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28 (토)

  • 맑음동두천 16.2℃
  • 흐림강릉 6.9℃
  • 맑음서울 16.7℃
  • 맑음대전 15.5℃
  • 흐림대구 9.1℃
  • 흐림울산 7.7℃
  • 맑음광주 16.3℃
  • 흐림부산 9.7℃
  • 맑음고창 15.1℃
  • 맑음제주 14.8℃
  • 맑음강화 11.8℃
  • 맑음보은 12.8℃
  • 맑음금산 14.9℃
  • 맑음강진군 12.8℃
  • 흐림경주시 7.8℃
  • 맑음거제 11.3℃
기상청 제공

[창룡문] 화서 이항로

이창식 주필

조선 말기의 학자 화서(華西) 이항로(1792~1868)가 후학을 가르쳤던 ‘벽계강당’을 ‘벽계서원’으로 승격시키려는 운동이 양평군에서 태동하고 있다. 화서의 초명(初名)은 광로(光老), 자는 이술(而述), 시호는 문경(文敬)이었다. 그는 세살 때 천자문을 떼고 여섯살 때 십구약사(十九略史)를 배웠다. 1840년 휘경원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벽계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훗날 전라도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으나 정사(政事)보다는 학문에 열중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직후 우리나라는 실학파의 현실론과 척사파의 북벌론으로 국론이 양분되었다. 이때 화서는 후자의 선두에 서서 적과의 일전을 주장했다. 화서는 서양문명을 배격하고 서학(西學)을 사학(邪學)으로 규정했다. “중화(우리나라 고유 문명)를 높이고 이적(야만)을 물리치는 것은 인류 역사가 끝낼 때까지의 대원칙이다.”라며 “중화의 임금이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 정상이지 오랑케 같은 임금이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변칙이다.”라고 강변했다. 화서는 그 이유로 서양문명은 인명을 결시하고 의리가 없으며 기술이 앞섰다 하나 변태이고, 본질이 없는 까닭에 내실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고 설파했다. 1866년 (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났을 때 국론은 또다시 양분됐다. 하나는 전수설(戰守說)이고, 다른 하나는 피난설이었다. 이때도 화서는 “서양의 침략자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편 주장이고, 적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적에 편들어 하는 주장이다.”라며 무력 항쟁을 주장했다. 피난은 임시변통일 뿐 근본적인 나라지키기 대책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화서의 애국주의적 전수설은 700명이나 되는 제자들로 하여금 피난 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이 아니라 무기를 들고 항일의병전쟁의 선두에 서게 하였다. 하지만 이때 젊은이들이 의병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살길 찾아 피난갔더라면 구차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한의 독립정신은 바로 세우지 못하였을 것이다. 벽계서원 승격은 바람직하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