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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특집] 역사의 숨결 되살려 ‘軍기지 흔적’ 지운다

한일합방 반대했던 비운의 마지막 황후 ‘윤비 생가’
태조 이성계 낙향중 하룻밤 묵고 물 마셨던 ‘어수정’
오랑캐 물리친 어유소 장군 등 역사 발자취 계승 숙제

 

● ‘군사기지’ 탈피 新도약 꿈꾸는 동두천

동두천은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60여년을 미군기지가 주둔하면서 기지촌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려졌다.

최근 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경제난의 가중으로 정부를 향해‘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수위가 높아지고 있어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라는 동두천 만의 색깔을 심기에는 다소 등한시 되고있다. 군사기지라는 이미지를 버리고 새롭게 도약하려고 하는 동두천의 역사를 짚어본다. <편집자 주>

동두천이란 명칭은 동쪽을 보고 개천이 흐른다고 하여 동녁동(東), 머리두(頭), 내천(川)자를 쓴다.

하지만 일제치하에서 머리두가 아닌 콩두(豆)자를 쓰고 있어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이 개정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동두천은 본래 고구려시대에는 내을매(內乙買)라 불리었다.

조선후기 김정호가 펴낸 대동지지에는 백제의 영토로 기록돼 있으며 신라 경덕왕 16년(757)에는 사천으로 변경 견성군(堅城郡, 현재의 포천)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고려 현종9년(1081)에 양주에 예속됐고 조선에 들어와서 세조12년(1466) 1월 관제개정에 따라 양주가 목(牧)으로 승격되면서 진이 두어졌다.

그 당시 양주의 속현으로는 견주·풍양·사천이 있었으며 목의 34개 방리 중에 하나인 이담이 동두천시의 근원이 된것이다.

우리민족의 역사는 후손에게 자부심과 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줘야 한다.

따라서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더 많은 역사를 발굴해 지역의 청소년들에게 우리고장의 역사를 바로알고 기지촌이 아닌 역사와 문화의 도시가 바로 동두천이란 사실을 알려줘 한다.

불현동 - 국모 순정황후의 고향

우선 우리 고장에 국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조선의 마지막 비운(悲運)의 황후였던 순정황후 윤비(尹妃)는 1894년 음력 8월20일 동두천시 불현동 동점마을에서 윤택영의 2남 2녀중 둘째이며 딸로서는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사려가 깊고 총명했다.

13세의 어린나이로 태자가된 윤비는 입궁한지 60년동안 망국(亡國)의 한과 일제통치하에서 설움, 해방 후 20년 동안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으며 낙선재에서 그 적막한 생애의 막을 내렸다.

윤비는 어전회의에서 순종에게 한일합방을 꾸준히 주장하는 친일파들의 이야기를 병풍 뒤에 숨어서 엿듣고 순종의 옥새를 자신의 치마속에 숨기고 내놓지 않았으며, 마지막 생을 마감하는 길에도 일체의 곡(哭)을 금하고 1년 상과 생전에 상궁으로 함께 지낸 김상궁을 위해 남은 재산을 써달라고 간곡히 뒤처리를 부탁하는 등 은혜를 잊지 않는 거룩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에 일제는 한일합방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일제의 앞잡이 이경모를 앞세워 동점마을 토지를 전부매입하고 1945년 해방을 앞둔 시점에서 윤비의 생가를 모두 헐어내는 잔악을 저질렀다.

이제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지만 우리는 과연 그 흔적을 찾으려고 노력해 보았는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뿌리가 있어야 역사와 문화가 보존되고 이어지며 현대와 어우러져 발전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모가 동두천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우리지역의 대단한 자랑거리이다.

또한 순정왕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는 국모로서 그 역할을 다 하며 존경을 받아온 인물로 윤비의 생가 안채는 조심스럽게 헐어서 그대로 서울 마포에 있는 한 터에 복원되어 있다.

어수동 - 태조 이성계의 애환이 깃들어

지금의 어수동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태종 이방원에게 밀려 1·2차 왕자의 난으로 함흥으로 낙향하던 중 한양에서 100리 길인 이곳 동두천 어수마을에서 하룻밤 묵고 물을 마시고 갔다고 전해져 6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수동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그 우물터가 있던 자리에 정자가 들어서고 어수정의 자리는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또한 태조 이성계가 두 아들을 잃은 슬픔에 소요산 소요사 아래에서 먼저 간 어린 세자와 사위의 명복을 4년3개월간 빌었다는 이성계의 별궁도 역사의 고증을 통해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일부 석축과 몇 개의 생활유품 조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어유소장군을 비롯한 문화유적 다수

동두천은 매년 소요단풍제를 통해 어유소장군의 행차를 재현하고 있다.

성종때 태어난 지금의 동두천시 지행동에서 태어난 정장공(貞壯公) 어유소장군은 남이장군과 함께 이시애 난을 평정하고 압록강 두만강으로 쳐들어오는 여진족 오랑캐를 물리친 명장이지만 동상은 물론 지행동의 생가도 보존되지 않고 있다.

이외에도 선조때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낸 화곡(禾谷) 정사호, 성종때 영의정을 지낸 문경공(文景公) 신용개, 1932년 사이비 종교 백백교의 천원금광터와 197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이호왕 박사의 유행성 출혈열 병원체 발견 및 예방, 한탄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한 곳 등 동두천은 수많은 역사와 문화를 숨기고 있는 곳이다.

동두천은 원효대사의 숨결을 간직한 천혜의 소요산이 있으며 기지촌이란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있다.

동두천에는 보물제1211호인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소요산 자재암)와 경기도 유형문화재 207호(안흥동) 고문서, 사패지경계석, 홍덕문선생 추모비, 어유소장군사당, 삼충단, 고령신씨 신도비군, 요석공주 별궁지, 소요사지 등 많은 문화재와 유적지가 있다.

이제 보물처럼 숨어있는 역사를 찾아 복원하고 문화를 계승하는 일이 후손들의 과제로 남아있다./동두천=진양현·김동철기자 jy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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