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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을 찾아서] 이정섭 신라갈비 대표

수원갈비 2세대 명맥 잇는 ‘신라갈비’의 오묘한 맛
생갈비는 정(井)字 석쇠, 양념은 일(一)字 석쇠 고집
쇠고기는 최고급인 2+1 등급만 고객에 내놔

글ㅣ김동섭부장 kds610721@kgnews.co.kr
사진ㅣ최영석기자 choi718@kgnews.co.kr

 

 

‘수원갈비’. 그 기원은 우시장(牛市場) 이다. 1795년 정조의 화성 축성 이래 우시장이 발달하면서부터다. 일제 강점기 전국 3대 우시장으로 꼽혔을 정도다. 장날이면 각지에서 소장수와 농민들이 성시를 이루면서 1년 거래량이 2만두 이상이었다. 갈비의 고장으로 자리잡게 된 배경이다. 이후 1940년대 지금의 영동시장에 ‘화춘옥’이란 갈비업소가 생기면서 미식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시장은 도시개발에 따라 1978년 영화동, 1996년 곡반정동 우시장 시대가 막을 내린다. 200년간 지켜왔던 그 찬란했던 우시장이 역사의 뒷길로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수원갈비의 전통은 그대로 이어진다. 지난 1985년 수원시 고유 향토음식으로 지정된 것이 기폭제다. 이젠 ‘갈비의 고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 했다. 그 명소도 손꼽을 정도로 수원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다.

‘신라갈비(대표 이정섭)’는 1985년 오픈했다. 법원 사거리에서 27년 째 영업 중이다. 한 곳에서 한 사람의 이름으로 전통의 갈비 맛을 잇는 것도 흔치 않다. 지금은 번화가이지만 오픈 당시 이곳은 민가가 거의 없는 황량한 논밭이었다. 이 업소 이정섭 대표의 회고. “당시 이 부근은 농토였는데 남부경찰서 맞은편 쪽에 원두막갈비, 배나무갈비, 삼부자갈비, 옛수원갈비, 본수원갈비 등 갈비촌으로 일대 군락을 이뤘죠. 아마 영동시장의 ‘화춘옥’이 ‘수원갈비’의 1세대라고 하면, 당시의 이곳은 ‘2세대’라고 보면 될 거예요.” 이 대표(59)는 당시 원두막갈비 옆 ‘계량증명업소(1981~1985)’란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저울 공장’의 평범한 봉급쟁이였는데 워낙 박봉이라 직원을 두고 부업을 했다. 일종의 투잡이다.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밤에는 사업을 했다. “계량증명업소는 고철과 폐차, 차량 등을 저울에 달아 무게를 측정하는 거예요. 제가 저울공장을 다녔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사업을 벌린 거죠. 당시 회사 월급이 8만원이었는데 이 사업으로 단 하루동안에 월급을 벌었으니까요.” 수지맞는 장사였다. 그는 이재(理財)에 밝았다. 놀랍게도 이 “계량증명업소가 ‘신라갈비’를 창업하게 된 동기다.” 직장을 퇴근해 ‘계량증명업소’에 오면 보통 6~7시인데 주변 갈비집 화독에 피어내는 연기가 진동을 했어요. 그 냄새에 죽을 맛이더라구요. 침만 꿀꺽꿀꺽 삼켰죠.” 그는 작심을 한다. ‘갈비 집을 차리자’.

 

지금의 그 장소에 둥지를 텄다. 선친이 농사를 짓던 땅이었다. 터 규모는 2천150㎡(650평). 밀어붙였다. “철저히 시장조사를 했어요. 될 거란 판단이 섰죠. 당시(1985년) 이 부근은 막 토지개발공사가 개발하기 직전이었죠. 여기서 토지보상비로 2억을 받고 제2금융권에서 1억을 대출받아 3억으로 3층 건물을 짓고 영업을 시작했어요. 지금의 수원지법 수원지검 개원개청보다 1년여 빨리 오픈했죠.” 당시 신라갈비 터는 높은 밭이었다. 3층 높이의 구릉이었다. 따라서 형질변경으로 터를 깎아내고 기반을 다졌다.

 

정원에 연못도 만들었다. 토목공사비가 많이 들어갔다. 당시 330㎡(100평) 이상의 대중음식점은 제1금융권 대출이 안돼 금리가 높은 제2금융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픈하기 무섭게 불이 붙었다. “첫 달부터 수익을 내기 시작했어요. 갈비 1인분에 7천원을 받았죠. 원가는 2천300원이었는데요. 홀서빙 도우미는 월급이 15만원, 주방장은 40만원을 줬어요.” 타고난 재복(財福)이다. 기존 갈비 업소를 능가했다. 곱지않는 시선을 받았다. 가장 무서운 시샘이 ‘장사 시샘’이라고 하지 않던가.

 

 

‘신라갈비’라고 작명을 한 것도 그의 발상인데 적효했다. “국내 최고의 기업인 삼성전자가 부근에 있는데다 ‘신라’라는 호칭이 통일을 이룬 역사적인 나라명으로 호감을 주는 것 같아 ‘신라갈비’로 정했죠. 상호 덕도 톡톡히 본 것 같아요.” 신라갈비는 활황세를 탔다. 꾸준한 매출 증가세로 수원지역 갈비의 ‘넘버5’의 명소에 포함됐다. 만족하지 않았다. 2008년, ‘신라갈비’는 제2의 도약을 선언한다. 광교신도시 확장에 따른 도로확장으로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해 2월, 구 건물을 헐고 4층 신축건물을 세우는 공사에 들어간다. 10개월 후인 12월 준공했다. 무려 50여 억원의 건축비가 들어갔다.

통유리 외관으로 럭셔리하게 최고급 호텔식으로 지었다. 연건평 2천450㎡(740평), 1층 460㎡(140여평)은 홀과 대형 연회석 130여명 수용, 2층 230㎡(70여평)은 단체석 20명과 40명 수용, 3층 400㎡(120여평)은 룸 10실과 4~40명의 연회석, 4층 200㎡(60여평) 살림집으로 갖췄다. 건축 양식은 외부 노출 콘크리이트, 내부 벽체는 모두 제주럀 현무암이다. 철저히 화재에 대비한 양식이다.

 

신축 건물 짓고 난 이후 평균 매출이 70% 껑충 뛰었다. 종업원도 20명에서 32명으로 불었다. “건축비 50억원을 그대로 은행에 맡기고 이자만 받아도 지금 장사하는 것보다 더 크게 벌 거예요. 그러나 음식업은 사람의 마음을 사는 업이죠. 이제 기반을 잡은만큼 최고 질좋은 고기로 감동의 서비스를 베풀고 싶죠.” 30여년의 세월동안 왜 고비가 없었으랴, “IMF 때가 가장 힘들었죠. 광우병도 그렇구요. 슬기롭게 잘 넘겼어요.” 신라갈비가 우뚝 서게 된 비결은 역시 맛이다. “원 재료에서 차별??이루죠. 소고기는 2+1, 1+1, 1등급, 2등급, 3등급 등 5개 등급으로 나뉘는데 우리는 최고급인 2+1 등급만 사용하죠. 1985년 개업 이래 변함이 없어요. 거래처도 지금껏 서울 독산동의 단 2곳 뿐이죠.

 

주방장 3명도 오랜 세월 한 곳에 있죠. 맛이 한결같다는 얘기죠.” 신라갈비의 불판 ‘석쇠’도 과학이다. “생갈비는 정(井)字 석쇠, 양념은 일(一)字 석쇠이에요. 고기를 구울 때 기름이 숯불에 떨어지면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고기에 부딪히며 ‘훈제’가 되는 원리죠. 야외에 나가 철판 숯불에 구어먹는 고기 맛과 같죠.” 정갈한 밑반찬?눈길을 끈다. 물김치, 연어, 게장, 셀러드 등 10여 가지인데 한 번 테이블에 올려진 음식은 철저히 버리는 것이 원칙. 등심과 생갈비는 김치냉장고 0℃에서 3~4일 냉장 숙성시켜 선명한 분홍색일 때 내놓는다. 양념갈비는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특별한 장사비법은 없을까. 억세게 운이 좋아서일까. 그는 단호하다. “장사에 운은 없어요. 오로지 노력과 헌신, 땀과 정열, 서비스 뿐이예요.” 답이 의외로 간단하다. 그는 하루종일 업소에만 매달려 있는 걸까. 아니다. “고교시절(수원농고) 기타치고 노래를 불렀어요. 말리지 않았으면 보컬을 조직해 카수의 길로 갔을지도 몰라요.” 그는 1층 3~4평 남짓 자신의 사무실에서 매일 짬을 내 색소폰을 부른다. 케니지 음악을 즐겨 부른다. 장르가 다양하다. 생소한 음악 연주가 취미이자 특기다. 그는 ‘아이디어 뱅크’이기도 하다. 각 층마다 정수기, 냉온수기, 음료수냉장고가 즐비해 타이머를 달았다.

 

영업시간이 끝나고 그 다음날 영업 시작 2시간 전에 타이머가 작동한다. 밤 10시부터 새벽 8시까지 10시간은 멈춰 있는 거다. “우리 업소만 해도 17개의 음료수냉장고가 있어요. 타이머가 1개당 1만원이예요. 17개를 달았으니까 17만원?들어간 셈인데 아마도 그 절전 절감 효과는 몇십배 일 거예요.” 그래서인지 신라갈비는 혹한 혹서기 때 한달 전기료가 500만원, 비수기 때 400만원 안팎이다. “우리나라에 음식점이 60만개가 있는데 업소마다 24시간 켜놓아 돈이 줄줄 흐르죠. 산자부 차원에서 아예 음료수냉장고에 부착해서 판매토록 하면 엄청나게 절전이 될텐데요. 답답합니다.” 그는 산자부 장관에게 이를 건의하는 메일도 보냈다. 그러나 묵묵부답. “공무원들이 변해야 나라가 변하는 데 딱해요.”

 

연구하고 노력하는 자세가 몸에 밴 이 대표다. 신라갈비를 명소로 키?수 밖에 없는 저력이다. 그의 업소는 가족사업이다. 부인과 세 딸 모두 이곳에서 함께 일한다. 돈도 벌만큼 벌었다. 소원이 뭘까. “한 여름에 슬리퍼에 반바지 입고 공원을 산책하는 거예요. 추석 사흘, 구정 사흘을 제외한 1년 360일을 오전 8시30분 출근해서 밤 10시30분에 퇴근하죠. 고되죠. 근데 ‘또 오세요’라고 말하는 직업은 음식업 밖에 없지 않을까요?”

 

다시 태어나도 음식업을 하겠다는 각오다. 그는 6남매 중 막내다. 큰 형님이 前 이학섭 경기도의원이다. 지난 2001년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백혈병 환자인 형님을 위해 골수이식?해주었다. 형님은 10년이 지났지만 건재하다. 형재애에 앞서 그가 보여주는 사랑과 봉사의 실천이다. ‘신라갈비’의 정신이다. ☎031-212-2354 수원시 영통구 원천동 89-7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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