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엔 작업실을 하나 마련해야겠다
눈 내리는 밤길 달려갈 사나이처럼
따뜻하고 맞춤한 악수의 체온을
무슨 무슨 오피스텔 몇 호가 아니라
어디 어디 원룸 몇 층이 아니라
비 듣는 연립주택 지하 몇 호가 아니라
저 별빛 속에 조금 더 뒤 어둠 속에
허공의 햇살 속에 불멸의 외침 속에
당신의 속삭임 속에 다시 피는 꽃잎 속에
막차의 운전수 등 뒤에
임진강변 초병의 졸음 속에
참중나무 가지 끝에 광장의 입맞춤 속에
피뢰침의 뒷주머니에 등굣길 뽑기장수의 연탄불 속에
나의 작은 책상을 하나 놓아두어야겠다
- 시집 『불을 지펴야겠다』- 2009년 문학동네
지우개똥 수북이 주변은 너저분하고
나는 외롭게 긴 글을 한 편 써야겠다
세상의 그늘에 기름을 부어야겠다
불을 지펴야겠다
아름다운 가을날
나는 새로운 안식처에서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을 한번 해야겠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서설이 내리기 전
하나의 방을 마련해야겠다
버지니아 울프가 표명한 것처럼 작업실을 갖는다는 것, 나만의 공간을 갖는다는 것은 대다수 문인들이 꿈꾸는 바다. 그런데 박 철 시인은 이 가을에 원룸이나 오피스텔이 아닌, “저 별빛 속에 조금 더 뒤 어둠 속에”, “임진강변 초병의 졸음 속에”, “뽑기장수의 연탄불 속에” 작은 책상을 하나 놓아두어야겠다고 한다. 서설이 내리기 전 “불을 지펴야겠다”고 한다. 시인의 작업실은 그렇게 작고 소박한 일상 가운데에 있고 그래서 훈훈하고 따뜻한 감동으로 다가오나 보다. /박설희 시인