를 던졌다.

그는 “내가 전에 일했던 곳은 사설미술관이다 보니 관장의 자율적인 생각이 깊이 있게 녹아들 수 있었다”면서 “도미술관은 공공미술관이기 때문에 전문가마다 비전이나 시각이 다를 때가 있고 어떻게 끌고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 제시가 어려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여성으로서의 어려움도 뒤를 이었다.

김 관장은 “여성으로는 남성중심의 풍토 안에서 남성화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성으로 타협에 저향해야 할 경우가 있다”며 “조금 더 공정하고 투명한 사고가 먹히지 않을 때, 원칙과 논리가 통하기 않을 때 어려움을 느낀다”고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일상이 일에 속해있는 듯 어려움을 고백하는 입술에서도 힘과 정열이 느껴지는 김 관장.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미술관을 이끌어 갈 것인지에 대한 방향에 대해 물었다. 그는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공적인 이곳이 편협한 지역주의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다. 세계적 스탠다드를 지키고 목표를 고수해야 한다. 그래서 공격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나는 적극적일 뿐이다”라고 답했다.

김 관장은 작가들의 꿈, 창작열에도 큰 관심을 내비쳤다.

“작가들은 장거리 선수이기 때문에 지구력이 부족해 빨리 부상했다가 자멸하는 경우 많다. 전략적 타협에 유연해야 한다. 21세기를 사는 작가들은 정보에 밝아야 한다. 열심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함량을 키우는 일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스스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고 상식이 존중되는 부분으로 나가는 것이 창의력을 손상시키지 않는다고 본다. 큐레이터는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가치관, 눈높이에 차이가 있어도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며 큐레이터들에게는 관계의 진정성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할 말을 부탁했다.

그는 “미술의 코드를 이해하고, 알아가기 위해서는 배움과 앎의 형태를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며 “그래야 미술도 경제처럼 마켓과 연결되고 투자가치가 높아지고 경쟁력이 상승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당부했다. 미술관이 존재하는 이유, 발전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적극적으로 이끌어는 김홍희 관장의 열정과 힘으로 우리 일상의 미술관이 세계 속의 미술관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