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7 (금)

  • 구름많음동두천 22.4℃
  • 구름많음강릉 23.7℃
  • 맑음서울 24.0℃
  • 구름많음대전 24.7℃
  • 구름많음대구 23.5℃
  • 구름조금울산 24.7℃
  • 구름많음광주 25.8℃
  • 구름조금부산 27.9℃
  • 구름조금고창 26.8℃
  • 구름조금제주 27.7℃
  • 구름조금강화 23.1℃
  • 구름많음보은 23.4℃
  • 구름많음금산 24.8℃
  • 구름많음강진군 25.9℃
  • 구름많음경주시 24.7℃
  • 맑음거제 25.1℃
기상청 제공

[에세이] 홍승표 파주 부시장

 

망설이며 겨울에 냇물을 건너듯,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 하듯

국민의 머슴으로 산다는 것
낮은 몸짓으로 살아야 하는 삶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도지사 수행중에 차를 세우고 만 것이다.

임사빈 지사님은 돈을 쥐어주며 집에서 하루 묵고 오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사오신 송아지 한마리

가난이 수치는 아니라지만 꿈 마저 접어야했던 어려웠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경기도 광주에서 끼니를 잇는 것조차 버거웠던 가난한 농부집안 6남매중 차남으로 태어나 학교에 다니는 것 조차 사치스러울 뿐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아버지께서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오셨는데 다른 집 송아지를 키워 중학교 입학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유년시절 학교가 끝나면 소 꼴을 베러 지게를 메고 산으로 들로 다니고 휴일이면 송아지를 들판으로 끌고나가 풀을 뜯기기도 했다. 송아지를 키워 남은 이익금으로 중학교에 갈 수 있었고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세 마리의 송아지를 더 키웠다.

그러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해마다 학교에 들어가는 동생들.. 학비 또한 해가 갈수록 늘어만 갔다. 장남인 형을 대신해 아버지께서는 내심 차남인 내가 공부보다 농사일을 도와주길 바라셨고 학교를 포기하고 집안일을 도우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만 같았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을 맡으셨던 선생님은 이런 나의 사정을 안타까워 하셨는지 아버지를 몇날 며칠 찾아오셔서 진학을 설득하셨고 어렵사리 늦은 4월에서야 중학교 교복에 배지만 바꿔 끼운 채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가 있었다.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꿈만 같은 일이었기에 수업이 끝나면 부모님 일을 머슴보다 더 열심히 도와 드렸다. 공부하는 것도 집안일을 돕는 것도 그렇게도 신나고 좋을 수가 없었다. 고3 여름 방학 때 연습 삼아 공무원시험을 보게 되었다. 늦은밤까지 시험공부에 매달리게 되었고 하늘이 도운 것 일까 덜컥 합격통지서를 받게 되어 학교 게시판에 이름이 나붙으며 동네에서도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그 해 11월에는 연세대에서 주최하는 전국남여 고교생 문예작품 공모에서 장원으로 뽑히는 사건이 있었다. 대학 국문과에 그것도 1학기 장학금이 주어지는 특전이 있었으나 주변의 축하 속에 남모를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나에겐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보였다. 결국, 한 해가 저무는 그 해 겨울 부모님께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으로 일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가난으로 자식 대학을 못 보내는 부모 마음은 어떠했으랴. 아버지는 속상하셨는지 슬그머니 나가 술을 한잔 걸치시고 들어와 나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그리곤 다음날 내 손을 이끌고 동대문시장에 가서 점퍼와 바지 두벌을 사주셨다. 교복 외에는 변변히 입을 옷이 없던 그 시절 나는 숙명처럼 공무원의 길로 접어들었다.



시골촌놈이 도지사 수행비서가 되다

처음 근무한 곳은 면사무소였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사회초년생에게 생각보다 힘들고 버거웁게 다가왔다. 부모님 몰래 조기입영원서를 내고, 자원입대를 하여 3년여 군복무를 마치게 되었다. 제대한지 하루 만에 군청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하필이면 담당업무가 병사업무로 징병검사와 현역병을 입영시키는 일이었다. 제대와 함께 맡은 병사업무는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때 당시 군청에 형과 사촌형이 함께 근무를 하고 있었다. 좋은점도 있었으나 불편한 부분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잘못하면 나중에 승진문제를 놓고 형제끼리 다퉈야 할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도청근무를 자진하고 전입시험을 보았다. 학교에서도 접해보지 못한 행정법과 헌법을 공부하느라 밤을 지새우며 간신히 끝자락에 매달려 합격 하게 되었다. 경기 광주에서 근무하다가 도청으로 전입을 하게 된 것이다.

청운의 뜻을 품고 도청에 왔지만 지연이나 학연이 전혀 없는 나는 망망대해에 떠있는 조각배 신세와 같았다.

도청은 군청과는 달리 고시출신들이 즐비했고 대부분이 대학졸업자들이었다. 가방끈이 짧다는 것이 콤플렉스가 되었기에 죽기살기로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분위기였고 계속되는 야근의 연속이었다. 이런 내 모습 때문일까. 주위에서 열심히 하는 친구, 일 잘하는 친구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인사팀을 거쳐 도청 공보실에서 3년 가까이 업무를 담당한 후 다시 인사팀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두 달 남짓 지났을까 갑자기 도지사 수행비서로 발탁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 당시 도지사의 파워는 대단했다. 민선인 지금과 달리 시장, 군수를 도지사가 직접 임명하는 시절이었고 사무관급 이상 간부 공무원 인사에 대한 전권을 가졌으니 그 권력은 막강했다. 처음 수행하게 된 분이 바로 임사빈 지사였다.

수행비서로 일하면서 일화가 하나 있다. 첫 해 광주에 있는 도립 종축장을 돌아보고 오는 길이었다. 차창 밖으로 길을 지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님! 차 좀 세워주세요” 엉겁결에 차를 세우게 된 것이다.

도지사를 수행하고 있는 입장에서 차를 세우라는 것은 커다란 무례일 수 있으나 임 지사는 사정을 아시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시고 하룻밤 고향에서 묵고 오라며 고기라도 사가라는 말과 함께 내 손에 돈을 쥐어 주셨다. 1년 동안 쉴 수 있는 날이 5일도 되지 않았던 나에게 그날만큼은 기뻐하시는 부모님과 함께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비서실에 근무하며 윤세달, 심재홍, 임경호 지사 등 세분의 지사를 더 모셨다.

관선시대가 가고 민선시대가 도래했고 IMF환란 극복의 주역이었던 임창렬 지사를 모시게 되었다. 그분의 카리스마는 실로 대단했다. 일처리가 늦어지기라도하면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고 도청직원들은 처음에 적응을 못해 급기야 사표를 던지는 직원이 생길 정도였다. 엘리트 공무원들이 모여 일한다는 중앙부처에서 장관과 부총리로 일하시던 분이 도청 직원들의 일솜씨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담금질 효과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직원들도 차츰 일머리를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그 때 그분의 의욕적인 업무처리로 인하여 경기도정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비서실에 근무하며 여섯 분의 지사를 모시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한분 한분의 실력이나 인품 또한 훌륭했고 그 분들에게서 얻은 경험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자양분이 었고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꿈에 그리던 방 3개 짜리 아파트

원래 경기도 광주 촌놈으로 그곳에서 결혼해 단칸방 전세를 얻어 신혼살림을 꾸렸다. 경기도청 전입시험에 합격하고 도청사업소로 직장을 옮기면서 부득이 화서동에 방 2개가 딸린 13평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연탄보일러구조로 되어있었던 그곳으로 이사를 가는날 갓 돌을 지난 아들 녀석을 안고 나오는데 장모님께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드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잘 살아 보겠다 다짐 했지만 객지 생활은 그리 녹녹치가 않았다. 시골에 살 때는 채소며 반찬이며 모두 집에서 가져다 먹었는데 여기서는 사소한 모든 것이 돈이었다. 절약하고 또 절약하며 허리띠를 졸라매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새로 짓는 아파트를 분양받게 되었고 그곳에서 16년을 살았다. 그 곳 역시 방 2개짜리 서민 아파트 였지만 연탄보일러가 아닌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 했다.

정말 열심히 살았고 특별히 낭비하며 살아온 것도 아닌데 먹고산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한꺼번에 목돈을 들일수가 없어 연탄 몇 장 들여놓고 쌀 몇 되를 사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공무원 박봉에 무능력하고 주변머리 없는 가장 때문에 죄 없는 아내와 아들 녀석이 고생한 것 같아 미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일만 알고 살아온 내게 크게 화내지 않고 살아온 아내, 삐뚤어 지지 않고 잘 자라준 아들 녀석에게 한없이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앞설 따름이다.

우리 가족에겐 방 3개 짜리 아파트가 꿈이고 희망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허리띠와 신발 끈을 질끈 동여맨 채 땀 흘리며 열심히 살아왔다. 정말 어려움 속에서 절약하고 저축을 해서 결혼 28년 만에 겨우 방 3개짜리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다. 이삿짐을 풀고 나서 저녁을 먹고 베란다로 나서는데 고혹한 달빛이 고고한데 달과 함께 돌아가신 부모님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지고 눈가에 안개가 서리기 시작했다.

 



공직을 천직으로

35년의 긴 세월을 공직에 몸담아 일하면서 비록 가진 것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 올곧은 자세와 진정성으로 일해 왔다. 도청으로 전입해 남모를 학력 콤플렉스를 겪으면서 더욱 이를 악물고 오직 일로 승부한다는 각오로 밤낮없이 일에 몰두 했고 경기방송국 설립이나 경기도 박물관, 실학박물관, 백남준 미술관, 도립국악당, 한류월드등 인프라 조성의 크고 작은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공정한 인사관리와 전직원 정밀 건강진단 등을 통해 직원 복지에 관심을 기울여 공무원 처음으로 경기도청 공무원 노동조합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고, 작년에는 공무원 최고의 대상이라는 다산대상 청렴봉사부문 대상을 받게 되었다.

처음 시골 면사무소에 발령 받았을 때 아버지는 “승표야! 기왕에 공무원을 시작했으니 잘해서 면장까지 해라” 라고 하셨지만 어느새 과천부시장을 거쳐 현재의 파주 부시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 때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동네잔치를 벌였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승진을 하거나 자리를 이동했을 때 아버지 산소를 찾아 인사를 올리곤한다. 일이 꼬이고 잘 풀리지 않을 때에도 산소엘 가서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그러면 가슴이 후련해지고 아버님이 도와 주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망설이면서 겨울에 냇물을 건너듯이,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 하듯이” 라는 글귀가 있다. 국민의 머슴으로 산다는 것은 낮은 몸짓으로 살아야 하는 삶이다.

아직도 부족한 점이 너무도 많지만 눈길을 걷는 것처럼 부끄럽지 않은 공직의 발자취를 남기고 항상 국민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하는 이유를 곱씹으며 공공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배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