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각 당파에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던 정책인 탕평책은 조선시대 영조 때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세제책립과 대리청정(代理聽政)의 시비로 노·소론간의 분쟁이 격심해 신임사화라는 당화(黨禍)를 몰고 온 폐해를 직접 경험한 영조가 선택한 정치적 대안이었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책은 완전하지 못했다. 영조는 1728년에 정계에서 밀려난 소론·남인들의 반발세력이 주동이 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1755년에는 을사처분 때 귀양을 가서 20여 년 동안이나 한을 품어온 소론 윤지(尹志) 등이 주동이 된 나주괘서사건을 겪었다. 또 1762년에는 탕평책에 따라 다시 조정에 들어온 남인과 노론정권 위세에 미약한 자리를 차지해온 소론 등이 장헌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으려다가 이를 간파한 노론의 계교로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불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탕평의 조화에 더욱 힘을 쏟았다. 그의 침실을 ‘탕탕평평실’이라 부를 정도로 노론·소론·남인·북인을 고르게 등용해 당론의 화합에 심혈을 기울였다. 결국 영·정조시대에 꾀해진 탕평책은 이전의 격렬한 당파 간 갈등을 없애고 정국을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탕평책은 정파간 싸움을 지양하고 정국안정을 위해 실시하던 보편적인 정책의 일환이다. 허나 조선시대 탕평책은 불완전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측면이 강하다. 선조의 동인과 서인의 등거리 우대 정책이 그러하며 영·정조 역시 비대해진 신권을 견제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일환이었으니 말이다. 왕권이 통했으면 굳이 탕평책을 도입할 이유가 있었을까. 최근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는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자가 경선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국무장관에 기용했다. 비주류 출신인 오바마의 현대판 탕평책으로 혹자들은 이를 통합을 넘은 융합의 리더십이라고 표현한다. 통합과 융합의 리더십. 즉, 갈등과 분열을 봉합할 수 있는 탕평책은 정녕 이 시대에도 필요한 정책이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